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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Dec 01. 2024

한국전쟁과 기독교②

윤정란 지음 (13~17쪽)

<서론>     
좌와 우 모두 반식민 민족주의의 일환으로서, 민족의 해방과 자결이라는 이상으로 가는 길을 달리 제시했을 뿐인 것이다. 뒤이은 양극 시대에 좌우의 발상은 사회 내부의 갈등 및 전쟁의 이념으로 변모했고, 이때 민족 통일을 달성하는 것은 정치적 통일체 내의 다른 편을 전멸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 되었다.¹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는 월남 기독교인들의 교육 거점이자 세력 확장에 크게 기여한 장로회 신학대학교, 숭의여자대학교, 숭실대학교 등에서 이사, 학장, 이사장 등을 지냈다. 그러므로 그의 인맥에는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1.


한국전쟁 이후 좌우의 이념 갈등은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고착화되고 강화되었다. 그리고 상대 진영에 대해서는 절멸시켜야 할 적(敵)으로 간주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세계는 이제 탈냉전의 세계사를 써야 한다면서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한반도에서는 이를 희망 반 부러움 반의 감정으로 지켜보았고, 그로부터 약 25년이 흘렀다. 그러나 한반도의 사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좌우 이념 갈등은 더욱 심해지는 듯하다.      


이러한 좌우 이념 갈등의 중심에 한국기독교²가 있으며, 이들은 우익 진영을 대표한다. 한국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우익 진영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부상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부터로, 그 중심에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서북출신 기독교인들은 한국기독교의 주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한 사회에서의 정착에도 성공했다. 이를 기반으로 박정희 정권과 결합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부상했다.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과 관련된 인물들은 제3공화국에 이어 제5공화국, 제6공화국에서도 권력 실세로 계속 등장했다. 이에 대해 1989년 6월 19일 자 <동아일보> 기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6공 출범 1년여가 지나면서 세간에는 “비행기를 타려면 ”TK 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라“는 말이 공공연히 유행했다.     


요직을 과점하고 있는 대구 경북에다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른바 신원로 그룹들의 상당수가 이북 출신들(국회의장, 국무총리, 대통령 비서실장 등)임을 빗댄 것으로 ‘노스웨스트’는 과거의 서북청년단에서 유래하고 있다.³     

 

1989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동아일보>는 제3공화국부터 제5공화국까지의 인물들이 제6공화국에서 다시 부상하는 것에 대해 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즉, 영남과 서북 출신들이 박정희 시대에 이어 제6공화국에서도 다시 국정 운영의 핵심 세력이 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동아일보>의 이 기사에서는 이어서 ”‘연줄의 연’이라는 고질은 공직자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도 빨리 없어져야 하며 그 해결은 국민 하나하나의 인식 전환과 함께 집권층의 결단에 의해서만 모색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 고리는 여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이후 20년이 지난 2008년에 들어선 이명박 정부에서도 여전히 그 연줄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명박 정부는 ‘고소영 정권’이라고 비아냥거림을 당했다. 이는 ‘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의 알 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소망교회는 오늘날 한국에서 부의 상징이 된 강남에 위치한 대형 교회로, 월남한 기독교 목사 곽선희가 세웠다. 곽선희는 황해도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유격대인 동키 5부대에서 활약한 경력이 있다.⁵  

   

동키 부대는 서북청년회(서북청년단 혹은 서청) 출신과 관련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많은 서북청년회 출신 청년들이 유엔군 유격대에서 활동했다. 곽선희는 월남 기독교인들의 교육 거점이자 세력 확장에 크게 기여한 장로회 신학대학교, 숭의여자대학교, 숭실대학교 등에서 이사, 학장, 이사장 등을 지냈다. 그러므로 그의 인맥에는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서북 지역은 19세기 말 이후 기독교를 어느 지역보다 가장 빨리 받아들임으로써 한국의 기독교를 주도한 곳이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1945년 이후 이 지역에서 월남한 사람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의 출신지인 서북 지역은 조선 시대에 정치적·사회적으로 주류에 들지 못했던 지역이다. 19세기 말 물밀 듯이 들어오는 서양 자본주의 문명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기독교를 여느 지역보다 빨리 받아들였다. 그들은 조선 왕실의 역사를 부정하고 단군을 중심으로 한 서북의 지역사를 민족사의 주류로 인식을 확대함으로써 민족사의 중심부로 부상했다. 서북민들은 자신들을 민족의 중심 세력으로 위치를 설정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사회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한 냉전 체제가 확고해지자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중심으로 냉전 체제에 대응할 수 있는 반공 연합 전선을 새로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온 소군정과 김일성 연합 정권의 탄압으로 서북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삼팔선을 넘어야 했다.      


한국전쟁은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에게 남한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정착시키고 정치적·사회적 헤게모니를 확장해가는 데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다. 한국전쟁으로 남한의 모든 전통이 일소되어버린 상황에서 미국의 자본주의가 빠른 속도로 침투해 들어왔고,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빨리 이러한 환경에 적응했다. 한국전쟁을 기회로 남한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박정희 정권과 결합함으로써 한국의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동력이 되었으며 핵심 주체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한국전쟁을 기회로 남한 사회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박정희 정권과 결합해 한국 사회의 정치적·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집단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계속>    


[지은이 註]

1) Heonik, Kwon, The Other Cold War(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p.116[『또 하나의 냉전: 인류학으로 본 냉전의 역사』, 유한중 옮김(민음사, 2013), 242쪽].    

 

2) 이 책에서 기독교는 개신교를 의미한다.     


3) “공직자: 변화의 시대 방황의 현주소”, <동아일보>, 1989년 6월 19일 자.    

 

4) ‘역경의 열매, 조병해 (10)“, <국민일보>, 2008년 5월 8일 자; ”무명 유격대 ’동키‘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국민일보>, 2014년 6월 28일 자     

<윤정란 교수>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제시대 한국기독교 여성운동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숭실대학교에서 한국사 강의를 하고 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기독교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가 점차 영역을 넓히면서 조선시대부터 근대 독립 운동가들, 해방 이후 여성들의 삶까지 역사 속 여성 문제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견고한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서 500년이 지난 오늘날 무엇이 달라졌는지 묻는다. 그동안 펴낸 저서로는 《조선왕비 오백년사》, 《한국기독교여성운동의 역사》, 《전쟁과 기억》(공저) 등이 있다.                        
Operation Chromite in action as American forces land in Inchon harbor.
Marines during the retreat to Hungnam, December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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