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모독

프랭크 화이트포드 著 「에곤 실레」 p126-129

by 김양훈
성행위가 생의 불멸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때로 이러한 불멸의 암시는 종교적인 신성모독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후원자들처럼 실레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하겐분트 전시회에 걸린 실레의 작품에 대한 비평 중에 <노이 프레이 신문>의 기자인 A. F. 젤리크만의 글이 그러한 경우이다. 젤리크만은 실레에게 가장 혹독한 비평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의 평문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젤리크만은 실레의 작품을 마치 뒤틀린 거울에 비친 것처럼 “불쾌하고 비현실적이며 핏빛을 한, 거미처럼 앙상한 손가락과 절단되고 썩은 육신”이라 평했다. 심지어 “천 년이나 된 무덤에서 부활한 것 같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실레의 “세련되고 자유로운 드로잉 솜씨와 탁월한 색채감각, 힘찬 붓질의 즐거움”이 이 괴기스러운 장면에도 의심할 여지 없이 표현되었다는 점은 기꺼이 인정하였다.


젤리크만의 또 다른 적대적인 비평은 「노이 비너 타게블라트 Neues Wiener Tageblatt」에 실렸다. “우리는 실레에 대해서 거듭 논의할 기회를 얻었다. 처음에 그는 다소 놀랄 만한 솜씨를 지닌, 클림트의 가장 별 볼 일 없는 모방자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 화가의 천재적인 재능이 이상하고 난해한 취향으로 타락할 위험에 처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 실레는 가장 젊은 세대의 정력과 열정으로 거들먹거리는 엘리트들이 빠지기 쉬운 매우 자극적인 것들을 흉내 내고 있다. 그는 이번 전시회에 <자화상> 한 점을 출품하였다. 자신의 젊은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트려서까지 표현하려던 부패의 느낌은 너무 지나치다.“

검은색도기가 있는 자화상i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자화상은 <검은색 도기가 있는 자화상>이다. 젤리크만의 비평은 당시 실레에 대한 일반의 평가를 표명한 것에 불과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실레가 젊고 재능이 풍부하며 펜과 연필을 다루는 솜씨에서는 빈에서 견줄 화가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상상력은 지나치게 불경하다고 여겼고, 미술이란 것이 실레가 하는 것처럼 그렇게 혼란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는 화가가 성숙하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고, 괴기하고 삐딱한 시선도 화가가 안정을 되찾게 되면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2이다 뢰슬러.jpg 이다 뢰슬러
가을나무

<이다 뢰슬러>와 같은 매력적인 초상화나 이파리 하나 달리지 않은 마른 <가을 나무> 이외에 1912년에 그려진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들은 상징주의적인 인물화이다. 이러한 작품에는 거대한 힘이 넘쳐나며 강렬한 색채가 표현주의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규모가 큰, 실레의 대부분의 상징주의 그림처럼 이 작품들 역시 성욕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취하고 있다. 매우 극적인 주제와 강렬한 형식을 갖춘 이러한 상징주의화는 때때로 종교적인 이미지와 결합한다. 성행위가 생의 불멸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때로 이러한 불멸의 암시는 종교적인 신성모독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추기경과 수녀

<추기경과 수녀(포옹)>는 클림트의 <입맞춤(1907-1908)>을 빌려 수도원에서의 성관계라는 충격적인 주제를 도입하였다. 이 작품은 실레가 이제 추상적인 형태의 함축성과, 추상적인 형태가 어떻게 과거의 전통적인 구성의 재현적인 면을 한층 격상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튼튼한 손발을 지닌 인물들은 서로 꼭 끼어, 겹쳐진 삼각형에 갇혀 있다. 그들은 끝없는 심연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인물들이 의복이, 사제와 수녀를 지칭하는 종교적인 상징성보다는 화면에서 형태와 색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랭크 화이트포드 著 「에곤 실레」 p12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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