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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Nov 16. 2024

인생이여 고마워요

한강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인생이여 고마워요
Gracias a la vida by Mercedes Sosa¹⁾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어서

나에게 준 두 개의 밝은 별

그것을 열면

흑과 백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으니까

높은 하늘 깊이 별들이 보이고

군중 속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네요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어서

나에게 준 귀로 전부 새겨 넣게 되는

밤과 낮의

귀뚜라미와 카나리아 소리

망치 소리와 물레방아 소리, 

공사장 소리와 소낙비 소리

그리고

마음 깊이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러운 목소리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어서

나에게 소리와 문자를 주어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주어서

어머니 친구 형제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의 길을 비춰 줄 빛을 주어서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어서

힘차게 뛰는 심장을 주어서

인간의 두뇌가 이룩한 성과를 보며

선이 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게 해주어서

그의 맑은 눈 깊은 곳에 

내 시선이 가닿게 해주어서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어서

웃음을 주고 눈물을 주어서

덕분에 행복과 슬픔이 구별되고

그것들이 내가 노래를 만드는 재료

당신들의 노래, 

그것도 같은 노래, 모두의 노래

그것은 나 자신의 노래  

   

인생이 고마워요    


얼마 전, 요즘은 안 들고 다니는 가방을 창고에서 꺼내 정리하다가 여러 번 접은 A4용지를 발견했다. 펼쳐보니 이 긴 메모가 적혀 있었다. 

   

내가 가진 것.    

 

눈이 있어, 세상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표정을 볼 수 있고

책을 읽을 수 있고

그림을 볼 수 있고

나무를 볼 수 있다.     


귀가 있어,

바람 소리, 빗소리,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코가 있어

모든 냄새―쑥냄새, 아기 냄새, 풀냄새, 흙냄새,

군고구마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고소하고, 향긋하고, 은은하다.  

        

입이 있어,

말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고,

맛볼 수 있다.     


피부가 있어,

바람을 느끼고, 따뜻한 물의 감각을 느끼고,

아이의 살결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만 느끼고,

생생히 받아들이며 살 수 있어도 좋은 것.     


어두운 것.

무거운 것.


이 모든 감각을 잊게 하고, 금 가게 하는 것들

―두려움. 후회. 근심. 갈등.

을 극복할 것.

그 길을 찾을 것.     


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갈 것.     


마지막 줄, ‘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갈 것’ 아래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잊고 있었는데 그때야 기억이 났다. 춤추며 <Let it be>를 듣던 바로 그즈음에 쓴 메모였다. 내가 정말 모든 걸 잃은 건가, 소설을 못 쓰게 되었다고 정말 그렇게 느껴도 되는 건가, 의문하며 백지를 펴놓고 차근차근 써 내려 갔었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들만을 써보자, 라고 생각하며 쓰다 보니 이런 목록이 완성되었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들의 목록. 제목처럼 ‘내가 가진 것’들의 목록.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의 시작인 오감. 그때 나에게는 사실상 자존감이라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내면이 황폐했었는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런 목록을 작성할 마음을 먹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얼마간 신기하다. 더 신기한 것은, 이 목록이 <인생이여 고마워요>의 가사와 아주 조금 닮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노래의 시적인 가사는 풍요한 생명과 감사, 축복으로 가득 차 있고, 그에 비하면 일상적인 언어로 쓰인 내 목록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것들을 기억하자는 첫걸음, 아니, 첫걸음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 노래를 처음 알게 된 건 2년쯤 전이었다. 우연히 메르데스 소사의 음반을 갖게 되었고, 마지막에 실린 이 노래를 들었다. 유일하게 아는 스페인어가 고맙다는 말이고, 고등학교 때 불어를 조금 배웠으니 대략 인생에 고마워하는 내용이려니 짐작만 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가사는 전혀 몰랐지만 반복되는 그 말, Gracias a la vida를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그 후 세계음악에 대한 책을 읽다가 거기 실린 이 가사를 보았고, 칠레 가수 비올레타 파라가 부른 부침 많은 삶을 겪은 뒤에 쓴 곡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중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성이 가장 정직하고 깊다. 세계음악을 좋아하는 친구가 들려준, 존 바에즈와 메르세데스 소사가 함께 부른 노래도 감동적인데, 라이브의 열띤 생생함이 마치 삶 전부를 벅찬 축제로 만드는 듯하다.      


대학시절 은사인 정현종 선생님의 시들 중에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²⁾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시 창작론 시간에 내가 냈던 시에 ‘내 청춘이 하룻밤 흙탕물처럼 떠내려가 버렸어요’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강의 시간에 나에게 물으셨다. “정말 청춘이 가버렸다고 생각하나?” 내가 대답을 못 하자 선생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 난 아직도 밤마다 달밤이야.”     


정말 그런지도 모른다. 달밤을 느낄 시간,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은지도 모른다. 이 노래처럼 인생에게 고백할 시간이 많지 않은지도. 실은 너에게 고맙다고. 이렇게 많은 것을 나에게 베풀어주어서.   


한강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인생이여 고마워요/Gracias a la vida)


인생이여 고마워요 Gracias a la vida by Mercedes Sosa

[註1]

아르헨티나 민중의 어머니 메르세데스 
2008년 10월 29일 [한겨레 블로그]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고난받는 이들의 어머니'라 불러도 나무랄 사람이 없다. 인디오의 피가 왜 뜨거운지 이 여인을 보면 안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인생은 한마디로 거룩하다.     


혹독한 군부독재를 경험했던 전 세계 민중들에게 양심과 정의 그리고 희망의 상징이었던 소사는 1935년 7월 9일, 아르헨티나 뚜꾸만의 산 미구엘에서 태어났다.     


소사가 나고 자란 아르헨티나는 우리에게 불행한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1810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1982년 12월 민주정권이 들어서기까지 근 170년간 잦은 군사쿠데타로 몸살을 앓아온 나라였다. 국민의 10%가 인디오이고 나머지는 유럽계 백인이다. 인디오들은 16세기의 스페인 침략을 겪으면서 이후 백인 농장주들의 착취와 그들을 지원하는 군사독재정권의 폭정에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그리고 후안 페론이 사망한 뒤 1976년 초 군사쿠데타를 거쳐 정권이 비델라 군부로 넘어가면서 여느 남미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포정치가 시작됐다. 나라 전체가 탄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민중의 삶과 꿈은 절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1977년부터 군사독재가 종식되는 1983년까지 군부의 인권탄압으로 3만여 명의 민중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기도 했다. 역사는 이것을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이라 불렀다.     


아르헨티나의 암울한 정치상황은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반독재와 저항의 노래들이 그 역사를 아프게 이어갔다. 이때 메르세데스 소사는 좌절 속에서 희망의 노래를 길어 올렸다. 아르헨티나 민중들에게, 더 나아가 똑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에게 어두운 시대를 이겨내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소사의 노래는 정직했고, 신념이 있었다. 군부에 맞선 그녀의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소사의 노래는 라디오나 TV에서 방송될 수 없었다. 그러나 민중들의 사랑은 군부독재가 휘두른 칼날 위에서도 뜨겁기만 했다. 소사에게는 늘 비밀경찰이 따라붙었고, 자신이 언제 어떻게 실종될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민중의 바다를 떠나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고 독재와 폭력에 저항하는 노래,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래, 반전평화 등의 노래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존 바에즈, 밥 딜런 등 세계 정상급 뮤지션들과 함께 반전평화 콘서트를 열었고, 국제사면위원회 콘서트에 참여하여 정의와 인권을 노래로 호소했다.   

  

소사는 믿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세상사의 표면도, 그 내면도,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 내가 변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 노래 '모든 것은 변하네'(Todo Cambia)에서     


소사의 노래에는 '언어'의 벽이 없다. 번역이 무의미했다. 그녀의 노래는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에 있었다. 목소리로 언어를 녹였고, 심금을 울리는 서정을 표현했다. 민중의 영혼을 일깨우는 목소리만으로 노랫말에 담긴 정서를 남김없이 전달할 줄 아는 소리꾼이었다. 세계인이 사랑하고 감동했던 이유다.     


소사의 노래를 들어 보라. 때로는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를 주며, 때로는 우렁찬 울림으로 청중들에게 신념을 전달하던 노래.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하다가도 불의에 대한 거센 분노를 담는가 하면, 처연히 솟아나는 이웃들의 슬픔에 낮게 엎드려 다가간 노래. 한 영혼이 흐느끼는 찬란한 슬픔과 견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께추아족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인디오의 얼굴, 그리고 전통의상을 입은 소박한 모습으로 세계 곳곳의 무대에 설 때마다 소사에게 쏟아졌던 청중들의 기립박수. 그것은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온 여인에게 바치는 무한한 존경과 애정의 표시였다.     


군사정권 아래서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하던 메르세데스 소사는 1979년 1월, 아르헨티나에서 영구 추방됐다. 그녀가 치른 망명 생활은 고독과 아픔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소사는 좌절하지 않았다. 록과 재즈 등 꾸준히 새로운 음악을 실험했다. 하지만 음악 인생의 모태가 되었던 안데스 음악을 저버리지 않았다. '포크로리카'(Folklorica)는 그녀에게 영혼과 같은 존재였다. 1960년대 초 소사가 참여한 누에보 깐시오네르 아르헨티노(Nuevo Cancionero Argentino, 아르헨티나의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정신을 잇는 것이며, 조국의 암울한 현실과 민중의 고통을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게 된 음악의 뿌리였기 때문이다.   

  

1982년, 마침내 소사는 망명 생활을 끝내고 모든 위험을 감수한 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 그녀가 고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정권은 무너졌다. 귀국 후 한 오페라 극장에서 가진 공연은 그야말로 감동의 무대였다. 꼭 기억해야 할 노래가 있다. 비올레따 빠라의 원곡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노래, 홀을 가득 메운 극장 안에서 군부독재 시대 억눌려 살아왔던 민중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소사가 불렀던 노래, 바로 풍부한 서정과 큰 울림으로 전 세계를 감동시킨 명곡 '삶에 감사합니다'    


[註2]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ㅡ 부ㅡ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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