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항(密航)④

구엄리 이야기

by 김양훈

어디에서건 불법(不法)이란 낱말은 사람을 긴장시킨다. 이유가 무엇이건 사연이 어찌하든 간에 일본으로 밀항(密航)을 시도해 성공한 사람들은 바로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일본당국의 허가 없이 일본 땅에 건너와 사는 죄다. 법이란 건 사방에 줄을 치고 사람을 엮어 죄인을 만드는 거미줄과 같다. 상식에 기초한다고 하지만 법은 반드시 그런 것 같지 않다. 먹고 살기 위한 월경(越境)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이렇게 되면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나 드넓은 바닷속을 마음껏 헤엄치는 고기떼가 부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재일교포 2세 故 최양일 감독의 영화 '피와 뼈' 첫 장면. 1923년 제주인들이 일본 오사카를 보고 환호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유튜브 채널 '영화돌 -좋은영화 맛집' 제공

자식들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일념이었지만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는 불법체류자로 숨어 살아야 했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도 범법자이긴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 불법체류자가 잡히면 오무라수용소(大村収容所)로 수용되어 조사를 받고 추방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밀항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일본 정부는 이들을 관리하고 수용하기 위해 1950년 10월 나가사키현(長崎縣) 하리오(針尾)에 수용소를 설치했고, 이어 그해 12월 오무라에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1993년 오무라 수용소의 명칭이 오무라 입국관리센터로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오무라수용소에서 강제로 귀국선에 태워진 밀항자들이 부산으로 들어오면 그들을 기다리는 곳이 있었다. 괴정수용소(槐亭収容所)라 불리는 곳이다. 해방 후에 미처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사람들을 수용할 목적으로 세운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외국인수용소가 과정 천변 신촌 남쪽에 있었다. 이 수용소에 있었던 일본사람들이 하나둘 본국으로 돌아가고 한동안 텅 비어 있었다. 얼마 후 이승만이 그어 놓은 동해의 평화선을 넘어와 우리 영해에서 물고기를 마구 잡던 일본 어부들을 잡아다가 수용하는 시설이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정보기관들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밀항자들을 한곳에 모아 심문하는 수용소로 바뀌었다.


수용소 생활은 두 곳 모두 이래저래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무라수용소에서는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으로 혹독한 대우를 받고, 괴정수용소에선 용공 혐의자로 조사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밀항자들은 괴정수용소를 더 무섭게 생각했다. 그 당시 한국 정보당국은 일본에서 조총련의 지시를 받고 한국으로 입국하는 이른바 용공분자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체포실적을 쌓아 승진을 하기 위한 좋은 먹잇감이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수사요원을 밀항시킨 후에 일부러 잡히게 해서 뿌락치로 오무라수용소 안에 침투시키기도 하였다. 오무라수용소에서 다른 밀항자들과 같이 섞여 지내면서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괴정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수사자료로 활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잡히지 않으려는 밀항자와 잡으려는 일본 경찰 사이에 숨바꼭질이 벌어지곤 하였다. 일본 경찰은 날을 정해 정기적으로 일제 불법체류자 단속을 했다. 그러는 한편 밀고가 들어오면 해당 공장이나 작업장에 불시에 들이닥쳐 이 잡듯이 뒤졌다. 일본 경찰은 오랜 단속 경험을 바탕으로 잔꾀를 많이 썼다. 그들은 한국 식당 주변에 서성이다가 가게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검문했다. 일본 경찰은 ‘안녕하세요’ 하며 말을 걸거나, '철수야' 같은 한국인 이름을 불러서 뒤돌아보거나 반응을 보이면 일단 검문을 해서 영주권이나 여권을 확인하였다. 일본 경찰로서야 기막힌 수법이라 하겠지만 당하는 사람들에겐 참 야비한 방법이었다.

1977년 봄 - 오사카성(大阪城)에서

아버지는 일본 생활을 하면서 조총련이냐 민단소속이냐를 따지지 않고 사람들을 두루 만나며 지냈다. 그런 생각은 아버지뿐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재일교포들이 두 재일단체 중 하나를 골라 선택하는 이유는 반드시 그가 가진 사상과 이념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는 조총련이 학교와 금융기관 그리고 병원까지 운영하면서 재일교포 사회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잡고 있던 시절이었다. 또한, 일본의 좌파 진보진영은 물론 양심세력도 조총련에 좀 더 우호적이었다. 몇십 년 동안 일본생활을 하게 되면 조총련계 친인척이나 지인(知人)들과 어떤 식이든 관계를 맺고 엮일 수밖에 없었다.


괴정수용소 심문과정에서는 그런 사정은 아예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잘못 걸리면 골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불법체류자들은 부산에 도착해 괴정수용소에서 심문받는 걸 매우 두려워했다. 자신도 모르는 죄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1956년 일본 오무라수용소 내부 모습. 수감실 문에는 일본어 손글씨로 '죽음이냐! 삶이냐!(死か! 生か!)'가 적혀 있다.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제공

“너! 오무라에서 나간다니까 그렇게 좋아?”

“예, 일본이 좋습니다. 일본에 살고 싶어요.”

“오무라에서 있었던 일, (떠들지 않는 거) 알고 있지?”

(1960년대 일본 나가사키현 오무라 입국관리소 직원과 체류가 허가된 조선인 밀항자 간 대화)

“(김일성 사진을) 안 봤다고 해도 매 맞고, 봤다고 해도 매 맞고, 이거는 맞는 거야. 이거 말해도 되나? 괴정 수용소는 죽음의 장소야.”

(1970년대 일본에서 추방된 강제 송환자들을 수용한 부산 괴정 수용소에 대한 증언)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식민지 제국이 붕괴된 ‘전후 일본’, 그리고 혼돈과 폭력이 횡행했던 ‘해방한국’, 그 양극단의 국경선에 균열을 낸 20세기 조선 밀항자들은 냉전과 국민 국가로 이행하던 두 주권 권력 모두로부터 폭력과 배제를 경험했다. 오무라수용소는 1970년대까지 조선인 밀항자를 억류하며, ‘일본의 아우슈비츠’로 불린 악명 높은 곳이다. 이곳에서 한국으로 강제 송환된 밀항자들은 괴정수용소에 머물며 혹독한 취조를 당했다.


공식 기록 없이 단편적 문헌과 구술로만 존재했던 20세기 조선인들의 탈국경 역사를 복원한 책 <주권의 야만-밀항, 수용소, 재일조선인>(한울)이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기획으로 2017년 2월 1일 출간됐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795097


기쁨과 섭섭함이 交錯 槐亭洞의 日人 收容所 訪問 -1956년 3월 27일 <부산일보>

“外國行 같은 歸國 그만 韓國에 살고싶다” 다무라 쓰나에孃


부산시내 괴정동 소재 외국인 수용소에서 보호를 받고 있던 일본인 일반 귀국자 97명(주로 부녀자)에 대한 송환조처가 취하여졌다 함은 작보한바 있거니외 25일 하오 늦게 기자는 비내리는 하단가도를 달려 이들을 방문하였다 괴정동 입구에 들어설라치면 시내 중심지에서 소개당한 판잣집촌을 거쳐 규모있게 세워진 수동의 「바락크」식 건물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바루 일본인 귀국자 일행 97명이 그들의 본국에 돌아가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는 외국인 수용소인 것이다

고국에 돌아가게 되어 얼마나 기쁘냐는 인사말에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기쁨보다도 낯익고 정든 곳이라서 섭섭한 마음이 앞선다고 말하면서 그동안 폐를 끼쳐 미안하다고 기자를 대하여 준다 공통적으로 어딘지 향수에 젖은듯한 그들속에서 토막토막 주어본 표정들은 대략 아래와 같다


▲망졸망한 보퉁이를 꾸리면서도 그 누구에게 두고가는 잊지 못할 미련이라도 있는지? 어쩌면 안갈는지도 모른다는 32세의 「아끼야마·에이꼬」 그는 서울 을지로에서 살았으며 11년전 동경에서 한국인 남편을 따라 왔다가 딸아이까지 낳았으나 이제 그애를 다리고 서울을 떠나 온지는 20여일이 된다고 한다

▲광주시에서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고등 간호학교를 나왔다는 「다무라·쓰나에」(24)는 6세때에 한국인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다가 4년전 결혼하였으나 남편에게는 한국여자의 본처가 나타나게 되어 신혼생활 5개월만에 본처를 위하여 단념하였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운명에 돌릴뿐 그 누구를 원망하여 본 일은 없다고 유창한 우리말로 명랑한 얼굴읍 짓는다


그는 일본이 법률적인 고국이기는 하나 사실상 외국과 같다고 하며 가족들과 함께 부득이 현해탄을 건느기로는 되었으되 한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당신의 마음에 맞는 다른 남자가 나타난다면? 하는 기자의 질문에

-이젠 그럴 겨를이 있어야죠… 하고 있다. 이제 결정적으로 돌아갈날이 박두한 그들에게는 연애할 시간조차 없이 분망한 가슴이 설레이고 있는 것이다


10년전 또는 수십년전 현해탄을 건너 이곳을 왔을때에는 그래도 그들을 몹씨 아껴줄 남편과 같이 산다는 기쁨이 있었는데 버림을 받았거나 또는 남편을 잃은 지금 그리우면서도 낯서른 고국땅을 찾게 되는 그들의 심정은 파도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개는 태연해 보이고 모두가 웃으면서 석별을 하듯이 기자를 대하여 준다


◇두살나는 젓먹이로부터 50세를 넘는 노파까지 있는 그들은 벽도 없이 툭 터놓은 수용소안에서 그야말로 동포라기보다 한가족처럼 따뜻하게 지내온 것 같은데


밖에 나오면 우리말을 어린이들에게는 본국에서 구해온 국민학교 교과서로 그들의 교육을 시키고 있어 오래 이땅에 있으면서도 「한글」을 해득하는 아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전란이라고는 하되 교육은 커녕 어린이들을 「돛대기판」으로나 내돌리고 있는 이땅 일부 사람들과 하나의 대차가 될 것이다

◇남편이 죽은뒤 위지할 곳이 없어 돌아간다는 당년 42세의 「요시다·테루」(밀양읍) 여사는 수용소에 온지 2년이 되었다고 하며 경북 의성에서 빵장사를 하면서 살았다는 52세의 「무라까미·후꾸」 여사는 고향에 의제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모두가 수용소에서 한국정부의 따뜻한 보호를 받은데 대하여 무어라고 감사해야 옳을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이런 말에는 아마도 거짓이 없는 것 같았다. 대개 국제결혼이 비져낸 비극의 주인공격인 이들은 이리하여 금명간 결정될 배편이 오면 유행가의 한토막에 있는 「울며 헤진 부산항」을 이루면서 그 옛날 건너왔던 현해탄을 그때와는 다른 심경으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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