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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Oct 09. 2023

구엄리 이야기 셋

오랜 옛적부터 여름이 오면 

엄쟁이 돌빌레왓엔

휘이 휘이이

빈 바다 메아리치는 숨비소리에

꽃들이 피었다, 숨비기꽃.


구엄리는 제주시에서 40리 서쪽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 말엽부터 삼밭알(森田下) 내깍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온다. 여기서 내깍은 답단이내(川)의 바닷가 종착점을 말한다. 노꼬메 오름 북쪽 발치에서 솟은 샘물이 물길을 만들며 바다를 향해 흐르기 시작한 답단이내는 웃드리 마을인 유수암과 장전리를 거쳐 물메오름 아래를 지나 구엄리 내깍에 이르러서, 마침내 바닷물과 섞이며 아름다운 여행을 마친다. 삼엄(三嚴)이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구엄리·중엄리·신엄리 해변에 큰 냇물이 흘러내리는 곳은 이 삼밭알 내깍이 유일하다. 내깍 바닷가는 천년을 궁글은 현무암 몽돌과 검은 모래가 어우러진 알작지 해변인데, 삼밭알은 삼전사(森田寺) 절 아래 해변이라는 뜻이다. 수평선 먼 바다를 향해 맞서기라도 하는 듯 거대한 용암 절벽이 장엄하게 뻗어있는 구엄리 바닷가에서 맨발을 편히 담글 수 있는 곳은 여기 삼밭알과 신다리내 뿐이다. 살 곳을 찾아 헤매던 탐라국의 어느 유랑자가 이곳에 이르러 사방을 들러보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는 누구였을까?


답단이내 민물이 합류하는 내깍 아래에는 게스리들이 유난히 크고 많았다. 아이들은 자갈을 엎고 모래를 뒤져 이들을 늬껍으로 갯바위 낚시를 했다. 보들레기, 고생이, 어랭이, 졸락, 객주리, 덤불치, 복젱이, 좃벨레기, 술맹이, 메역치, 볼래기들은 동네 아이들이 참대낚시로 건져 올리던 녀석들이다. 이들을 서울말로 다시 불러보면 그물베도라치, 숫컷 용치놀레기, 놀레기, 노래미, 쥐치, 별망둑, 복어, 말뚝망둥이, 암컷 용치놀레기, 쏠총개, 볼락이다. 이 가운데 어머니가 자주 입에 올리던 녀석이 있다. “눈 큰 볼락은 지져나 먹지만 사람 멍청한 건 쓰잘데기없더라!” 툭 튀어 난 눈두덩에 유난히 눈알이 큰 볼락을 냄비 바닥에 늘어놓고 간장에 뽀글뽀글 끓일 때마다 어머니가 말했다. 


아직 낚싯대를 못 잡는 동네 코흘리개들은 작대기에 줄을 매고 밥게나 거드레기 미끼로 보들레기를 잡아 올려 구워 먹었다. 파도를 타기 시작한 대여섯 살 넘은 아이들은 첨벙첨벙 개헤엄을 쳐 여(礖) 위로 올라가 고생이 대낚시를 했다.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해초 숲에는 헤엄치는 고기 떼들이 훤히 보였다. 낚시라지만, 이 모든 것은 아이들의 놀이였다. 큰여, 갈라진여, 공여, 두리둥여... 여(礖)들은 물 밖으로 돌머리를 내밀기도 하지만, 어떤 여들은 썰물에만 삐쭉 머리를 내밀었다. 화산이 터지고 용암이 내를 이루어 쏟아져 내리다 바닷가에 이르러 머물지 않고 바닷물 아래까지 흘러들어 생겨 난 바위가 여다. 암초와는 태생이 달라 여라고 부른다. 용암의 줄기는 해변에서부터 바다로 멀리는 2㎞까지 흘러간 곳도 있다.  


저녁밥을 마치고 몰방에 모여드는 여름밤, 어른들 사이에서 마을 설촌 유래를 두고 설왕설래 하다 말다툼으로까지 가는 일이 왕왕 벌어졌다. 그때마다 소리를 높이며 승리하는 쪽은 송 씨 일족이었다. 그들이 내세우는 비장의 무기는 송씨할망당이었다. “동네 할망당이 왜 송씨할망당이겠어?” 


할망당 이야기만 나오면 다른 일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어느 씨족 사람이 “아니 그럼 송 씨 가문은 할망이 씨를 뿌리느냐?”며 대들어도 송 씨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이웃 마을 당 이름이 거의 송씨할망당이란 걸 살펴보면 마을 첫 입주자가 송씨할망이란 주장은 말짱 헛소리였다. 소길리, 봉성리, 곽지리, 상귀리, 하가리뿐만 아니라 구엄리와 인접한 중엄리와 신엄리 본향당도 모두 송씨할망당이다. 


구엄리의 본향 모감빌레 송씨할망당이 모시는 신은 '송씨부인 일뤠한집'이라고 하는데, ‘일뤠’는 마을의 안녕과 기복을 비는 당굿을 정월 초이렛날 올린다는 뜻이다. 모감빌레는 구엄리 남서쪽 외곽에 있는 ‘모감’ 동네로 가는 길목에 있는 너럭바위를 이른다. 송씨할망당에는 수백 년 자란 팽나무 두 그루가 할망당 울담을 덮고 있다. 그리고 주변엔 보리밥나무 굵은 가지가 문어발처럼 할망당을 감싸고 있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당 안에는 나뭇가지에 걸린 울긋불긋한 오색물색과 지전이 바람에 흔들렸고, 무병장수를 비는 실타래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한겨울 보리밭을 밟으며 연을 날리던 동네 악동들은 모자란 연실을 송씨할망당에서 훔쳤다. 쭈빗거리며 할망당에 들어간 아이들은 아무 데나 대고 머리를 꾸벅 조아리곤 실타래를 집어 들어 냅다 도망쳐 나왔다. 그 모양을 뒤에서 지켜보며 삼신할망이 웃고 있는 줄 아이들은 알 리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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