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렬(金益烈)은 1921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났다.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복무하다 해방 후 귀환하였다.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소위에 임관했다. 그는 제주4.3항쟁이 일어나자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회담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여러 고비를 넘긴 끝에 평화협상이 체결되어 상호 간 전투를 72시간 이내에 중단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조병옥 경무부장 등이 자신들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 강경 일변도의 진압정책을 고집하며 평화협상은 깨져버렸다.
김익렬 연대장은 1948년 5월 5일 제주중학교 미 군정청 회의실에서 열린 비밀수뇌부회의에서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조병옥 경무부장과 충돌하며 난투극을 벌였다. 그는 강경진압책인 중산간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끝까지 반대하다 1948년 5월 6일 9연대장에서 해임되었다.
김익렬은 6·25전쟁을 치르며 살아남아 1969년 1월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자신이 제9연대장 시절 경험한 제주4.3사건 초기 상황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세상을 뜨기 전 그는 가족들에게 ‘이 원고가 가필되지 않은 채 그대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을 때 공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제민일보가 유족들을 설득해 이 유고를 신문에 연재하였다. 당시 제주도 상황에 대해 일부 주관적인 판단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유고는 제주4.3항쟁 초기의 긴박했던 상황과 학살 참극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의 글을 여기에 연재하는 이유이다.
연재에 앞서, 그의 유고 실록 마지막 단원을 소개한다.
1948년 5월 5일, 4·3무장봉기 진압을 위한 최고수뇌 비밀회의 참석차 제주에 온 미군정 수뇌부들. 좌측에서 두번째 군정장관 딘 소장,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조병옥 경무부장, 맨 오른쪽이 김익렬 연대장. ⓒ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4·3’에 대한 나의 소견
나는 제주도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경찰감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 씨나 미군정청장관 딘 장군 중에 한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단순한 사건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 사건처리에 임하여 군정장관 딘 장군 이하 미국인들은 언어불통으로 정보를 오판해 결과적으로 우둔하기 짝이 없는 실책을 저질렀고, 자신들의 과실을 잘 알고 있던 경무부장 조병옥 씨 이하 경찰은 사건해결 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까봐 진상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하였다. 거기에다 공명심에 눈이 어두운 박진경 대령까지 끼어들어 사건을 원인으로부터 살펴 풀어가려고 생각지 않고 각자가 사건처리와는 거리가 먼 자기의 목적달성에만 전념하다가 대폭동화한 것이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전부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폭동진압 책임자들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이민족이나 식민지 국민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토벌살상에만 주력을 한 것이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이나 군·경 책임자들이 수만 명의 선량한 양민을 공산주의자와 구별없이 살해하고 자신의 보신과 공명만을 꾀한 것은 민족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후세 국민들은 이 기록을 보고 소수의 악인들이 저지른 죄가 수만 명 국민의 불행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을 삼기 바란다.
제주도 4·3사건에 관하여 사심없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역사에 기록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나는 이 글을 썼다. 이 사건에 관련되었던 자들 중에 사건의 내막을 소상히 알 수 있었던 자는 거의 전부가 제주도민에 대하여 크건 작건 범죄적 과실을 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죄상을 정직하게 역사에 기록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쓰여진 4·3사건 기록을 훑어보면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당시 천하가 알다시피 민족적으로나 제주도민에 대하여 무죄하다. 오히려 도민들을 구출하려다 갖은 박해를 당한 사람이다. 또 사건을 정직하게 기록함으로써 이득이나 손해볼 것도 없다. 역사는 정직하게 사실 그대로를 전달해야만 후세에 참고가 되는 법이다. 허위조작된 것은 역사의 가치가 없다. 나는 이러한 정신에서 이 기록을 남긴다. 그런데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나의 무식의 소산이거나 교양부족에서 생긴 편견일 것이다.
특히 조병옥 씨 일파의 죄상에 대하여 나의 규탄 질책이 지나치다고 꾸지람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고인이 된 이들의 죄상을 규탄하여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은 나의 자존심과 교양에 비추어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민족적 정의와 양심으로 도무지 용납될 수 없고 묵과할 수 없는 죄상들만 기록한 것이며 그들이 저지른 잘못은 내가 기록한 사실의 몇 배가 될 것이다.
나의 소감을 정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조병옥 씨나 박진경 대령과 같은 군인은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고인의 죄상을 덮어두는 것이 인간적 예의라고 생각하나 침묵을 지키기에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나의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