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산문집『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中
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이
당신의 그 웃음 뒤에서 함께하는데
철이 없는 욕심에 그 많은 미련에
당신이 있는 건 아닌지, 아니겠지요
시간은 멀어짐으로 향해 가는데
약속했던 그대만은 올 줄 모르고
애써 웃음 지으며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도 낯설고 멀기만 한지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 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 줘
이 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부인할 수 없는 삶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햇빛을 역광으로 받은 나무, 그 잎사귀들. 8번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늘 보았던 창덕궁 돌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빛. 그것이 강이건 바다건, 작은 실개천이건. (그래서 한영애의 ‘여울목’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가는 남자가 있다. 헝클어진 내면의 독백들, 욕설들, 절망과 분노 속에 그는 죽어간다. 그때 슬픈 얼굴의 천사가 다가가 그의 머리를 감싼다. 이유를 모르는 채 그의 독백은 바뀐다. 처음 자전거를 배우던 날. 처음 사랑을 느끼던 날. 빛나던 어느 오후의 행복. 알베르 카뮈…… 그의 눈동자가 차츰 흐려진다. 만약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 햇빛을 역광으로 받은 나무, 창덕궁 돌담, 반짝이는 물결……을 중얼거렸을까.
죽기 전의 1, 2초 동안 한 사람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짧은 순간에 정말 그것이 가능하다면, 아마도 한 시절이 섬광 같은 하나의 이미지로 축약되는 것일 게다. 그보다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처럼 순서 없이 찬란한 기억들만 떠올릴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꼭 죽기 직전이 아니어도 누구나 가끔은 유년에서부터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더듬어 내려오다 대학시절에 이르면, 짧은 섬광처럼 내 눈을 가리는 한순간의 이미지가 있다. 학교 앞 굴다리 위로 밤기차가 지나가고, 그 아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던 남학생들, 셋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목이 터져라 이 노래를 불렀다.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얼마나 마셨는지 다들 노래처럼 몹시도 비틀거렸다. 걸어가며, 웃으며, 소리치며 그들은 그 바람 찬 늦가을 밤을 통과하고 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 왜 그렇게 강렬한 인상으로 새겨졌던 걸까. 그걸 보는 내 마음은 필경 고민도 많고 쓸쓸했을 텐데, 이리도 벅찬 느낌만 생생하게 남았을까. 부인할 수 없이 아름다운 한순간의 모습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걸까.
이 노래를 부른 김현식을 생각하면 가객이라는 말이 정말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다들 어느 만큼은 나그네겠지만, 그는 정말 여행하듯 이 세상에 와서 노래만 하고 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김광석도 그렇다. 두 사람 모두 일찍 세상을 등져서인지.)
그가 죽은 뒤 제작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한 동료 가수의 증언을 들은 기억이 난다.
“같이 바닷가에 놀러 갔는데, 새벽의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요. 씻지도 않고, 온통 상처투성이 맨발로, 소리 지르며 뛰어가던 모습이.”
그 후 나에게 김현식의 이미지는 상처투성이 맨발의 사내가 되었다. 견딜 수 없는 열정이 불길처럼 내부를 태운 사람, 태우고 태운 것이 노래가 된 사람.
<겨울 바다>라는 노래를 참 좋아했는데, 그 기찻길 아래의 합창을 잊을 수 없어 이 곡을 골랐다. 어느 책에선가 ‘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이……’ 하고 시작되는 부분이 오음계로 이루어져 있어 더 우리 심금을 울리는 거라는 대목을 읽었는데,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처절하고 아름답고, 뜨겁고도 서정적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 한 시절의 뇌관을 건드리는 이 노래.
한강 산문집『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내 사랑 내 곁에) 全文.
작사·작곡 오태호
유년시절 부터 록 음악을 좋아했던 오태호(b. 1968)는 서울고등학교 시절 기티리스트를 꿈꾸며 서울고와 상문고 연합 밴드로 유명했던 '리자드'의 멤버로 활약했다. 1980년대 후반, 당시 무명이던 오태호가 신촌블루스 무대 밖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흥얼 거리고 있을 때였다. 이를 지켜보던 김현식이 그 노래 누가 만들었냐고 물었다. 오태호가 본인이 작사 작곡한 노래라고 대답하자 김현식은 이 노래를 달라고 했다. 이에 오태호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 후 이 곡이 5집 앨범에 수록되어 있지 않자 실망하며 '얘기라도 해 주시지' 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6집에 실린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듣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자기가 상상한 것과는 다른 멋진 노래가 나와 놀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