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정 평론가의 <한강 시집> 수록 작품해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조연정 평론가의 <한강 시집> 수록 작품해설
우리에게는 소설가 한강이 인상 깊게 각인되어 있지만 지난 20년 동안 그녀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영혼의 동지(同志)인 나의 육체”
한강의 시에서는 마치 그녀의 소설 속 고통받는 인물들의 독백인 듯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눈물이 흐르고 피가 흐른다. 육체의 아픔을 노출시키며 그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을 읽는 우리라면 고통의 원인에 관심이 많겠지만 시를 읽는 우리는 고통이 드러나는 양상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한강의 시는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에 관한 열렬한 증언이자, 더불어 “그렇게 부서지고도/나는 살아 있”(「피 흐르는 눈 3」다는 사실에 대한 냉정한 응시로 읽힌다. 전자에 관한 시들은 주로 시집의 앞부분(1부)에, 후자에 관한 시들은 주로 뒷부분(5부)에 실려 있다. 영혼의 부서짐을 경험했던 순간이 시인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으로 다가왔을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사소하고 일시적인 수치의 순간일 수도 있고, 살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치욕으로 느껴지는 거대한 환멸의 순간일 수도 있다. 각자 지니고 있는 영혼의 순도나 크기와 무관하게 인간은 누구나 영혼의 부서짐을 어떤 형태로든 겪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영혼의 부서짐에 대해 애초에 둔감하거나 그것을 애써 모른 척한다. 아마도 평범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서일 것이다. 영혼의 부서짐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일도,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일도 쉽지 않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전문
시집의 첫머리에 놓인 시이다. 밥을 먹던 ‘나’에게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는 사실이 문득 환기된다. 그렇게 무언가가 영원히 지나가버리는 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나’는 그저 밥을 먹는다. 이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인가를 영영 잃어버렸다는 깨달음 뒤에도 지속되는 일상적 행위의 수치가 아니다. 그보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실감이 마치 밥 먹듯 반복된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그런 점에서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는 애매모호한 문장이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지금도 지나가고 있다’라든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라고 써야 자연스러웠을 문장이다. 하지만 이처럼 진행형의 문장과 완료형의 문장을 포개놓으면서 위의 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의 조짐이 지속되는 삶의 쓸쓸함을 보여준다. 이 짧은 시를 통해 우리는 앞으로 읽게 될 이 시집의 화자가 대단히 민감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은연중 확인하게 된다.
물론 이 같은 상실감과 균열의 느낌은, 즉 영혼의 부서짐에 대한 분명한 실감은 깨어 있는 영혼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한강의 시는 곳곳에서 영혼의 상처에 대해 말하면서 그 상처가 결코 회복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영혼의 상처가 회복 불능의 것이고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의 삶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까. 아마도 그런 삶에는 분노와 슬픔을 넘어 절망과 무기력과 체념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제/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회복기의 노래」)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회상」)라는 질문이 제출되는 것은 당연하다. 삶을 절망 속에 방기할 수 없는 영리한 사람들은 남은 삶을 위해 영혼의 상처를 애써 봉합하려 한다. 그러나 한강의 화자들은 고통과 마주하는 일을 피할 생각이 없다. 절망과 무기력에 빠질 생각도 없다. 한강에게 상처의 고통을 지속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한 일종의 방법론이 된 듯하다.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니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
―「그때」 전문
잊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
부스러질 것들
부스러질 혀와 입술,
따뜻한 주먹
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본다
무엇인가
반짝인다
반짝일 때까지
―「저녁의 소묘 4」 전문
「그때」라는 시를 보자. 험난한 인생의 한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순간, 애써 건너온 그 시절이 그저 ”허깨비“에 불과했다는 듯 삶의 위기는 쉼 없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 자체를 놓아버리지 않으려고 누군가는 안간힘을 쓰며 삶을 향해 가까스로 손을 내밀겠지만, 손을 잡아주기는커녕 다시 산산조각 내버리고 마는 잔인함이 우리의 삶 안에 내장되어 있기도 하다. 이 시의 화자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특별한 불행이 반복되는 누군가의 불운한 삶을 보여주려는 것이 시인의 목표는 아니다. 특별한 불행과는 무관하게 삶과 전면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민감하고도 강한 영혼과 허약한 육체에 대해 시인은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자신의 ”악력“으로 스스로 “손뼈”를 바스러뜨리는 모습은 강한 영혼과 약한 육체를 동시에 상징한다. 「저녁의 소묘 4」의 ’나‘ 역시 자신을 이루는 가장 연약한 부분들이 부서지는 것을 지켜본다. 그 고통과 절망의 응시 속에서 ’나‘는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다. 저 “반짝”거리는 것을 깨어 있는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타락한 세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한강의 화자들은 그 불화를, 즉 보이지 않는 아픔을 주로 육체의 고통을 통해 드러내곤 한다. 상처받은 무구한 영혼의 존재가 피 흘리는 육체를 영혼의 그릇으로 생각하는 고전 철학의 그것에 가깝다. 인간의 육체는 보잘것없는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그 허상으로 인해 오히려 영혼의 존재가 더 숭고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순수한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피 흘리는 육체를 완전히 저버릴 수 없다. 타락한 세계로부터 영혼의 순수함을 지켜내기 위해서 인간은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강은 말하는 듯하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파란 돌」 부분
시인이 실제로 꾸었던 꿈속 장면인지도 모르겠다. 십 년이 지나서도 다시 떠오를 만큼 생생하고도 인상적이었던 그 꿈속에서 ’나‘는 죽어 있다. “아, 죽어서 좋았는데”라고 해맑게 말하며 죽음을 기꺼워하는 ’나‘의 모습이 이 시의 첫 번째 반전이라면, 투명한 냇물 안에 놓여 있던 희고 둥근 조약돌을 줍고 싶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고 있는 모습은 이 시의 두 번째 반전이다. 죽은 채로는 냇물 속에서 투명하게 반짝이는 푸른 돌을 건져 올릴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나‘는 다시 살고 싶어진다. 내가 꿈으로부터, 아니 죽음으로부터 건져 올리려 했던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그 돌”은 과연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그 “파란 돌”이 꿈속에서 죽은 채로 기뻐하는 ’나‘에게 “다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프게 일깨워주고 있는 사물이라는 점이다. 보잘것없는 돌멩이를 향해 보잘것없는 팔을 뻗고 싶다는 보잘것없는 욕망으로부터 삶의 의지가 생겨난다는 사실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죽어서 좋았”다고 말하는 ’나‘에게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의 삶을 통해서만 영혼의 소유자(“눈동자처럼 고요”하고 해맑은 “파란 돌”은 영혼의 상징으로 읽힌다)라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 확인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삶 속에 이미 구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 속에서 살아내는 것 자체가 구원인 셈이다. “영혼의 동지(同志)인 나의 육체”(「캄캄한 불빛의 집」)가 흘리는 피눈물을 그저 감내하는 것만이 타락한 세계에 처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다.
한강의 시는 삶을 관통하는 불꽃 같은 고통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실제적인 원인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며, 나무의 잎사귀를 들여다보며, 얼굴에 내리쬐는 햇빛과 마주하며 인간이 수시로 영혼의 아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왜일까.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와 달리, 그리고 한곳에 붙박혀 있는 나무와 달리 인간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인간은 새에게도 나무에게도 없는 언어를 가졌다. 언어와 더불어 인간은 영혼의 존재가 되었다. 한강의 시를 읽는 우리는 이제 언어와 영혼을 동의어로 취급해야 한다. 육체를 피 흘리게 함으로써 세계와 불화하는 무구한 영혼의 존재를 증명했듯, 한강의 시는 다른 한 편에서 일상의 언어을 피 흘리게 함으로써 침묵으로부터 최초의 언어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순간을 복원해내려고 한다. <계속>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평집 『만짐의 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