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엄리 이야기
아버지는 웬만하면 좋은 이야기만 편지에 실어 보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가끔 있었다. 어느 날 일본에서 편지가 왔다. ‘보아라 양훈아! 오늘은 아비가 술 한잔하고 이 글을 쓴다’며 꽤 긴 내용을 써서 보내주셨다. 오사카에 살던 둘째 이모네가 기어이 북송선 만경봉호를 타고 오늘 북으로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어려서 이웃 마을 중엄리에 부모와 떨어져 살다가 일본에서 재회한 아키코(秋子)와 유키코(雪子) 두 누나는 오사카에 남겨두고 아픈 아들만 데리고 떠났다는 것이다. 아들의 병세가 위중해서 이모는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어했다. 결국은 ‘무상의료’라 선전하는 북한에 한가닥 희망을 품고 이모 내외는 아들만 데리고 북송선을 탔다. 아버지가 술 한 잔을 해야 했던 건 이별이 슬프기도 했지만, ‘무상의료’라는 것이 뭔가 미심쩍어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둘째 이모부는 고향이 구엄리 이웃 마을인 중엄리였다. 아버지는 가려면 고향 제주도로 가야지 낯설고 물선 북조선이 웬 말이냐며 말렸다. 그러나 병든 아들을 어찌해야 하느냐는 이모의 말에 아버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모네는 북에만 가면 공짜로 아들 병을 고쳐준다는 이야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한두 해가 지나면서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오사카에 남은 아키코와 유키코 두 누나가 생필품을 상자에 담아 북한에 간 이모에게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지상낙원이라는데 별것을 다 싸서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또 몇 해가 지나 이런저런 사연도 모른 채 안부를 묻는 연락마저 끊기고 말았다. 지금은 연고도 없는 북한 땅에서 이모부네 세 식구는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신세가 돼버렸다.
1970년대 말 조총련 추석성묘단의 일행으로 아키코 누나가 서울로 입국했다. 방문단 일정에 맞추어 을지로 입구에 있는 코리아나호텔에서 누나를 만났다. 중엄리에 살면서 구엄마을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던 누나였지만 서로 얼굴을 기억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오래된 일 하나로 실마리를 풀어 보려고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누나 내가 꼬맹일 때 나한테 술 먹인 거 기억나?”
“.....”
“우리 집 제삿날이었잖아!”
“.....”
“집이 뱅뱅 돌고 내가 막 토하고….”
“그랬냐? 호호 난 기억이 없어!”
누나는 우리 집 뒤편에 있던 감나무가 생각난다고 했다. 마당에서 줄넘기와 땅따먹기도 했고, 송악 열매를 따서 대나무 통에 넣고 입으로 불며 총 놀이도 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난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이 없었다. 어긋난 기억은 서로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아키코와 유키코 두 누나는 어릴 적 무척 장난꾸러기였다. 이모부였던 아버지는 부모와 멀리 떨어져 사는 두 이종 누나를 가엾게 여겨 귀여워 해주었다. 북한으로 떠난 식구들에 대해선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일본에 계신 아버지는 고생은 하지만 너희들에게 희망을 걸고 열심히 산다며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렇게 면회 아닌 면회를 끝내고 호텔 방을 나섰다. 내 손에는 아키코 누나의 선물과 아버지가 보낸 기념품이 들려 있었다.
하숙방에 돌아와 아버지가 보낸 물건을 꺼냈더니 길쭉하게 네모난 나무토막(香木)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根性’이란 두 글자였다. 일본 말로는 곤조(こんじょう)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으리라. ‘곤조’란 말은 우리나라에선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지만, ‘근성’은 다르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살아가라는 뜻을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 나무토막은 오랫동안 내 책상 앞에 소중한 신주처럼 걸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행방을 모르겠다. 아버지의 향목(香木)이 사라지더니 나의 근성도 시들해졌다. 소중한 그것을 잃어버리다니, 아버지에게 면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