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문상길③
제주여 말하라!
문상길은 안동시 임동면 마령리 양지마 이식골에서 태어났다. 이식골은 임동면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낙동강 지류 대곡천(大谷川)의 동쪽 평지에 있다. 대곡천을 사이에 두고 동향한 마을은 양지마, 서향한 마을은 음지마라고 불렀는데 양지마을 음지마을이란 뜻이렸다. 마령리는 조선 중종 때 뿌리를 내린 남평문씨 집성촌이었다. 바로 양지마 이식골에 남평문씨 종택인 기와까치구멍집이 있었다. 그러나 종손(宗孫)은 1910년 일제강점기 후 독립운동의 성지 만주로 떠나고 지손(支孫)이 종택을 이어받아 살았다. 문상길 어린이는 종손의 후손인지 지손의 후예인지는 더 알아봐야 한다. 어쨋거나 그는 1920대 어느 날 남평문씨의 종택인 기와까치구멍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끝내는 목숨줄을 끊어버린 박진경의 친일 가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성장한 것만은 확실하다. 문 중위와 그의 부하들이 가졌던 박진경 연대장에 대한 또 하나의 암살 동기가 여기에 있었다.
평화협정을 실행하려다 온갖 방해공작으로 실패한 김익렬 연대장과 교체돼 새로 부임한 박진경은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에서 ‘대정익찬회’ 간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진경은 연대장 취임식에서 자기 부친은 일제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중요 간부였다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대정익찬회는 1940년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 당시 신체제 운동의 추진을 목표로 하여 결성된 전체주의적 국민 통합 조직이다. 처음에는 기성 정당과 군인뿐 아니라 광범위한 국민 통합을 목표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군부에 이용되어 전쟁터로 국민을 동원하는 핵심 기구 역할을 하였다. 부친이 친일파 정치집단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굳이 강조한 것은 자기는 공산주의자와는 적대관계라는 걸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와 연장 선상에서 그는 독립을 방해하는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주장하였다. 친일의 아들이 독립을 외치다니! 제주 양민의 생명 따위는 안중에 없고, 군정장관 딘 장군의 지시에 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초토화작전을 감행하겠다는 의지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에 다름아니었다.
문상길 중위는 연대장인 박진경 대령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친일부역에서 미군정의 충견으로 갈아탄 민족반역자로 보였을 것이다. 태어난 뿌리가 달라서였을까!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동년배 두 사람은 제주의 하늘 아래서 부딪혔고, 마침내 피를 뿌렸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 뒤에 더 큰 비극의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濟州여 말하라!
民族의 悲劇은 왜 招來했나
-動亂의 濟州島를 찾아서
[濟州島에서 本社 特派員 金相化 發 第1信]
4월 3일 한밤중의 총소리는 주위 500여 리 4읍 2군 12면의 전 제주도를 공포와 전율 속에 몰아넣고 무수한 동포의 피비린내는 한층 더 살기를 돋구어 사태는 날이 가고 달이 갈쑤록 동족상잔의 참극은 치열의 도를 가하여 3천만 민족의 가슴을 몹시 아프게 하고 있다. 경향 각지의 관계 당국 및 신문기자단 사회단체에서는 이 사태에 대한 비판을 여러 각도로 민족 앞에 해부하고 있거니와 재광기자단에서 사태의 중요성에 감하여 지난달 29일 일행은...
... 나타나는 성봉 한나산 중복에는 흰구름이 멈추어 있어 문자 그대로의 평화경이다. 이 평화경을 깨뜨린 자 누구냐? 무엇 때문에 총탄을 주고받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던가? 기자단 1행은 그날 오후 6시경 약 2개월 동안을 은은한 총성 속에서 자고깨인 북제주의 관문 산지항(山地港)에 도착하였다. 일행 앞에 나타난 제주도는 쓸쓸하기 짝이 없고 항내(港內)에는 수 척의 경비선을 비롯하여 대소(大小) 어선이 정박하였을 뿐 4시절을 가리지 않고 해녀(海女)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있...
*호남신문은 1946년부터 1962년까지 호남지역에서 발행된 지방일간지다. 대한민국 신문 중 최초로 가로쓰기를 도입했다. 경영난으로 1962년 전남일보와 통폐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