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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Mar 03. 2024

황제마을에서의 회상¹

백석 번역의 뿌쉬긴 시집에서

-황제마을에서의 회상¹    


음산한 밤의 장막이

잠들은 하늘에 드리웠다,

괴괴한 정적 속에 골짜기와 덤불이

잿빛 안개 속엔 먼 숲이 잠들고,

그늘 짙은 밀림 속을 달리는

개울물 소리 들릴락 말락,

잎새 위에 혼곤한 잔바람 숨을 쉬는 듯 마는 듯,

부드러운 달은 커다란 백조와 같이

은빛 구름 속을 헤엄쳐가라.     


돌투성이 언덕으론 폭포수

급급한 시내로 흘러내리고

저기 고요한 호수에는 여인들

한가한 물결되여 출렁거리며,

또 저기 웅대한 궁전은 묵묵히

원주(圓柱)들에 받들려 구름을 뚫고 치솟아라.

예가 아니러냐

하계의 온갖 신들이 평화로운 날을 보낸 곳이?

예가 아니더냐 로씨야의 미넬바 절간이?    

 

예 아니러냐 북방의 극락,

짜르쓰꼬예 쎌로²의 동산이?

로씨야의 힘센 독수리가 사자를 정복하고³,

평화와 위안의 품에 잠들은 그곳이?

위대한 아내³⁻¹의 권력 밑에

행복된 로씨야가 평안의 비호 아래 꽃피며,

영예로운 화환을 머리에 얹은

황금같이 찬란한 때는 영원히 달려가 버렸도다!     


여기서는 걸음마다 가슴 속에

지나간 날의 추억이 자라도다.

제 두리⁴를 돌아보며

로씨야 인은 한숨으로 말하여라

-'모든 것은 사라지고, 위대한 여인은 가버렸다!'

그리하여 깊은 생각에 잠겨,

그는 풀 깊은 강 언덕에

바람결에 귀를 기우리고 잠잠히 앉았고나.

흘러간 세월이 눈앞에 얼른거리고,

정신은 고요한 흥분 속에 잠겼더라.

    

그는 보노라 – 물결에 휩싸여,

굳고 이끼 낀 벼랑 위에

기념비⁴⁻¹ 하나 높이 치솟고, 그 위에

어린 독수리 날개를 펴고 앉아 있어라.

무거운 사슬과 번개의 화살이

엄연한 기둥을 세 겹으로 감싸도다.

발밑으론 사방에 웅성거리며 잿빛 성벽이

번듯거리는 물거품 속에 놓여 있어라.    

 

무성하고 음침한 소나무 그늘에

소박한 기념비⁴⁻²는 솟아 있나니,

오, 까굴⁵ 강기슭이여,

이것은 얼마나 너를 위해 욕되였고,

그리고 귀중한 조국에는 영광이였더냐!

전쟁의 풍우 속에 싸움으로 길러진

오 로씨야의 거인들이여,

그대들은 영원히 불멸하리라!

그대들의 이야기는, 전우들이여, 예까쩨리나의 친구들이여,

대대로 전하여 나리도다.     


오, 군사에 대한 쟁론으로 떠들썩한 세대여,

로씨야의 영광의 증인이여!

너는 보았더라,

오를로브⁶여, 류먄째브⁷며, 쑤보로브⁸며,

쓸라브의 무서운 후손들이

젭쓰의 번개⁹로 승리를 빼앗은 것을,

이들의 용맹한 공적에

세상은 겁에 질려 놀랐나니,

데르쟈윈¹⁰과 뻬뜨로브¹¹는 영웅들에게

소리 높은 형금¹²을 울려 노래 불렀도다.  

   

잊지 못할 그대는 달려가 버렸어라!

그리하여 새로운 세대는 멀지 않아,

새로운 싸움과 전쟁의 공포를 보았나니,

고난은 인간의 운명이여라.

교활과 몰염치로 왕관을 쓴 황제¹²⁻¹의

길 들지 않은 손안에서

피 투성이 같이 번쩍였도다.

만유의 채찍¹³은 일어섰어라

–멀지 않아 새로운 접전의

무서운 노을은 붉었어라.     


이렇게 하여 원쑤는 로씨야의 벌판에

급급한 흐름으로 쳐들어 왔도다.

그들 앞에는 침침한 초원이 깊은 꿈속에 놓이고,

땅은 선혈의 김에 서렸어라.

평화로운 마을이여 거리들은 안개 속에 불타고

하늘은 주위에 노을 옷을 두르고,

무성한 숲은 도주자를 숨겨 주고

또 벌판에는 한가한 보습이 녹쓸고 있고나.

    

그들은 간다

–그들의 위력 앞에 거칠 것이 없어라,

모든 것을 부스고, 재로 만들고,

그리고 죽어간 벨론의 아들¹⁴의

창백한 그림자들이

환상의 연대로 모여들어,

컴컴한 무덤 속으로 끊임없이 나려가고,

아니면 괴괴한 밤에 수풀 속을 싸다니고...

그러나 아우성 소리 들렸도다!

안개 낀 골짜기로 그들은 나아간다

-갑주와 칼들이 절컥거리며 소란하여라!...     


오 이종족(異種族)들이여, 겁을 내여라!

로씨야의 아들들은 움직였도다.

늙은이도 젊은이도 일어섰도다,

대담한 무리들 향해 달려가도다.

그들의 심장은 복수에 타올라라.

폭군이여, 떨어라! 몰락의 때는 가까웠도다!

모든 전사가 장수임을 너는 보리라

그들의 뜻은 승리하든가,

아니면 포연 속에 죽는 것,

로씨야를 위하여, 성령의 신성을 위하여     


날쌘 말들은 싸움에 숨 가쁘고,

골짜기엔 전사들이 널려 있소라.

행렬은 행열에 이어 흐르고,

모두 다 복수와 영광에 숨차나니,

그들의 가슴에는 환희가 북바쳐라.

그들은 장엄한 잔치 터로 날아가라,

칼은 사냥감을 찾도다.

하여 이제

–싸움은 백렬하고, 멧등¹⁵에서는 우뢰가 떨치고,

허공에는 빼곡이 칼과 살이 휘날고,

또 방패에는 핏방울이 뛰여라.  

   

싸웠도다, 로씨야 사람은 승리자로다!

그리하여 오만한 골놈¹⁶은 도망쳤더라,

그러나 하느님은 싸움에서 거센 자에게

마지막 빛으로 영관¹⁷을 씌웠나니,

백발 성성한 인도자¹⁷⁻¹는

예서 그를 압도하진 않았도다,

오 보르지노의 피어린 싸움터¹⁸여!

그대는 최대의 광분과 오만을 못 가졌도다!

아! 크레믈리¹⁹의 포탑에 골놈이!...  

   

모쓰크바의 야경이여, 고향의 땅이여,

거기서는 꽃피던 시절의 이른 아침에

나는 시름 없는 황금의 때를 보냈더라,

슬픔도, 불행도 모르고.

그대는 그들을 보았도다, 내 조국의 원쑤를!

피는 그대를 물드리고, 불길은 휩쌌어라!

나는 복수와 목숨을 그대에게 이바지 못했나니,

헛되여라, 분격에 이 넋만이 타오는 건!     


너 어데냐,

백개조(百箇條) 종교령²⁰의 모스크바의 정화여,

고향의 땅의 우람찬 절경이여?

전날에는 위대한 거리가 눈에 띠이던 그곳에,

지금은 다못²¹ 폐허만이 남았고나!

모스크바여, 너의 풀죽은 모양이

얼마나 로씨야 사람에겐 무서웠으랴!

귀인과 황제의 고대광실은 사라지고,

모든 것을 불길은 가시여버렸더라.

포탑의 꼭대기는 떨어지고,

부자들의 화려한 방들은 무너졌도다.   

  

그리하여 화려함이

그늘진 숲과 정원에 깃들인

목서(木犀)²² 향기 높고, 보리수 잎 떨리던,

그곳에 이제는 숯과 재와 티끌뿐.

아름다운 여름밤, 만상이 괴괴한 때,

거리로 소란한 즐거움이 날아들지 않고,

불빛 속에 강기슭과

밝은 수풀은 번쩍이지 않나니,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말 없어라.   

  

로씨야 뭇 거리의 어머니들이여, 기뻐하며,

이국 놈들의 멸망을 보라.

이제 그들의 오만한 대가리 위에

무겁게 나렸어라,

창조자의 복수의 채찍은,

보아라, 그들은 도망치다,

감히 좌우를 돌보지도 못하고,

그들의 피는 멎음 없이 눈 위에 강으로 흘러라.

도망치도다

–밤의 칠흑 속에 그들의 눈은 죽음을 만나고,

그러자 뒤에서는 로씨야의 칼날이 쫓아가도다.

    

오, 구라파의 강대한 종족들을

전율시킨 너희들,

오, 흉악한 골족이여!

너희들은 무덤 속으로 떨어졌구나.

오 공포여! 오 무서운 시각이여!

거만으로 하여

칼로 보좌를 전락시키려 환상하고,

진리의 외침과 신앙과 법률을 멸시한

행복과 벨론의 귀염둥이, 너는 어데냐?


사라졌도다, 무서운 아침 꿈과도 같이!

파리에서 로씨야 사람들이!

-복수의 화톳불은 어데냐?

갈리야²³여, 머리를 숙여라.

그러나 내 눈에 보임은 무엇인고?

로씨야인은 화평의 웃음 머금고,

황금의 월계관을 들고 오노라.

아직 먼 곳에서는 전쟁의 요란한 소리 들리고,

모스크바는

한밤중 어둠 속의 초원같이 무료한데,

그러나 그는 – 원쑤에게 죽음이 아니라 구원을,

그리고 이 땅에는 복된 평화를 가져오노라.     


오 싸움의 무서운 전열(戰列)을 노래한

영감에 찬 로씨야의 시인²³⁻¹이여,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불타는 마음으로

황금의 거문고를 울려라!

그렇다, 또다시 조화된 소리는

영웅들에게 영예를 드려 흘러나오고,

그리고 자랑스러운 금선²⁴은

심장 속에 불을 질러 놓나니,

젊은 전사는 싸움 즐기는 소릿군의 노래에

가슴 끓어오르고, 전율하는 것이여라.

(1814년, 15세)

유년의 푸시킨

<백석의 註>

■황제마을에서의 회상¹-‘짜르쓰꼬예 쎌로’는 황제의 가족들이나 일가친척 그리고 황제를 위하는 사람들의 자제들이 있는 한마디로 “황제의 마을” 즉 황족들의 마을인 것이다. 이 황족 마을에는 “리쩨이”라는 유명한 황족학교가 있었다. 비공식적으로는 국가의 중추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던 이 6년제의 중고등학교 과정이 있는 리쩨이 학교에 1811년 10월 19일에 푸쉬킨은 귀족의 자녀로서 또한 시험을 쳐서 실력으로 당당히 입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1812년에 나폴레온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의 러시아 침공이 있었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의 이야기는 학생시인 푸쉬키능 자극하여 1814년 <황제마을에서의 회상>이라는 시를 탄생하게 하였다. 뒤이어 1815년 1월 8일 리쩨이 학교 공개시험에서 푸쉬킨은 손님으로 참석한 시인 제르자윈 앞에서 이 시를 낭독하였다. 한마디로 푸쉬킨은 고전주의의 장엄한 애국주의적 정신으로 송가 형식에 입각한 이 문제의 시를 낭독하여 진급공개 시험에서 참석한 제르자윈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푸쉬킨은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였다.     


“제르자윈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나를 불러오라고 하였다. 나를 포옹하였다.”     

리쩨이 시대의 원고에는 다음 두 연이 더 첨가되어 있다.

    

제 2련으로     

헤엄쳐가며–그 해쓱한 빛으로

주위의 만상을 비치여라,

오랜 보리수 늘어선 길, 눈앞에 열려 있고,

언덕이며 풀밭들 환히 보이여라.

나는 보노라,

여기 어린 버들은 백양나무에 얽히며,

출렁거리는 물의 수정 표면에 비쳐지고,

자랑스러운 나리꽃들 가운데 공주인 양

황홀히 아릿답게 피였도다.     

마지막 둘째 연으로     

예까쩨리나의 훌륭한 후손들이여!

어찌하여 하늘의 아오니다는

우리 시대의 소릿군,

쓸라브 민병의 탄창시인(彈唱詩人)처럼

나의 넋을 황홀로써 불태우지 않느뇨?

오, 만일 시인들의 아뽈론이 놀라운 재능으로

지금 내 가슴 속을 울려 준다면!

너로 하여 넋을 잃고

하늘의 화음으로 거문고를 타며,

시간의 어둠 속 빛났으련만!

    

Young Pushkin in the Gardens of the Lyceum - A. Z. Itkin

<옮긴 이 註>

■짜르쓰꼬예 쎌로²-차르스코예 셀로(Царское Село)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 지역 남쪽 24km 정도에 위치에 있는 러시아 황제의 별궁으로, 예카테리나 궁전 등이 모여있는 피서지이다. 예전에는 푸시킨이였지만,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푸시킨스키구가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지구와 관련 건조물군 중 하나로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17세기 이곳은 스웨덴 귀족의 소유지였다. 원래 핀란드어 이름은 보통 ‘높은 땅’(a higher ground)으로 번역되었다. 이에 반해, 러시아의 언어학자 막스 바스메르는 그것이 ‘섬’을 뜻하는 핀란드어 ‘saari’에서 온 ‘섬마을’(Saaren kylä)이라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핀란드어 이름은 18세기 러시아에게 사르스코예 셀로(Sarskoye Selo)로 발음된 후 차르스코예 셀로(Tsarskoye Selo, 황제의 도시)로 변했다.   

  

1708년 표트르 1세는 아내이자 이후 여제가 되는 예카테리나 1세에게 저택을 선물로 주었다. 1724년에 그녀는 이곳에 브라고베셴스키 대성당을 짓고, 이 지역의 이름을 블라고베셴스코(Благовещенское)로 바꿨다. 그러나 시험 시간의 걸려서 즉시 사용되지 않았다.     


예카테리나 1세는 이곳을 황제가 거처하는 곳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그녀의 딸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이탈리아 건축가인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에게 예카테리나 궁전 건설을 책임지게 했다. 이후 여제가 된 예카테리나 2세와 건축가 찰스 카메론은 카메론 갤러리로 알려진 궁전 건축물로 확장했다. 지금은 2개의 궁전이 있는데, 예카테리나 공원과 인접해 있는 바로크 양식의 예카테리나 궁전과 알렉산드르 공원과 인접해 있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알렉산드로프스키 궁전이다.     


예카테리나 궁전은 더치 아드미랄티, 크리킹 파고다, 체스메 기둥, 루먄체프 오벨리스크, 대리석 다리 등의 건축물이 있는 프랑스식 정원과 영국식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알렉산드르 공원에 몇 가지 신와저리의 건축물이 있고 중국 마을이 있다.  

   

18세기 말경, 차르스코예 셀로는 귀족들 사이에서 여름 피서지로 인기 있는 장소였다. 1770년, 예카테리나 1세가 차르스코예 셀로의 남쪽에 세운 소피아 마을(자신의 독일어 이름이 소피아)에는 호위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건축가 찰스 카메론이 설계한 신고전주의 5개의 돔으로 구성된 승천 궁전이 이 지역의 중요한 유적이다. 1808년에 소피아와 차르스코예 셀로는 하나의 도시로 통합되었다.     

1811년에, 알렉산드르 1세는 차르스코예 셀로 리시움(황립 귀족학교)을 예카테리나 궁전 옆에 열었다. 1817년에 졸업한 최초의 학생 중에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이나 알렉산드르 고루챠코프도 있었다. 또한 미하일 살티코프시체드린도 리시움에서 배웠다. 차르스코예 셀로의 문학적 전통은 안나 아흐마토바와 인노켄티 안넨스키 등의 위대한 시인에 의해 2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차르스코예 셀로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에 러시아 최초의 철도가 1837년에 개통되었다. 푸시킨 방면 열차의 터미널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비쳅스크 역(벨라루스의 비쳅스크에서 유래)은 제정 시대에는 차르스코예 셀로 역(Царскосельский вокзал)이라고 불렸다. 철도가 생겨나면서 도시는 19세기의 산업화로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1917년에 놓인 정부의 라디오 방송국으로 알려져 있다. 그해 봄, 니콜라이 2세는 그가 좋아했던 알렉산드로프스키 궁전에 연금되었다.     


1918년, 차르스코예 셀로는 볼세비키에 의해 데츠코예 셀로(어린이 마을이란 뜻)으로 바뀌었고, 1937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사후 100주년을 기념해 푸시킨(Пушкин)으로 바뀌었다.

     

1941년 9월 17일, 독일군은 푸시킨 마을을 점령했다. 유명한 앰버룸을 포함하여 많은 역사 유적과 건축물이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1944년 1월 24일이 되어서야 붉은 군대에 의해 이 땅이 탈환되었다. 전쟁 후 차르스코예 셀로의 재건이 시작되었고, 예카테리나 궁전의 많은 공간이 복구되었지만 교회와 알렉산드로프스키 궁전에 관해서는 아직 진행 중이다.     


■로씨야의 힘센 독수리가 사자를 정복하고³-사자는 스웨덴의 국장이고 독수리는 러시아의 국장. 여기에서는 러시아가 승리한 러시아-스웨덴 전쟁(1788~1790)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러시아 제국은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의 딸과 결혼한 이반 3세가 이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자신의 국새에 쌍두 독수리를 쓰기 시작하면서 쌍두 독수리를 국장으로 사용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혈통을 받아들이면서 러시아가 동로마 제국, 즉 로마 제국의 계승자이며 동시에 동방 정교회의 수호자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위대한 아내³⁻¹-예카쩨리나 2세(1729~1796)를 일컬음.

■두리⁴-①사물의 테두리나 바깥 언저리②‘둘레’의 북한어 ③‘두레’의 방언

■기념비⁴⁻¹-1770년 러시아 터키 전쟁에서 오를로프 제독의 지휘 아래 체스메 부근 해전에서

대승한 기념으로 짜르쓰꼬예 쎌로의 호수 가운데의 한 섬에 예까쩨리나 2세에 의하여 세워진 기념비.

■소박한 기념비⁴⁻²-1770년 러시아 터키 전쟁에서 우만쎄프 장군 지휘 아래 까굴의 프루트 강 강언덕에서 대승한 것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까굴강⁵=루마니아의 뱃사라비아 지방 프루트에 위치한 까굴에 있는 강.

■오를로브⁶=알렉세이 그리고리예비치 오를로프(Алексей Григорьевич Орлов, 1737년 ~ 1808년)-러시아의 육군대장.

■류먄째브⁷Pёtr Rumiantsev(1725~1796)-러시아 장군.

■쑤보로브⁸-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수보로프(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Суво́ров, 1729년 ~ 1800년)는 근세기에서 가장 뛰어난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이자, 러시아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며,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대원수였다.

■젭쓰의 번개⁹-젭쓰는 슬라브 신화에 나오는 번개의 신이며 전사의 신.

■데르쟈윈¹⁰-가브릴라 데르자빈(Gavrila Derzhavin 1743년-1816)은 러시아 고전주의의 대표적 시인이다. 가난한 귀족 출신으로, 사병 생활 끝에 장교가 되어 군대복무를 오래 하다가 나중에는 문관이 되었다. 40세가 다 되어 <펠리차>라는 예카테리나 여제를 찬양한 한 편의 시를 그녀에게 바쳤고 이 시로 일약 필명을 떨쳐 관직도 높아졌다. 데르자빈의 시는 고전주의적 장중성은 있으나 답답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점에 특징이 있고, 문체는 우미하면서도 발랄함을 잃지 않았으며 화려하면서 동시에 리얼리티를 갖추고 있었다. 18~19 양 세기에 걸쳐 러시아 시단에 군림하면서 국가의 영광, 철학적 사색, 생활의 기쁨을 노래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뻬뜨로브¹¹=Vasili Petrov 1763~1799)-러시아의 송가(頌歌) 시인.

■형금¹²=현금(玄琴)-거문고는 순우리말 이름이며, 한자로는 현학금(玄鶴琴) 혹은 현금(玄琴)이라는 기록이 있다.

■교활과 몰염치로 왕관을 쓴 황제¹²⁻¹-나폴레옹 1세를 가리킨다. 여기서부터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패배를 노래하고 있다.

■만유의 채찍¹³-?

■벨론의 아들¹⁴-벨론(벨로나)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여신.

■멧등¹⁵-‘뫼’의 방언

■골놈¹⁶-프랑스인의 뿌리인 골족(les gaulois)을 낮추어 부름.

■영관¹⁷-영광의 관(冠).

■백발 성성한 인도자¹⁷⁻¹-미하일 꾸두조프(1745~1813 Mikhail Kutuzov) 장군을 일컫는다. 1812년 대 나폴레옹 조국 전쟁 때 후퇴와 초토화 전술로 조국을 위난으로부터 구출한 명장. 보로지노 전투에서는 패배했으나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을 추격하여 스몰렌스끄에서 괴멸시켰다.

■보르지노의 피어린 싸움터¹⁸-보로디노 전투는 1812년 9월 7일 러시아 원정 중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 가장 거대하고, 많은 피를 흘렸던 전투이다. 양쪽 합쳐 250,000-350,000명의 군대가 뒤엉켜 싸운 끝에 최소한 70,000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지휘 하의 프랑스 대육군은 미하일 쿠투조프 장군의 러시아 제국군을 모쟈이스크 서쪽 보로디노(Borodino) 마을 근처에서 공격해 전장의 주요 위치를 마침내 점령했지만, 그러나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데 실패했다. 대략 나폴레옹의 병사 ⅓이 죽거나 다쳤고, 러시아의 피해는 이것보다 더 무거웠지만, 러시아의 거대한 인구는 이를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았다. 1주일 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 입성하게 되었다.

■크레믈리¹⁹-크렘린(кремль 크레믈)은 러시아어로 "요새", "성채", "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역사적인 러시아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주요 성의 요새를 가리킨다. 대표적인 크렘린으로는 오늘날 러시아의 관저로 사용되는 모스크바 크렘린이 있다.

■백개조(百箇條) 종교령²⁰-1551년 이반 뇌제의 임석 아래 열린 백개조 제정회의에서 채택된 결의집. 이후로 교회의식의 통일, 종교재판 및 수도원에 의한 토지 소유 제한 등이 명문화되었다.

■다못²¹-‘다만’의 방언

■목서(木犀)²²=중국이 원산지인 물푸레나무과의 꽃나무. 목서는 꽃의 색깔에 따라 금목서(金桂), 은목서(银桂) 등으로 세분화 된다. 향이 무척 향기롭고 강해서 만리향(萬里香)이라고도 한다.

■갈리야²³=갈리아(Gallia)-로마 제국이 프랑스 지역을 가리키던 말.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전체 면적과 스위스의 대부분 지역, 그리고 라인강 서쪽의 독일과 네덜란드 남부 및 북부 이탈리아의 일부에 해당한다. 지금도 그리스어로는 프랑스를 갈리아라 부른다. =골(Gaul)족

■영감에 찬 로씨야의 시인²³⁻¹-러시아 낭만주의의 대표적 시인 바실리 주꼬프스끼(1783~1852)Basili Zhukovski)를 말한다. 그는 1812년 대 나폴레옹 조국 전쟁에 의용군으로 참가하였으며 따루띤슦 전투를 전후하여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인 <러시아 병사들의 병영의 노래꾼(1812>을 썼다.

■금선²⁴=琴線-거문고 줄


*스스로 가난하고 쓸쓸한 길을 간 자유로운 영혼이자 시대와 타협하지 않은 고독한 영혼, 백석은 타고난 시인이었다. 그는 한편의 시집으로 문단에 우뚝 섰으며 지금까지 그 시집은 한국 문학의 걸작으로 남았다. <사슴> 이후로 시집을 내지 않았다. 그는 1939년 홀연히 만주로 떠났다. 명예, 사랑, 성취 따위는 백석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하고 고독하고 자유롭게 살고자 했다. 그는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통해 다수의 산문을 발표했다.   

 

그는 6개 언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일본어, 중국어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특히 러시아어를 잘했다. 대부분의 외국어를 독학으로 섭렵했다. 해방 후 고당 조만식 선생의 러시아어 통역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많은 러시아어 소설과 시를 번역했다. 그의 번역 작품은 수준급이었다. 북한에서 백석은 번역가로 활동했다. 그가 번역해 내놓은 소설 <고요한 돈>은 북한에서 유명했다. 하지만 마지막 3권 번역 원고를 화재로 유실하는 바람에 그의 절망이 컸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북한에서도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삼수갑산을 자청해서 들어갔다. 극한으로 자신을 내몬 것이다. 그는 삼수갑산에서 고독하고 자유롭고 싶었다. 백석은 눈 감을 때까지 시인의 마음으로 살았다. 그래서 외로움과 가난함은 그의 운명이었다. 그는 천생 시인이었던 것이다.


[논문 초록] 백석의 푸시킨 번역시 연구

-배대화 경남대학교 교수     

백석은 러시아 문학 작품을 상당수 번역한 것으로 유명하다. 해방 전 그의 러시아 문학 번역은 주로 만주 체재 시절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그는 바이코프의 작품을 다수 번역했다.

    

해방 후 백석의 러시아 문학 번역은 시, 소설에 걸쳐 매우 방대한 양에 이르며 그의 수려한 우리말 표현은 그의 번역이 뛰어나다는 것을 방증한다. 창작보다는 번역에 전념했던 백석이었기에 그의 번역 활동이 갖는 정치적 함의가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백석의 러시아 번역 작품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원문과의 대조를 통한 번역의 관점에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본고는 백석의 푸시킨 번역시 몇 편을 대상으로 그의 번역의 양상을 분석해보았다. 분석을 위해 벤야민의 "의도하는 방식"과 로트만의 "문화적 기억"이라는 관점이 원용되었다.      

첫째로 20년대와 30년대에 번역된 푸시킨 번역시와 백석의 번역시 3편, 즉 「작은 새」, 「겨울길」, 「겨울 아침」을 비교, 분석했으며, 둘째로 푸시킨의 장시 「짜르스코에 마을에서의 추억」에 대한 백석 번역을 분석했다.      


분석의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첫째로 20년대와 30년대의 번역시보다 백석의 번역시는 어휘와 표현에서 더 자연스러우며 리드미컬하여 창작시로도 읽힐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의도하는 방식"이나 "문화적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푸시킨의 생애, 러시아 민족 정서 등과 연관된 부분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둘째로 백석의 「짜르스코에 마을에서의 추억」 번역시는 부분적으로는 약간의 오역도 보이지만, 송시풍인 원시의 주조음을 이루는 고양된 감정과 애국적 정서 그리고 운율적 장치를 성공적으로 번역해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짜르스코에 마을에서의 추억」의 백석 번역의 뛰어남은 다음과 같은 시적장치에서 비롯된다.      

첫째로, 자연스러운 어휘 선택이며,   

   

둘째로 선어말어미 [-더-], 종결어미 [-어라], 감탄형 종결어미 [-도다], [-구나] 등등을 규칙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원시의 회상하는 형식과 상승하는 정서를 잘 표현함과 동시에 운율적으로도 원시와 조응하는 형식을 빚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짜르스코에 마을에서의 추억」의 백석 번역시는 "문화적 기억"이라는 측면에서는 약간의 오류가 보이지만, "의도하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는 원시의 "의도하는 방식"을 잘 번역해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백석의 푸시킨 번역시는 푸시킨 시의 번역뿐만 아니라 19세기 러시아 정형시 번역에도 하나의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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