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다 디 스테파노 著 「Gustav Klimt」 p33-34
실패한 프로젝트-클림트를 둘러싼 스캔들은 당시 예술가와 정부가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가 되었다. 그리고 클림트의 명성도 위대한 화가에서 전문학교 선생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사회의 편견을 무시하고 예술작품의 수집에 열광하던, 부유하고 교양있는 유대인 부르주아들로 가득한 빈 사회에서, 클림트는 여전히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술가로의 공명심과 신조를 포기하고 대중이 요구하는 의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중략).
클림트는 여전히 세 개의 화판, 곧 <철학>, <의학>, <법학>에 집착하고 있었다.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스캔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 작품들의 세밀화 작업을 하면서 그의 스타일이 완벽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처음 두 작품 <철학>, <의학>과 마지막 작품 <법학>에서 형식의 비동질성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1907년에도 클림트는 세부적인 수정 작업을 통해 장식적인 요소를 추가하면서 여전히 작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1945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는 사진 자료와 <의학> 밑그림 한 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극렬한 논란이 벌어졌던 것일까? 비크호프의 추측에 의하면, 반대파들은 클림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에로틱한 힘 뒤에서 뭔가를 떠올리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거부감을 감추기 위해 외설적인 그림이라고 비판했다는 것이다. 정부와 대학에서 기대했던 “무지의 묘지에 비치는 희망의 빛”이라는 주제는 아르투루 쇼펜하우어와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에 새겨진 공허한 염세주의 속에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비틀리고, 상징주의 문화로 또 한 번 여과된다. 클림트는 과학의 단호한 힘을 찬양하기보다는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함을 표현하기로 했다.
그는 <철학>에서 인간은 철학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깨달을 수 없음을, <의학>에서 의학의 발전도 죽음에 맞설 수는 없음을 암시했다. 그리고 <법학>에서는 권리는 법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즉 인간은 권력의 횡포나 퓨리¹⁾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으며 복수와 죄의 여신들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주장했다. -에바다 디 스테파노 著 「Gustav Klimt」 p33-34
註1) 퓨리-복수의 세 여신 알렉토, 티시로네, 메가이라를 일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