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양훈 Oct 10. 2023

구엄리 이야기 셋


1. 첫 기억 풍경

     

저마다에는 어린 날 기억 속에 떠오르는 첫 풍경이 있다. 내 기억의 그 풍경은 소금꽃이 하얗게 핀 할머니의 돌염전이다. 염전이 끝나는 신다리내 서편에는 생이동산이라 부르는 너럭바위가 허리 잘린 밑동처럼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서있다. 그곳에 오르면 수평선을 미끄러져 가는 큰 배들이 더 또렷하게 보인다고 아이들은 생각했다.


제주4·3항쟁의 광풍이 사그라져 가던 봄날의 빈 바닷가를 달리는 악동들은 세상의 비극을 알 리 없었다. 해마다 맞는 보릿고개로 굶주려 맹꽁이배가 된 아이들은 그런 몰골로 마을 안길과 바닷가를 고추를 제대로 가리지도 않은 채 반 벌거숭이로 몰려다녔다.


4월의 봄 바다는 안개 끼는 날이 태반이었다. 자욱한 안개비 사이사이 가랑비도 뿌렸다. 봄비를 맞은 고사리가 기지개를 켰다. 섬사람들은 이때를 고사리 장마라 부르며 망태를 허리춤에 달고 고사리 꺾기에 나섰다. 할머니는 이 봄장마에 따로 할 일이 있었다. 햇빛이 조금이라도 비칠라치면 할머니는 신다리내 소금밭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할머니는 겨울 동안 몰아친 파도에 무너진 소금밭 두렁을 다시 쌓기 위해 원뱅디 찰흙을 지어 날랐다. 할머니는 찰흙을 주물러 손바닥 높이로 두렁막음을 하고 논배미처럼 호겡이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호겡이 안으로 바닷물을 부어가며 돌빌레 바닥을 쓸고 닦았다.


염전으로 가는 소롯길 옆 신다리내 수문 위에는 무너져 내린 환해장성의 돌무더기가 가시덤불에 덥혀 황량했다. 그 폐허 위를 오르내리며 병정놀이 하는 아이들은 잔해 더미가 무엇인지 몰랐다.


보리가 익어가는 5월부터 할머니는 소금빌레 호겡이에 곤물을 지쳤다. 할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신다리내 바닷가로 내려가 양동이로 바닷물을 길어와 호겡이에 쏟아 붓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입은 깡총한 갈중이 적삼 사이로 늘어진 젖무덤이 흔들거렸다. 할머니 물벼락에 깜짝 놀라 혼비백산한 깅이와 밥게 떼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나는 깔깔대며 그것들을 쫓아 소금밭을 이리저리 내달렸다.


하지가 지나면서 호겡이에 뜨거운 햇볕이 가득 쏟아지고, 바닷바람이 하루하루 바닷물을 말렸다. 검은 너럭바위 위 호겡이 곤물에는 소금기가 하얗게 맺히기 시작했다. 보리이삭을 수확할 때쯤이면 짓궂은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보리장마다. 소금밭 건사하느라 할머니는 비구름이 몰려올 때마다 호겡이 곤물을 물혹에 담느라 분주했다. 이즈음 할머니는 보리 추수에다 좀녀질에 소금밭까지 거념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한여름 뜨거운 햇볕에 곤물이 더 잦아져 소금알갱이가 보이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호겡이 바닥을 글겡이로 긁으며 소금을 가운데로 모았다. 봉긋하게 모아진 소금알갱이들이 수정처럼 햇볕에 반짝거렸다.

소금밭 놀이에 싫증이 나면, 나는 생이동산에 올랐다. 곰새기 떼가 하얀 물살을 가르며 철무지개 포구 너머 쇠머리 상코지를 향해 헤엄을 쳤다. 해가 수평선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왕돌로 쌓은 포구에서 주낙배들이 하나둘 바다로 나아갔다. 저녁 해가 서쪽 남또리 기정 멀리 수평선 위를 온통 붉게 물들일 쯤, 할머니가 꼬리 긴 여운으로 나를 불렀다.

“나 몽생아”

소리를 알아챈 내가 고사리 손을 흔들면 할머니는 구덕을 등에 지고 귀가 채비를 하였다.

“밥 먹게 혼저 집에 글라”

할머니 목소리가 파도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올림머리에 흰 수건을 둘러 묶었고, 통통한 얼굴과 또렷한 이목구비에 입술이 도톰했다. 눈 밑에 애교살도 있었던가? 처녀 시절엔 동네 총각들 가슴을 설레게 했을 터다. 할머니는 말수가 적었다. 내가 학교에 갈만큼 자랐을 때 어머니가 기억에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종손자라 그런가, 너와는 말벗을 잘 하시더라.”


할머니는 당신이 즐겨 드시는 삶은 통무를 나에게 자주 먹였다. 사내 녀석이 입매 짧다고 어머니에게 타박을 받는 내가 할머니가 삶은 무는 손사래 없이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그게 뭐가 맛이 있느냐는 듯 입 꼬리를 삐죽거렸다. 할머니의 장손 사랑이 얼마나 갸륵한지 내가 누런 콧물이라도 흘릴라 치면, “아이고 이쁜 내 새끼” 하며 후루룩 빨아서 땅바닥에 뱉어내곤 했다. 내가 기겁을 해 도망치려 해도 할머니가 워낙 빨랐다. 할머니의 코 닦이 풍경은 망각 속에 숨어 있다가도 어느 때면 불쑥 떠올라 나를 미소를 짓게 한다.  


돌염전은 할머니가 시집오면서 가져온 지참금이었다. 몇 평 안 되는 한 작은 염전이었지만, 큰딸이었던 할머니가 상속으로 물려받았다. 제주섬에서는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발인 전날 일포(日哺)에 큰딸이 상객 접대에 필요한 음식을 내놓았다. 고인과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일포제인지라 딸들도 곡을 하고 제사에도 참여했다. 일포에는 늦은 밤까지 조문객들이 붐빈다. 가까운 친족과 상제 친구들은 밤샘하며 상가를 지켰다. 큰딸이 밤샘 상객들을 위해 밤참을 내어놓았다. 귀한 곤밥을 지어내고, 돗괴기와 바릇괴기를 마련하려면 망자의 큰딸은 적지 않은 돈을 써야 했다. 돌염전을 큰딸에게 상속하는 이유였다.


소금바치 하르방

마을 사람들은 놀림 반 부러움 반으로 할아버지를 소금바치 한량이라 불렀다. 소금 팔러 다니다 광령마을 과부와 정분이 나서 갓난이 딸을 데려온 할아버지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광령댁 그분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매년 가을이면 꿀 장사를 핑계로 마을을 한 바퀴 돌고는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 다 커서야 꿀 장수 할망의 정체를 알았던 우리 형제는 그분이 꿀단지를 짊어지고 이문간을 들어서기라도 하면 마당으로 뛰어나가 맞았다. 그저 맛보게 될 달달한 꿀맛 때문이었다. 먹고사는 게 급했는지, 아니면 의붓살이가 싫었을까? 해방 전 고모는 눈 맞은 성내 총각과 함께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그럼에도 청장시 할망은 갓난 새끼를 빼앗긴 어미새처럼 제 딸이 자랐던 마을 주변을 기웃거렸다. 이따금 일본에서 전해오는 딸 소식도 궁금했을 터다.


할아버지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웃드리 사람들이 장 담고 김장 하는 늦가을 제철을 골라 소금을 팔러 다녔다. 웃드리 중산간 사람들이 소금을 사러 구엄리에 내려오기도 하였지만, 할아버지가 쇠질메에 싣고 간 소금으로 간장과 된장을 담그고 김장도 했다.


할아버지는 웃드리 마을을 두 방향으로 돌아다녔다. 한 번은 마을 동남쪽으로 길을 잡아 물메봉 아래인 당동네와 번대동, 그리고 예원동 마을을 지나 장전리를 거쳐 거문덕이와 유수암 마을까지 돌았다. 그리고 마을로 돌아와 며칠을 쉬고 다시 남서쪽으로 올랐다. 송냉이 마을 용흥리를 지나 하가리와 상가리를 거쳐 납읍과 소길리까지 오르는 것이다.


6·25 전쟁이 끝나고 육지 뻘소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후 할머니 돌염전은 소금 대신 밥게와 깅이만 득실대는 돌빌레가 되었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구엄리 이야기 셋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