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dade e maldad

한강 산문집『가만가만 부르는 노래』中

by 김양훈
Bondade e maldade 善과 惡
sung by Cesária Évora


Bondade e maldade,
tudo existe em nós
선과 악은 우리 안에 모두 존재해요.

어떤 슬픔이나 고통은, 곧이곧대로 말하려 하다가는 말하는 사람의 몸뚱이를 으스러뜨려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가슴에 눌러두면 시름시름 앓게 될 테니, 방법은 하나다. 리듬에 맞춰 노래하는 것. 세자리아 에보라¹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 이렇게 인생을 넘어가는구나. 이토록 깊은 슬픔과 리듬 사이의 서늘한 낙차 속에서, 그저 흔들리며 넘어가는구나.


케이프 베르데의 민델로 항구에서 태어난 세자리아 에보라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를 아홉 살 때 잃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 속에 선술집들에서 노래하며 성장했다고 한다.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 끊기지 않는 가난, 후에 프랑스에서 음반을 내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근원을 달래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무대에서 맨발로 노래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발 벗은 마음의 자유를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뻐근해진다.


가사를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모든 것이 전달되는 이 노래. 리듬 속에 몸이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리는 동안, 우리의 삶이라는 게 워낙에 흔들리는 것임을, 그러니 너무 슬퍼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음을 어느 틈에 서늘히 알게 되는 노래.

대학에 다닐 때 잠깐 풍물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북을 둘러메고 지쳐서 간신히 행군을 따라가고 있는 나에게 선배가 다가와 말했던 기억이 난다.


힘들면 무릎을 더 꺾어서 흥을 내봐. 춤을 춘다고 생각해. 가락을 타봐. 그러면 오히려 안 힘들어.

그 말대로 해보자 정말 힘이 들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유난히 지치고 마음 둘 데 없을 때 이 노래를 듣게 되는 것도 아마 비슷한 까닭일 게다. 막막하던 마음으로 흥겨운 기타 소리, 타악기의 소리, 코러스들의 목소리, 깊고도 낮은 그녀의 목소리가 스며들어오면, 잠들어 있던 생명이 서서히 요동치며 꿈틀거린다. 살 거야. 살아야지. 살고 싶어. 춤추고 싶어. 더 무릎을 꺾어야지. 더 리듬을 타야지. 더 부딪혀야지. 더 껴안아야지. 더 담대하게 무너져야지.


-한강 산문집『가만가만 부르는 노래』中 Bondade e maldade


[옮긴이 註]

1) 세자리아 에보라(Cesária Évora, 1941~2011)는 아프리카의 섬나라 카보베르데(Cape Verde)의 가수다.

Cesária Évora
세상 각 나라에는 '노래의 여왕'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엘레지(哀歌)의 여왕 '이미자'가 있고, 러시아에는 로망스의 여왕이라는 '엘레나 깜부로바'가 있다. 미국에는 재즈의 여왕인 '엘라 피츠제랄드'가 있고, 브라질에는 보사노바의 여왕인 '아스트루드 질베르토'가 있다. 아프리카 '까보베르데'에는 '모르나'란 장르가 있다. 이 '모르나'의 여왕이 바로 ‘세자리아 에보라(Cesária Évora)’다.

세자리아 에보라는 1941년 ‘까보베르데(Cape Verde)’에서 태어났다. 까보베르데는 서아프리카 세네갈에서 600~850km 떨어져 있는 약 15개 섬으로 이루어진 섬나라다. 까보베르데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으나, 1462년 포르투갈에서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16세기경 노예무역으로 많은 아프리카인이 노예로 끌려왔다. 이들이 까보베르데에서 사는 흑인의 조상이다. 현재는 이 흑인들과 포르투갈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들이 주민의 대다수다.

500년 동안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있다가 1975년 독립했다. 500년이란 세월 동안 피지배계급으로 있었으니 까보베르데인의 고난과 수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 비애를 노래로 불렀다. 아프리카 리듬에 유럽 로망스가 섞여 애수에 젖은 달콤한 슬픔의 장르가 탄생했다. 그 곡이 ‘모르나(Morna)’다. ‘모르나’란 말의 기원이 영어의 'mourn(슬퍼하다)'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포르투갈어 ‘morno(따뜻한)’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

에보라가 일곱 살 때 파트타임 뮤지션이었던 아버지가 사망했다. 어머니는 여섯 자녀를 다 키울 수 없어 에보라를 고아원에 맡겼다. 다른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녀는 16세부터 선원들을 위한 술집에서 노래했다.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3번의 결혼 실패와 술집 가수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가수 활동을 접는다. 1985년 까보베르데 가수 Bana의 초청으로 포르투갈에서 공연하면서 한 프랑스 PD가 그녀를 발탁한다. 이후 그녀는 800만 장 이상 음반을 판 가수에다, 전 세계에 모르나 뿐만 아니라 카보베르데란 그녀의 나라까지 알리는 유명 가수가 되었다.

(…)

어려서 신발 살 돈이 없어서 맨발로 지냈다는 에보라, 그녀는 평생 무대에서도 맨발로 노래했다. 그래서 '맨발의 디바'라고도 불린다. 까보베르데에서 그녀는 영웅이다. 그녀의 사진이 들어간 지폐도 있다. 민델로 공항에는 그녀 동상도 있다.

2002년 한국에도 내한한 적이 있는 그녀는 이제 우리 곁에 없다. 2011년 70세 나이로 사망했다. 아무리 괴로워도 맨발로 산책하듯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그녀의 음악은 늘 우리 곁에 있다. (…)

-출처 : 양미경 편집장의 글 '세자리아에보라(CesáriaÉvora)’의 'Sodade' <한겨레:온>에서 발췌.
세자리아 에보라가 태어난 까보베르데(Cape Ver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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