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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4 3문학회

가시리 동백꽃

-오대혁|4·3문학회 문집|창작 詩|

by 김양훈

가시리 동백꽃

오대혁


가시리 형님

동백 보며 그러시대

보리밥 조밥 섞어 도시락 싸던 시절¹

혼식을 장려해 곤밥²은 안 되던 계절

스물댓 명 반 아이들이

그날따라 곤밥

하얀 이밥에 옥돔 두어 조각

맛나게들 싸 왔는데

나라에서 혼식 허라는디

느네는 귓고냥³이 맥혀시냐

손바닥 엉덩짝 불을 댕기고

눈물 콧물 섞어

곤밥을 꾸역꾸역 삼켰노란다

간밤에 음복⁴하고 남은 젯밥 들고 온 건데

담임 선생님은 아무것도 몰랐다

뒤돌아보지 말고 걸어가라는 엄포에

표선 바다 하얀 모래톱에 설은 발자국

동네 형아, 웃드르⁵ 삼촌, 아랫말 당숙

산 사람이 된 가족들 뒤로 하고

푸른 용궁으로 떠나간 가시리⁶ 사람들

제삿날 젯메⁷를 싸고 온 건데

매타작에도 찍소리도 못하며

동백꽃 떨군 곤밥을 먹던 날

가시리 형님 동백 보며

그날을 그리시데

김미경의 '제주동백'

오대혁|4·3문학회 문집|창작 詩

*오대혁은 국문학 박사·시인·문화비평가이며, 제주일보 논설위원과 피앤피뉴스 논설주간을 맡고 있다. 2005년에 「신문예」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원효실화의 미학』, 『금오신화와 한국소설의 기원』, 『시의 끈을 풀다』(공저) 등이 있다.

[옮긴이 註]

1) 혼분식 장려운동은 1950년대부터 쌀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밀가루와 보리 소비를 촉진하는 사회운동으로 시작되어 국가 주도로 절미와 식생활 개선을 목표로 1976년 말까지 시행된 국민동원운동이다.

2) 곤밥(☜고은밥) : 곤밥은 '흰밥'을 말하는 쌀밥을 뜻한다. 제주도는 빗물이 지하 깊숙이 숨어들어 버리는 화산섬이라 벼농사가 어렵다. 그래서 주식용으로 밭농사인 보리나 조를 재배하였다. 이런 지리적 영향으로 쌀이 귀해서 '곤밥'은 관혼상제, 즉 제사 지내는 식갯날이나 명절, 잔칫날과 장례날에만 먹을 수 있었다. 또 쌀밥을 '곤밥'이라 불렀던 것은, 보리밥이나 조밥을 주로 보다가 쌀밥을 보았을 때 하얀 빛깔이 고와서 '곤밥'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3) 귓고냥 : ‘귓구멍’의 제주어


4) ‘음복(飮福)’이란 ‘복을 마시고 먹는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미 제사를 지낸 술인 복주와 신명이 흠향한 제물을 다시 마시고 먹는 행위를 복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제사에 음복례(飮福禮)가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보은(報恩)을 목적으로 하는 제사에 국한된다. 여제(勵祭)나 포제(酺祭) 같은 기양(祈禳)의 의미를 지닌 '액막이' 의례의 경우에는 작헌이나 진찬의 절차가 포함되어 있더라도 음복례를 생략하기 마련이다. 여제와 포제 등은 그 대상이 재해(災害)를 내리는 귀신이므로, 그 같은 귀신이 흠향한 술과 음식은 보은을 목적으로 하는 제사의 제물과는 다른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위키실록사전>


5) 웃드르(=웃뜨리) : ① 한라산 쪽에 있는 위치한 들. ② 해안가에서 산 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 또는 거기에 형성된 마을. ③(중)산간 마을. (∎중산간 : 한라산 중턱의 대략 표고 200~600m 사이에 있는 숲이나 들판 지대. 지하수 함양지대이면서 과거에는 주로 목축 지대였다. 여기저기 마을이 있었으나, 제주4·3 당시 소개령 등으로 많이 사라졌다. ⇰ 웃뜨르)


6) 표선면 가시리 학살-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이 무장대의 근거지라는 전제 아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격을 가했다. 1948년 11월 15일 새벽, 진압군은 표선면 가시리에 들어서자마자 닥치는 대로 총격을 가했다. 이날 희생된 30여 명의 성별과 나이는 당시의 처참함을 대변해 준다. 젊은이들이 급히 피신한 가운데 집에 남았던 노인과 어린이들이 희생된 것이다. 6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노인만 살펴봐도, 김수계(여) 김인하(여) 김정숙(여) 김호직 안만규 오경생(여) 오윤부(여) 오희백(여) 정재병 정종언 등이 희생됐다. 이날 안흥규는 급히 몸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군인들이 물러간 후 집으로 돌아온 안씨는 온 가족이 몰살된 처참한 상황을 목격해야 했다. 고신춘(여, 42) 강매춘(여, 37) 안재원(20) 안영순(여, 19) 안재순(여, 15), 그리고 호적에 이름도 안 올린 어린이 안일진 안옥희 안옥순 등 안씨의 가족 8명은 안씨의 누이 안규반(40대)과 그녀의 자식들인 강재호(12) 강순이(여, 7) 성명불상(4) 등과 함께 인근 숲에 숨었다가 12명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었다. 60대 노부부인 안만규 김인하는 손녀(3살)와 손자(1살)를 데리고 급히 냇가로 피신했다. 굴을 찾아 몸을 숨겼지만, 아기 울음소리가 새나가고 말았다. 진압군은 굴속으로 수류탄을 던졌고 이들 가족은 운명을 같이했다.


그런데 명령에 복종하는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일부 군인들은 무차별 총살극을 거부하기도 했다. 고태옥(高泰玉)은 “그날 새벽 총소리가 나자 급히 냇가로 피했지만, 아내는 아기와 함께 집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우리집에 온 군인은 집에 불을 지르면서도 ‘다른 군인들이 오면 죽일지 모르니 어서 숨어라’면서 그냥 가 버렸다. 좋은 군인을 만난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말했다.


한편 노약자들까지 무참히 희생되는 상황에 이르자 주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민들은 산으로 오르지도 못하고 해변으로 내려가지도 못한 채 그냥 마을에 머물며 공포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일주일쯤 지났을 때인 11월 22일경 “해변마을 표선리로 소개하라”는 말이 전해졌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연고를 찾아 표선리나 토산리로 소개했지만, 일부 주민들은 겁에 질려 선뜻 내려가지 못했다. 하산 기회를 놓친 주민들은 들녘을 방황하다 진압군의 수색전에 걸려 총살당했다.


한편 소개령에 따라 표선리로 소개한 주민들은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됐다. 그런데 수용생활을 한 지 한 달쯤 되던 12월 22일 진압군은 수용자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킨 후 일일이 호적과 대조하며 가족 전부가 소개 온 집안과 그렇지 않은 집안을 나눴다. 군인들은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소위 ‘도피자 가족’이라는 구실을 붙여 속칭 ‘버들못’ 윗쪽 약 200m 지점에 있는 밭으로 끌고 가 76명을 한꺼번에 집단총살했다. 자식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60대 이상 노인들이 주로 희생됐다. 이날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오국만(吳國晩)은 자신도 겨우 목숨을 구했던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표선국민학교에서 수용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군인들이 많이 와서 “모두 운동장에 모이라”고 했습니다. 음력으로 동짓달 22일의 일입니다. 군인들은 주민들이 모이자 “호적상 전 가족이 있는 가족은 한쪽 옆으로 나가서 서라!”고 하여 나누니 그렇지 않은 가족들이 운동장 가운데에 서게 됐습니다. 우린 형이 행방불명된 상태라 소위 도피자 가족으로 운동장 가운데 서게 된 겁니다. 군인들은 또 “젖먹이 아기엄마와 15살 미만은 나오라!”고 했습니다. 난 당시 16살인데 아버지는 사태를 예감했는지 당초 수용소에 들어갈 적에 제 나이를 14살로 낮춰 장부에 기록했습니다. 그 덕에 전 구사일생했습니다. 그날 76명이 지금의 변전소 옆 밭에서 집단 총살당했습니다. 당시엔 시신에 흙만 덮어뒀다가 1년 후 마을이 재건될 때에 시신을 묻었습니다. 중부님은 아버지의 한복 두루마기 안의 담뱃대로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한편 진압군은 총살극을 벌이면서 모인 사람들에게 박수를 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당시 토산리로 소개했던 오태경은 “토산리 창고 부근에서 총살이 있었는데 사람들을 모아놓고 구경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총살할 때 박수를 치라고 했다. 총살 때 아기가 폴폴 기어서 위로 올라오니까 아기에게도 총을 쏘았다”고 증언했다.


자수자 살상

진압군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과거 조금이라도 잘못한 사람은 자수하라. 자수하면

살려주지만 나중에 발각되면 총살을 면하지 못한다. 이미 ‘관련자 명단’을 가지고 있

다”고 협박했다. 자수를 요구했다는 사실은 ‘관련자 명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겁에 질린 많은 주민들이 자수했다. 이들은 주로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

원회나 인민위원회에서의 활동, 1947년 경찰관의 3·1절 발포사건에 항의해 시위나

파업을 한 사실, 무장대가 마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을 때 이들의 요구에 따라

시위에 참여하거나 식량 등을 준 사실 등을 자수했다. 그러나 진압군은 약속과 달리

자수자들을 집단 총살했다. <제주4·3사건 진상 보고서> (398~400쪽)


7) 젯메 : 제사 때 올리는 밥.

4·3문학회는, 문학을 통해 제주4·3의 진실을 찾아가는 서울 지역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2017년 4월 재경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 회원들이 주축이 된 『화산도』 읽기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2021년부터는 4·3관련 자료와 작품 전반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으로 확장하고. 이름을 ‘4·3문학회’로 바꿨다. 월 1회 정기모임을 8년째 이어 가고 있다. 현재 회원은 30여 명이고 회장은 양경인, 좌장은 김정주가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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