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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Dec 05. 2024

한국전쟁과 기독교③

윤정란 지음 (17~24쪽)

서론     
좌와 우 모두 반식민 민족주의의 일환으로서, 민족의 해방과 자결이라는 이상으로 가는 길을 달리 제시했을 뿐인 것이다. 뒤이은 양극 시대에 좌우의 발상은 사회 내부의 갈등 및 전쟁의 이념으로 변모했고, 이때 민족 통일을 달성하는 것은 정치적 통일체 내의 다른 편을 전멸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 되었다.¹    


2.


앞에서 설명했듯이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에 대해 학계는 지금까지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양적인 팽창과 더불어 가장 근대화된 집단인 한국군과 교회의 중심에는 서북 출신의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한국군은 전쟁 전 5만여 명에서 55만여 명으로 증가했고, 1960년까지 위관급 장교 1만여 명 이상이 미국에서 유학했다.⁵ 이처럼 한국군은 한국전쟁 이후 양적으로 가장 많이 팽창했고 여느 집단보다 서양화되어 있었다. 교회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한국사회에서 가장 근대화된 집단이었고, 한국전쟁 이후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양적으로 팽창했다. 양적으로 팽창하고 근대화된 교회는 한국전쟁 이후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주도했다. 또한, 서북청년회 출신들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군에 대거 입대했기 때문에 군 또한 서북 출신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19세기 말 이후 민족과 역사가 결합하기 시작하자 민족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한국의 근대화를 추동했다. 즉,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조선의 신분제 사회를 자본주의사회로 바꾸기 위해 교회, 학교, 기독교 유관단체, 일반 사회운동 단체 등을 만들어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계속해서 확장해나가는 한편, 기존의 것을 공고히 해나갔다. 이는 마침내 1919년 삼일운동으로 터져 나왔으며, 공화정을 표방한 상하이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했다. 1923년 이후에는 상하이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이를 대신해 국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며 미래를 준비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일제에 자산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물산장려운동을 벌였으며, 농촌을 장악하고 농민을 자신들의 세력 기반으로 만들기 위해 농촌운동을 벌였다. 특히 이들이 가장 많이 투자하고 특별히 집중한 것은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 부분이었다. 그 결과 1943년에 이르면 전국의 각종 사립학교 중 70%가 북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⁶ 교육에 대한 이러한 투자 때문에 예를 들어 평안북도 정주는 학도병 지원자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⁷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지닌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방대한 구호물자를 독점했다. 예를 들어 고려신학교파(이하 고신파)는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의 전쟁 구호물자 독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세계기독교연합회(世界基督敎聯合會)와 동 자매기관인 국제선교협회(國際宣敎協會)로부터 기독교교역자(基督敎敎役者)의 가족들이 특수우대(特殊優待)에 배불니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고신계통의 사람은 굴머죽어도 안준다는대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신파 갓가운줄만 알아도 주던 것을 끊어버린다고 한다.⁸   

  

고신파뿐만 아니라 조선신학원파와 관계하는 교역자도 전쟁 구호물자 배급에서 배제되었다.⁹ 이러한 전쟁 구호물자의 독점을 통해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남한 사회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그들에게 한국전쟁은 신이 준 기회였다.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매개로 미국과 세계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미국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이를 통해 언제든지 이승만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전쟁 구호물자를 거의 독점하면서 세력을 강화했다. 전쟁 구호물자를 기반으로 교회를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 유관단체를 설립해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확대해나갔다. 1950년대 중반에 신설된 2000여 개의 교회 중 약 90%가 이들이 세운 것이었다.¹⁰ 예를 들어서 장로교의 경우를 살펴보면 1949년 교회 수 649개, 교인 수 38만 5215명이었는데, 10년 뒤인 1959년에 이르면 교회 3527개, 교인 89만 2083명으로 증가했다. 1951년에 부산에서는 100개의 교회가 신축되었다.¹¹ 이렇게 세워진 교회는 한국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반이 되었다.     

 

월남한 서북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군종 제도를 만들어 교회뿐만 아니라 군에서도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다져나갔다. 군종 제도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수개월이 지난 1950년 9월에 정식으로 만들어졌다. 천주교 선교사 조지 캐럴(George Carroll),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쇼(William F. Show), 한국인 장로교 목사 한경직, 감리교 목사 유형기 등이 군종제도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이승만을 설득함으로써 성사되었다.¹² 민간의 교회와 기독교 유관단체, 군의 군종 제도 등은 공산주의와의 싸움에 당위성을 부여함으로써 사상전의 기반이 되었다. 휴전 이후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한국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세력이 되었다.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정치적·사회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부상했다.     


한국전쟁을 통해 성장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서북 출신 군 장성들과 함께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킨 박정희를 지지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나아가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이 19세기 말 이후부터 한국 근대화를 위해 추구했던 다양한 노력과 경험은 박정희 정권이 성공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렇듯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과 한국전쟁, 박정희 정권의 관계에 대해 학계에서는 그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연구성과는 막대한 양을 자랑하지만,¹³ 그것도 대부분 전쟁의 기원과 원인, 전쟁의 진행 과정 등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다. 1989년 이후 냉전이 세계사적으로 종식되었다는 선언이 나온 후 한국전쟁 연구는 미시사적 관점으로 접근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연구 영역이 더욱 확대되기는 했으나,¹⁴ 한국전쟁을 기회로 삼아 양적으로 팽창한 한국 기독교, 특히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한국전쟁과 기독교인에 대한 관련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분야 역시 연구 영역이 점차 확대되어가고는 있지만, 지금까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향에서만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첫째는 한국전쟁이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한 것이고,¹⁵ 둘째는 한국전쟁 중에 한국교회, 선교사, 세계 교회 등이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다룬 것이다.¹⁶ 마지막으로는 한국전쟁 동안 일어난 기독교인의 학살과 관련된 것이다. 첫 번째 경우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교회에 나타난 현상으로 전투적 반공주의, 피난민 교회의 설립, 신흥 종파의 형성, 교회의 분열, 교회 지도력의 변화, 선교 지역의 분할 구도 해제, 북한 교회의 말살 등을 대상으로 했다. 두 번째 경우는 전시 중의 활동과 관련된 것으로 선교사의 활동, 포로 선교, 세계 교회, 특히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를 비롯한 많은 세계 기독교 단체의 원조 활동, 한국전쟁에 대한 북미 교회와 중국교회의 이해 등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경우로는 전시 중에 발생한 민간인 학살과 기독교인의 관계, 기독교인들의 희생에 대한 기록상의 오류 등을 지적한 연구¹⁷ 등이 있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연구 영역이 기독교에 한국전쟁이 어떠한 의미였는지에만 머물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전쟁과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의 관련성 연구는 아직까지 크게 진척되지 않고 있다.     


박정희 정권과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성격과 경제성장의 배경에 주목해 연구의 지평을 확장했다. 이는 그 시기가 그만큼 현대 한국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며, 한국의 경제성장과 자유민주주의의 체제 수립에 대한 열망 등이 활화산처럼 불타오르고 실험이 시작된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 일제가 남긴 잔재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의 유산까지 모두 동원했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 정책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공업화된 근대 국가를 달성하기 위해 정신적·물질적 자원을 총동원했다. 국민들을 이러한 계획에 동원하고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깊은 애국심과 빈곤으로부터 해방이라는 경제적 욕망을 부추겼다.     


애국심 고취의 일환으로 19세기 말 이후 전개된 한국 민족운동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한글 전용화 정책 추진, 국사 교육 강화, 문화재 지정과 유적 조성, 문화재 보존 사업, 역사 인물의 재발견, 충효 사상 부활 등을 통해 역사적·문화적 전통을 부활시켰다.¹⁸ 이와 동시에 1962년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200여 명에게 포상을 했다.¹⁹ 이러한 역사·문화 정책은 민족 운동가들의 민족문화 수호 운동을 그대로 부활시킨 것이며 동시에 민족 운동가들을 정부 수립의 공식적 유공자로서 제도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박정희는 5·16 군사 정변 2주년 기념식에서 선현(先賢) 석조상 37개를 만들어 중앙청에서 남대문까지 세워놓고 기념식을 개최했다. 석조상으로 만들어진 인물은 왕건, 강감찬, 최충, 윤관, 문익점, 최무선, 이준, 유정(사명당), 최익현, 김춘추, 정몽주, 이순신, 정약용, 을지문덕, 세종대왕, 신사임당, 권율, 김유신, 원효대사, 이황, 이이, 손병희, 김좌진, 김구, 이상재, 민영환, 김정희, 김홍도 등 37명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선정했다.²⁰ 이 석조상들은 미관상 지저분하다는 여론이 일자 철거되었다.²¹ 그 대신에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이 설립되었다.²²     


일제강점기 민족운동가들이 일제로부터 국권을 되찾기 위해 민족 공동체를 강조한 것처럼 박정희 정권도 이러한 유산을 국가발전주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한편, 일제의 황민화 정책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예를 들어 일왕이 황민화 정책을 위해 선포했던 ‘교육칙어’와 유사한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모든 국민이 국가의 발전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²³     


박정희 정권은 이렇듯 반도의 모든 역사적 유산을 총동원해 국민들의 자발적인 동원을 끌어냄으로써 경제성장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여기에는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역사적으로는 19세기 말부터 지속적으로 전개해온 민족운동 차원의 근대화를 위한 다양한 실천과 경험, 한국전쟁 이후 수없이 설립되어 그들의 지지기반과 여론 형성의 거점이 된 교회와 기독교 관련 기관들, 국외적으로는 미국 정부와 미국 여론을 비롯해 세계의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세계적 관계망 등을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서북 출신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교회와 박정희 정권의 결합은 한국의 경제성장이 성공을 거둘 수 있게 한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여러 접근 방식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에 관해 나름의 분석을 해왔지만,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과의 연관성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보수 반공주의를 대표하는 한국 기독교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한국전쟁 이후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남한 사회에서 어떻게 정착했는지, 나아가 이들이 어떻게 박정희 정권과 결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맥락에 따라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한국전쟁을 통해 어떻게 남한에 정착하고 정치적·사회적 헤게모니를 확장해나갔으며, 박정희 정권과 결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계속>   


[지은이 註]

1) Heonik, Kwon, The Other Cold War(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p.116[『또 하나의 냉전: 인류학으로 본 냉전의 역사』, 유한중 옮김(민음사, 2013), 242쪽].     


5) 도진순·노영기, 「군부 엘리트의 등장과 지배양식의 변화」,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선인, 2004), 62, 66쪽     


6) 조형·박명선, 「북한 출신 월남인의 정착과정을 통해서 본 남북한 사회구조의 변화」, 『분단시대와 한국사회』(까치, 1977), 151쪽.     


7) 오산중·고등학교 엮음, 『오산팔십년사』(오산중·고등학교, 1987), 395쪽.   

  

8) 송상석, 「문제의 기독교와 용공정책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내면상 폭로(1)」(1951), 20쪽   

  

9) 장병일, 『살아있는 갈대』(향린사, 1968), 239~240쪽     


10)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종교교육부, 1956), 100~101쪽.   

  

11) 박보경,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한국교회의 역할」, <선교와 신학>, 26집(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2010), 125~126쪽.     


12) 군종 제도는 장병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군의 정신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이를 주도하는 군종 장교는 각 종교를 대표하는 성직자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 제도가 만들어지자 기독교와 천주교만 참여했다. 그 후 1960년 후반에 베트남 파병으로 불교에 대한 필요성이 인식되자 불교도 합류하게 되었다[편집부, “육군 군종 20년”, <새가정>, 190호(새가정사, 1971), 42~44쪽].     


13)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박명림, 『역사와 지식과 사회: 한국전쟁 이해와 한국사회』(나남, 2011) 참조.     


14) 이에 대한 연구성과는 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돌베개, 2010) 참조.    

 

15) 강인철,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 형성과 재생산」, <역사비평>, 70호(역사문제연구소, 2005); 김흥수, 『한국전쟁과 기복신앙 확산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 노치준, 「한국전쟁이 한국종교에 미친 영향: 한국의 개신교회를 중심으로」, 『한국전쟁과 사회변동』(풀빛, 1992); 박보경,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한국교회의 역할」; 박정신, 「6·25전쟁과 한국기독교: 기독교공동체의 동향과 변화를 중심으로」, 유영익·이채진 엮음, 『한국과 6·25전쟁』(연세대학교출판부, 2002); 서정민, “한국기독교의 반공 입장에 대한 역사적 이해”, <기독교사상>, 32권 7호(대한기독교서회, 1988); 손규태, 「분단상황에서의 기독교의 역할: 반공이데올로기의 탄생과 정착을 중심으로」, <신학사상>, 61집(한국신학연구소, 1988); 허명섭, 「한국전쟁과 한국교회 구조의 변화」, <한국기독교신학논총>, 35집(한국기독교학회, 2004).      


16) 김승태, 「6·25전란기 유엔군 측의 포로정책과 기독교계의 포로선교」, <한국기독교와 역사>, 21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4); 김흥수, 『한국전쟁과 기복신앙 확산 연구』; 「한국전쟁 시기 평양 상황 보고서」, 한국기독교와 역사>, 15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세계교회협이회(WCC)의 한국전쟁 성명과 공산권 교회들」, <한국근현대사연구>, 24집(한국근현대사학회, 2003); 「한국전쟁 시기 기독교 외원단체의 구호활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23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5); “해방 후 한국전쟁과 이승만 치하의 한국교회”, <기독교 사상>, 50권 2호(대한기독교서회, 2006); 이종만, 「한국전쟁기간 미국북장로회 한국선교부의 활동: 옥호열(Harold Voelkel)선교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화사학연구> 40집(이화사학연구소, 2010); 탁지일, 「북미 교회의 한국전쟁 이해: 미국 장로교회와 캐나다연합교회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39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3).     


17) 윤정란, 「한국전쟁기 기독교인 학살의 원인과 성격」, 『전쟁과 기억: 마을 공동체의 생애사』(한울, 2005); 최태육, 「남북분단과 6·25전쟁 시기(1945~1953)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 연구」(목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4).     


18) 전재호, 「박정희 체제의 민족주의 연구: 담론과 정책을 중심으로」(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7), 160~192쪽.     


19) 윤선자, 「광복 후 애국선열 선양정책 재조명」, <사학연구>, 100호(한국사학회, 2010), 370쪽, 독립유공자 서훈은 대통령 이승만과 이시영에게 처음으로 수여되었고 1950년 헐버트, 1953년 장제스 등 4명 정도였다가, 재개된 1962년에 204명, 1963년 261명, 1968년 106명, 1977년 106명이 서훈되었다.    

 

20) “스케치”, <동아일보>, 1968년 4월 25일 자.

     

21) “두 달 만에 퇴(褪), 변색, 손괴까지”, <동아일보>, 1964년 7월 14일 자.  

   

22) “충무공 동상 제막”, <매일경제>, 1968년 4월 27일 자.  

   

23) 윤해동, 「국채와 국민의 거리: 탈식민시기의 식민주의」, <역사문제연구>, 15호(역사문제연구소, 2005), 61~95쪽.   

윤정란 교수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제시대 한국기독교 여성운동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숭실대학교에서 한국사 강의를 하고 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기독교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가 점차 영역을 넓히면서 조선시대부터 근대 독립 운동가들, 해방 이후 여성들의 삶까지 역사 속 여성 문제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견고한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서 500년이 지난 오늘날 무엇이 달라졌는지 묻는다. 그동안 펴낸 저서로는 《조선왕비 오백년사》, 《한국기독교여성운동의 역사》, 《전쟁과 기억》(공저) 등이 있다.
한국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을지로5~6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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