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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Oct 13. 2023

구엄리 이야기 셋

3. 둘째 이야기-몽근놈과 심방 김씨


이 몽근놈아

이 욕지거리는 삼다도 섬나라에선 욕 중의 욕이다. 섬나라에 와서 '몽근놈의 새끼' 소리를 듣는다면 반도의 욕 '후레자식'을 떠올리면 된다. 어릴 적엔 몽근놈이란 몽당연필처럼 세파에 닳고 닳은 막장 인간에게 하는 욕으로 알았다. 나이가 들어 나중에야 욕받이 주인공이 '몽골놈'이란 걸 알았다. 변방의 과거사라 우리는 잊고 살지만, 탐라에는 100년간의 몽골 지배역사가 있다. '몽근놈' 욕은 섬사람들에게 고통과 모욕을 준 몽골 지배자 목호(牧胡)들에 대한 섬나라 민중의 소심한 저항이었다. 


몽골과의 화친에 반대하여 강화도에서 항쟁을 시작한 삼별초 사령관 배중손은 진도로 후퇴하여 용장성을 축성하고 본거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 의해 1271년 고려 원종 12년에 진도의 용장성이 함락되고 배중손 사령관은 전사했다. 이에 삼별초 지휘를 이어받은 김통정 장군의 지휘 아래 탐라국 제주섬으로 근거지를 이동했다. 김통정 장군은 애월읍 고성리에 항파두리성 본진을 설치하고 망명정부의 수도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2년 후 군선 160척에 나누어 탄 만 명이 넘는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덕포구와 항파두리성과 붉은오름으로 이어지는 최후의 결전에서 삼별초는 전멸했다. 패배한 김통정 장군은 한라산 중턱의 붉은오름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삼별초 군과 여몽연합군 병사가 뒤엉켜 싸우며 흘린 피로 온 산이 붉게 물들었다고 해서 붉은오름이다. 


어릴 적 항파두리로 소풍 가서 장수물을 떠 마시며 김통정 장군의 전설을 듣곤 했다. 장수물은 김통정 장군이 여몽 연합군에 쫓겨 항파두리 토성에서 뛰어내린 바위에서 샘이 솟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발자국 모양으로 생긴 돌 틈에서는 사철 샘물이 솟는다. 이처럼 삼별초가 최후의 항전을 벌인 항파두리성과 붉은오름에는 고려 무인의 한이 서려 있다. 


이후 몽골은 남송과 일본 정벌의 병참 중심지로 전초 기지화하기 위해 섬나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몽골 직속령으로 탐라 제주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몽골의 100년 탐라 지배가 시작되었다. 섬나라 민중은 몽골군에 갖가지 공물을 바치고, 목마장을 설치하기 위한 부역과 함선 건조를 위한 군역에 강제 동원되었다. 이에 더해 두 번에 걸친 몽골의 일본 정벌로 탐라 민중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다. ‘몽근놈’과 함께 고려의 '육지것'들을 함께 미워하게 되었으니, 이는 그 시절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욕지거리가 아니었을까!     


심방 김씨

이웃마을 하귀리에 있던 하귀중학원은 3·1절 시위 이후 사회주의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집중 감시를 받았다. 4·3사태가 터지면서 하귀중학원의 많은 교사와 학생들은 빨갱이로 몰려 학살됐고 학교는 문을 닫아야 했다. 이 학교 출신인 아버지도 경찰서에 잡혀갔는데 친척 어른의 도움으로 육지로 도망갈 수 있었다. 전라도 이리 등지에서 쌀장수로 연명하며 몇 년을 살았다. 난리가 조용해진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자진 입대를 했다. 사상세탁이었다. 제대 후 면서기를 얼마간 하다 집어치운 아버지는 영농서적을 구해 읽으며 환금작물이라던 양파, 양배추 따위를 심었다. 그러나 판로가 막혀 수확도 해보지 못하고 밭에 썩히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생활용품이나 농사 용구를 공동구입 해 파는 구판장을 열었다. 마을 최초의 가게다운 가게였다. 


아버지는 구판장에 앰프를 설치하고 마을 높은 지대 서너 곳을 골라 장대에 확성기를 매달았다. 마을 소식을 알리고, 때맞춰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도 쾅쾅 틀었다. ”느 아방은 농사나 장사 보단 이런 게 재밋나 보네.“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나에게 투덜거렸다.  


나는 이때쯤 국민학교에 갓 들어간 나이였다. 잔심부름을 하며 구판장 일을 돕기도 하고, 아버지가 마실이라도 가면 시간에 맞추어 전축에 레코드판을 걸고 뽕짝가요를 내보냈는데,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이나 동백아가씨가 자주 울려 퍼졌다. 이따금 잔술을 원하는 술꾼이 찾아오면 고뿌잔에 큰 됫병을 기울여 술을 따라주기도 했다. 


심방 김씨는 잔술 단골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큰심방으로 인기가 많았고 수입도 짭짤했다. 그러나 그 인기는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개신교도들을 중심으로 미신 타파 운동이 벌어지기 전 호시절 이야기였다. 그는 얼굴도 희멀겋게 잘생긴 데다 허우대가 훤칠했다. 굿거리 춤 장단에 맞춰 연물소리 가득한 그의 굿마당에는 동네 예펜들이 가득 차곤 했다. 


그는 알동네 한적한 변두리 동카름에 살았는데, 사계절 흰 무명천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장작처럼 마른 꺽다리 김씨가 걷는 모습은 흡사 두루미 걸음새였다. 그는 저녁 숙취를 털어내려는 듯 거의 매일 해장술 시간에 맞춤하여 구판장 미닫이 유리문을 열었다. 그는 잔술을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고는 잔을 다시 기울여 한 방울도 놓칠세라 쪽쪽 소리가 나게 소주잔을 빨았다. 차마 헤어지기 싫은 연인의 입술을 떼어내듯 잔술을 마감하고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툭툭 막소금을 찍어 입술을 적셨다. ‘얼마나 술이 달면 저렇지?’ 그가 돌아간 뒤 나는 한 모금 술을 붓고 마셔봤다. 온 면상을 찡그릴 만큼 쓴맛일 뿐이었다. 어린 마음에 참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은 잔술을 들이켜고 나서 손가락에 묻은 소금을 털어내며 그가 말했다. 


”네 할머니 돌소금 맛은 진짜였지!“

”어떤 맛인데요?“

”달았지! 돌코름 했달까“

”이 소금 맛은 어떤데요?“ 

”뻘 냄새지, 짜기만 하고 맛이 없어!“ 


그리고는 잠시 후 말을 보탰다.

”네 할머니는 서우젯소리도 잘하셨구만! 허허“

할머니가 호겡이에 소금물을 지치다 힘이 들면 흥얼대던 노래가 서우제소리란 걸 그때 알았다


신방 김씨는 손바닥을 한 번 딱 치더니, 오른손을 번쩍 머리 위로 곧추 세우고 왼손은 옆구리 아래로 비틀었다. ”으흠“ 하고 목을 추스르고는 율동에 따라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양 어양 어양 어양 어양허기로 놀고나 가자 

아 아양 어양 어허요


우리 어멍 날 낳을 적에 영화를 볼랴구 날 낳았건만은

아 아양 어양 어허요 


영화는 영화는 간 곳이 없고 전싱 팔자가 기막도 허영

아 아양 어양 어허요 


한루산으로 노리는 물은 하간 낭섶도 다 썩은 물이여

아 아양 어양 어허요 


산지야 축항으로 노리는 물은 일천 뱃닻줄 다 썩은 물이로다

아 아양 어양 어허요 


남 난 날에 나도 낳고 남 난 시에 나도 나시면

아 아양 어양 어허요 


남이야 운들 나 무사 울며 남이야 운들 내 무사 울리

아 아양 어양 어허요 


전싱 궂은 구월에 나난 구월 국화가 내 벗이로다

아 아양 어양 어허요 


한라 영산 놀던 산신 

아 아양 어양 어허요 


테역 장군 물장오리에 놀던 산신

아 아양 어양 어허요


아흔아홉골 골머리에서 놀던 산신

아 아양 어양 어허요 


오백 장군 한라 영신

아 아양 어양 어허요


일흔여덟 서천국에 놀던 산신

아 아양 어양 어허요 


신엄장 구엄장 가시낭밭에서 놀던 산신

아 아양 어양 어허요


무엇에 북받쳤는지 김씨는 노래를 다 마치지 못했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도둑년묻은테역

날이 갈수록 궁핍해진 그는 외상을 달기 시작했고, 동네 사람에게 잔술을 얻어먹고는 곤드레만드레 취해 아내의 손에 이끌려 귀가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가 술에 절어 지내는 동안, 잔병치레가 많던 그의 아내가 먼저 세상을 하직했다. 심방 김씨는 동카름 초가에서 물메봉이 가까이 보이는 잔디밭 동산에 아내를 묻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심방 김씨의 잔술은 죽음을 부르는 독약이었다. 정신이 잃을 정도가 돼야 술잔을 거두었다. 그는 아내가 떠난 그해 겨울 모징개 몰털어진기정 아래로 몸을 던졌다. 시신은 거친 겨울 파도에 먼 곳으로 떠밀려갔는지 봄이 지나도 갯가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사람들은 심방 김씨 아내의 묘지 주변을 ‘도둑년묻은테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도둑년을 묻은 잔디밭이란 뜻이다. 어찌하여 그런 지명으로 부르게 되었는지는 사람들은 몰랐다. 


그러나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하나 전해져 오기는 했다. 심방 김씨는 어려서부터 마음속으로 좋아했던 첫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심방이란 처지인지라 속만 태우다 말았다. 시간이 흐른 후에 남의 아내가 된 그 처녀가 시름시름 않다 다 죽게 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는데, 어느 날 그녀의 시어머니로부터 축원굿 주문이 들어왔다. 백약이 무효라 마지막으로 굿이라도 하는 거라고 했다. 


축원굿이 끝난 뒷날, 어떤 연유인지 여자는 심방 김씨 집으로 옮겨졌고, 몇 달 안에 죽으리라던 여자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그 후 여자는 심방 김씨를 따라다니며 굿을 배워 소미가 되었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사연에 온갖 말이 돌았다. 작은 마을이라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더해지고 부풀려졌다.


심방 김씨가 취중에 했다는 이런 말을 했다. 

”굿을 하는 중에 말이야 여자가 시아버지에 들렸는데, 시가 식구들은 며느리 목소리와 손짓 발짓이 마치 시아버지가 환생한 것처럼 똑같아서 혼비백산했지 뭐야. 이제껏 사라진 집안의 돈 꾸러미뿐 아니라 귀중품을 하나하나 들먹이면서 이 며느리가 훔쳐서 팔아먹은 것이라고 큰소리로 야단을 쳤어. 당장 이 여자를 쫓아내되 동카름에 있는 홀로 사는 남자에게 줘버리라고 했지. 그러지 않으면 집안에 큰 우환이 끊이지 않으리라고 소릴 질렀지 뭐야.“


여자는 도둑년 소리를 들었어도 가타부타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았다. 노름꾼 아들이 도둑놈이란 걸 모를 리 없는 시어머니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거 뭣이냐, 심방 김씨가 첫사랑 가질려구 못되게 수작한 거 아녀?“ 

누가 이렇게 시작하면, 사람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날이 새믄 뭐가 없어져서 시어미가 그렇게 며느릴 닦달했대.“

”도둑놈이 누구겠어! 시에미가 모를까?“

”아들 들으라고 며느리만 볶아댔겠지 안 그래?“

”침이 마르게 며느리 착하다고 할 적은 언제고!“


자식 없이 심방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굿거리 연물소리도 함께 마을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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