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엄리 이야기
어선으로 위장한 밀항선 밑창에 숨어 일본 해안에 어렵사리 도착한 아버지는 일본 접선자의 안내를 받으며 오사카에 있는 고모 댁에 무사히 도착했다. 부산에서 오사카까지의 직선거리는 840km이다. 밀항에 성공한 후 1년이 채 안 되어 간다온다 말없이 떠난 아버지가 편지를 보냈다. ‘나는 잘 있다’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편지를 읽으며 방에 혼자 숨어서 훌쩍이던 게 생각난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봉투에는 보낸 사람 이름이 ‘金田勝弘’ 이라고 되어 있었다. 일본인 위장 이름 ‘가네다 가츠히로’였다. 새로운 일본식 아버지가 탄생한 것이다. 밀항자에 대한 감시가 심하던 때였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먹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에게 여긴 이 외로 먹을 것이 많구나’라며 일본사람들이 먹지 않고 버리는 소와 돼지 내장이며, 소꼬리와 우족(牛足) 같은 귀한 것을 공짜로 얻어다 잘 고아 먹고 있다는 것이다. 편지를 읽던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다. 한참 커서야 무슨 말인지를 알았다. 아버지가 처음 일본 생활을 시작한 츠루하시(鶴橋)라고 하는 곳은 오사카 시내의 낮은 지역으로 근처에 개천도 있고 다리가 있었다. 다리 아래에는 거지들이 모여 살았다. 고기 핏물을 씻을 개울이 있으니 도살장도 많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소의 다리와 머리 그리고 꼬리와 내장 같은 것은 그냥 버리는 물건이었다.
지금은 맛있는 요리로 알려진‘ 곱창, 대창과 우설(牛舌)구이’를 일본에선 ‘호루몽야키(ホルモン燒)’라고 한다. 직역하면 "호르몬 구이"이다. 여기서 호르몬(ホルモン)은 오사카 사투리인 ‘호루모노(ほる物)'에서 비롯되었다. 쓸모가 없어 ‘버리다’는 표준어로 ‘스데루(拾てる)’라 쓰지만, 간사이 사투리로는 ‘호루(ほる•放る)라고 한다. 일본사람들은 원래 내장을 먹지 않고 그냥 버렸다. 그것들을 일본 교포들이 주워 와서 구워 먹었기 때문에 "버리는 것 구이" 즉 ‘호루몽야키’라는 이름이 되었다. 호루몽야키(ホルモン焼き)는 재일교포들의 배고프고 서글픈 추억의 요리다.
아버지가 이런 요리에 익숙했던 데는 이유가 있다. 아버지가 일본에 가기 전 1960년대 초 그 시절만 해도 구엄리 마을에선 심심치 않게 돼지를 잡았다. 밀도살이란 생각조차 없었다. 잔칫날이나 장례를 치르는 일이 생겼을 때는 어김없이 몰방(馬房)에서 돼지를 잡았다. 몰방 한구석에서 돼지 멱을 따고 순대를 만들기 위해서 선지를 큰 낭푼이에 담는 풍경은 흔한 일이었다. 돼지 오줌보를 얻어 보릿대를 꽂아 입바람을 불어넣고 공회당 마당에서 공차기도 하였다. 농사일이 한가한 늦가을부터는 추렴(出斂)이란 것도 가끔 했다. 주로 돼지를 잡았지만, 말도 추렴을 해서 잡았다. 말은 여름에 잡으면 풀냄새가 난다고 해서 주로 건초를 먹는 겨울에 잡았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12월 말이었다. 차가운 겨울철 보름달이 휘황하게 밝은 어느 날 밤이었다. 아버지가 늦은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나에게 대나무 구덕에 질빵을 메게 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바닷가에 있는 모진개 태역밭으로 갔더니 동네 어른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고 돌담 구석에 새끼가 달린 암말이 매여 있었다. 얼마 지나 사람들이 몽생이 새끼를 따로 떼어 놓고 어미 말을 태역밭 한가운데로 끌고 왔다. 구엄리 마을에서는 팔만이 삼춘이 이런 일엔 일인자였다. 그가 오른손에 꼬나쥔 도끼날이 달빛을 받아 시퍼렇게 번쩍였다. 순간 팔만이 삼춘은 말의 정수리을 향해 도끼를 거침없이 내리쳤다. 단 한 번의 일격이었다. 말은 그 자리에 꼬꾸라지고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몽생이가 가늘게 울었다. 울음이 아니라 신음처럼 들렸다.
팔만이 삼춘은 이번에는 쓰러진 말을 뒤집어 놓더니 배를 가르기 시작하였다. 팔만이 삼춘은 날카로운 칼로 말의 복부 한가운데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빠르게 그었다. 날랜 솜씨였다. 질긴 말가죽이 날 선 칼날에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둥그렇게 원을 그린 채 서서 이 작업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드디어 내장이 드러나고 비릿한 냄새와 함께 달빛이 어른거리며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팔만이 삼춘은 간을 따로 떼어 잘게 썰고는 먹기 좋게 흰 사기 접시에 놓았다. 사람들은 가지고 간 소주 됫병과 뭉툭한 고뿌잔, 그리고 막소금을 가져오느라 분주했다. 마을 사람들은 고뿌잔에 술을 따라 차례로 권하며 피가 철철 흐르는 생간을 맨손으로 집어서 막소금에 턱턱 찍어 먹었다.
하늘엔 보름달이 점점 솟아올라 이 장면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안주가 싱싱해서 맛있다고 낄낄거리는 사람들의 입가에는 붉은 피가 잔뜩 묻었다. 아버지는 추렴한 앞다리 두 개를 내가 맨 구덕에 싣더니 먼저 집으로 가라는 손짓을 했다. 멀지는 않았지만 창백하게 변해버린 달빛을 밟으며 집으로 가는 밤길은 어린 나에게 쉽지 않았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큰 가마솥에 물을 가득 넣고 펄펄 끓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