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이야기

한강 산문집『가만가만 부르는 노래』中

by 김양훈

눈물도 얼어붙네

너의 뺨에 살얼음이


내 손으로 녹여서 따스하게 해줄게

내 손으로 녹여서 강물 되게 해줄게


눈물도 얼어붙는

12월의 사랑노래


가족과 함께 내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80년 1월이었다(26이라는 날짜도 기억한다). 서울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넓고 춥다’는 것이었다. 유리창의 성애. 얼어붙은 길. 딱딱 소리치며 이가 부딪히는 추위. 그것들은 아마 나에게 서울의 인상이자 삶의 인상이 되었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겨울만 되면 필요 없는 새 스웨터를 사고 싶어지는 건, 추위에 대한 두려움이자 따뜻함에 대한 갈망 탓인지도 모르겠다.


겨울은 나에게 그렇듯 따뜻함과 차가움이 격렬하고도 애절하게 충돌하는 계절이다. 언 몸을 녹이는 아랫목, 외투 안에 품고 가는 풀빵 봉지의 온기, 무심코 스친 손끝의 따스함, 거리 거리의 차가운 보도블록, 회색의 하늘, 죽은 듯 얼어붙은 가로수들.


92년 겨울에 ‘서울의 겨울’이라는 제목으로 시 열여섯 편을 쓴 건 그런 충돌 속에서였다. 이를테면 연작시였는데, 대학을 졸업한 뒤 그 시들로 처음 등단을 하게 되었다. 어떤 시들은 차갑고 어떤 시들은 몸부림치는데, 그중 열두 번째 시는 이런 거였다.


서울의 겨울 12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¹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지난해 겨울, 연극 <12월 이야기>의 공연 프로그램에 12월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인디언 달력의 12월² 이야기부터 시작하다가 문득 이렇게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눈물도 얼어붙는 달,

내 따뜻한 손으로

네 뺨의 살얼음을 녹여주고 싶은 달.


지하철의 환승구간을 걸어가다 문득 그 이야기에 동요 같은 멜로디가 붙어 흥얼거려졌다. 극을 쓰고 연출한 최창근 씨에게 원고를 건네며 농담 반으로 “로고송도 만들었어요”라고 하자 그는 기뻐하면서 녹음하자고 했다. 반주도 없이 녹음한 이 노래를,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관객들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그 후 2절과 3절 가사를 이렇게 붙여 보았다.


서늘한 눈꽃송이

내 이마에 내려앉네


얼마나 더 먼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얼마나 더 먼 길을 헤매어야 하는지


서늘한 손길처럼

내 이마에 눈꽃송이


모든 것이 사라져도

흘러가고 흩어져도


내 가슴에 남은 건 따스했던 기억들

내 가슴에 남은 건 따스했던 순간들


모든 것이 흩어져도

가슴 속에 남은 노래


내 노래 중에서 가장 단순한 노래, 가장 따뜻한 노래가 아닐까 싶다. 금방 따라 부를 수 있어 친구들이 좋아했던 노래다. 나에겐 이를테면, 겨울날 외투 속에 품고 가는 풀빵 봉지 같은 노래다. 가슴에 풀빵을 품고 가면, 같이 먹을 사람들은 따뜻하게 먹을 수 있고, 가는 동안 내 추위도 달래지고…… 그런 마음.


12월 이야기

작사 작곡, 한강

sung by 한강과 이지상


[옮긴이 註]

1) 먹장 입술 : 먹빛같이 시꺼먼 입술.

2) 인디언들은 달력을 만들 때 그들 주위에 있는 풍경의 변화나 마음의 움직임을 주제로 그달의 이름을 정했다. 이 명칭을 보면 인디언 부족들이 자연의 변화와 함께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들에 대해 얼마나 친밀하게 반응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아래 이름처럼 자연 세계를 바라봄과 동시에 내면을 응시하는 시선을 잃지 않았다.


-인디언 달력의 12월 명칭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달 (수우족)

·다른 세상의 달 (체로키 족)

·침묵하는 달 (크리크 족)

·무소유의 달 (퐁카 족)

·큰 곰의 달 (위네바고 족)

·늑대가 달리는 달 (샤이엔 족)

·존경하는 달 (호피 족)

·첫눈이 내리는 달 (동부 체로키 족)

·큰 겨울의 달 (아파치 족, 무스코키 족)

·나무의 껍질이 갈라지는 달 (수우 족)

·칠면조 잔치를 벌이는 달 (포타와토미 족)

·온종일 얼어붙는 추운 달 (벨리 마이두 족)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새로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