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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Dec 19. 2024

개기일식이 끝나갈 때③

조연정 평론가의 <한강 시집> 수록 작품해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조연정 평론가의 <한강 시집> 수록 작품해설     

우리에게는 소설가 한강이 인상 깊게 각인되어 있지만 지난 20년 동안 그녀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어의 기원, 어둠의 그림과 침묵의 노래

인간의 말이 순수해질 때 그것은 그림과 가까워진다. 다시 한번 막스 피카르트를 인용해보자. 그에 따르면 그림의 침묵은 “말의 어머니”(p. 204)이다. 그림은 “인간이 말로 타락하기 이전의 낙원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그림의 침묵에 대항하면서 말이 “최초의 현존”(p. 206)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말을 배우기 이전 아이의 영혼이 그림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참고할 수 있다. 이처럼 침묵에 맞서 자신의 현존을 획득하려는 순간의 말은 온전히 진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침묵의 그림을 해석해내려는 말은 이미 타락한 것이 된다. 막스 피카르크가 정신분석을 비판하면서 꿈의 그림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꿈의 그림을 훼손한다”(p. 215)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파괴된 말’을 사용하여 ‘파괴된 그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훼손된 언어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그 언어를 통해 진실한 말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까.      


세세한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한강은 한 인터뷰에서 소설의 인물로 미술가를 자주 호출하는 이유에 대해 “언어에 대한 고민 때문에 미술에 매력을 느껴온 건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단순히 해석하면 말할 수 없는 것에 온전히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 때문에 오히려 침묵의 이미지인 미술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는 뜻일 수 있다. 언어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지속하지만, 그림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한다. 그렇다면 이미 기능어로 전락한 일상어를 통해 그림의 침묵에, 즉 말이 생겨나기 직전이 그 침묵에 도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최초의 진실한 말을 복원할 방법이 인간에게 있기는 한 것일까. 위의 인터뷰에서 한강은 연달아 이렇게 덧붙였다. “결국, 저는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고, 오직 언어로 뚫고 나아가고 싶어요. 언어라는 것이 저에게 주는 어떤 고통이 있는데, 그것과 싸우는 게 앞으로 제 숙제가 될 것 같습니다.” 언어가 주는 고통과 싸우는 것, 즉 일상의 언어에 대해 불편한 이물감을 드러내는 것은 최초의 말이 지닌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 될 수는 있겠다.     


『희랍어 시간』에서 암흑의 공간에 있는 남자와 침묵의 공간에 있는 여자는 바로 이 같은 최소한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인물들이 아닐까.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서 우리는 이 두 남녀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저녁의 소묘」와 「새벽에 들은 노래」라는 연작시는 그 제목만으로도 흥미롭게 익힌다. 곧 어둠으로 뒤덮일 저녁의 공간에서 (듣지 않고) 그림을 보는 사람, 이내 눈앞의 모든 것이 분명해질 새벽의 공간 속에서 (보지 않고) 노래를 듣는 사람, 즉 어둠 속에서 오히려 보려 하고 빛 속에서 오히려 듣고자 사람은 모두 언어의 물질성을 활용한 일상적 소통의 익숙함을 거절한 자들이다. 시집의 첫 장에 놓인 <시인의 말>에서 한강은 “어떤 저녁은 투명했다(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라고 적었다. 어둠을 보고 빛을 듣는 그 불편한 세계가 그녀에게는 왜 투명한 세계가 되는 것일까. 순수한 관념으로서의 언어와 마주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투명한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통로로 제시되는 것은 주로 “텅 빈 두 눈”(「해부극장」)과 “혀가 없는 말”(「해부극장 2」)이다. 그래서 시인은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저녁의 소묘」)라고 적기도 했다. 피투성이의 고통과 더불어 말 자체도, 그리고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영혼도 비로소 진실할 수 있다고 시인은 굳게 믿고 있다.      


지구 반대편의 도시에서 쓰인 「거울 저편의 겨울」 연작에서 도구로서의 언어가 아닌 존재로서의 언어와 진실하게 마주하는 시인의 모습이 환기된다. 이제껏 발 디디고 살던 곳과 밤낮은 물론 계절까지 정확히 반대인 낯선 공간에서 쓰인 시들이 주로 그곳의 풍경들을 신기한 눈으로 스케치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흔히 타지를 방문한 사람들이 눈 앞에 펼쳐진 풍경들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것은 소리에 둔감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저 분절되지 않은 소리의 덩어리로 감지될 뿐이다. 마치 침묵의 공간에 있는 듯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침묵 속에서라면 눈앞에 있는 사물들이 더 명징해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명징하고도 낯선 풍경 속에서 오히려 자기 스스로 낯설어지는 경험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마치 “거울 뒤편”(「거울 저편의 겨울 7-오후의 미소」)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곳에서 시인이 마주하는 것은 주로 “텅 빈 눈 한 쌍이 나를 응시”(같은 시)하는 모습이거나 “눈먼 남자 둘”이 나란히 걷는 모습“(「거울 저편의 겨울 8」)이다. “지구의 핵”(「거울 저편의 겨울」)을 사이에 두고 내가 살던 곳과 정반대 편에 위치한 그곳에서 시인은 주로 침묵과 암흑을 만난다.   

   

나의 도시가 

거울 저편의 도시에 겹쳐지는 시간

타오르는

붉은 테두리만 남기는 시간     


거울 저편의 도시가

잠시 나의 도시를 관통하는

(뜨거운) 그림자     


마주 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서로를 가리는 순간

완전하게 응시를 지우는 순간     


얼음의 고요한 모서리     


(아직 피투성이로)

짧게 응시하는 겨울

의 겉불꽃

         ―「거울 저편의 겨울 4 –개기일식」 부분         


시인은 ”달의 원“과 ”태양의 원“이 정확하게 겹치는 개기일식처럼 지구 반대편의 도시가 ”나의 도시“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신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개기일식의 순간에는 태양이 달의 그림자에 온전히 가려짐으로써 한낮의 시간에도 암흑을 경험하게 해준다. 한강은 지구 반대편에서의 거울 보기를 이 같은 개기일식의 암흑에 비유한다. 흔히 낯선 곳에서의 우리는 시차와 거리감을 분명히 감지하며 스스로를 보다 객관적이고도 명료하게 점검해보곤 하지만, 이 시의 ‘나’는 시차와 거리감이 무의미해진 공간에서 오히려 자기 안으로 맹렬히 침잠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타자화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거울 없이 맨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듯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이때의 응시는 ”완전하게 응시를 지“울 정도로 뜨겁다. 물론 그 뜨거운 응시는 ”피투성이“의 고통을 필요로 한다. 마치 해석 불가능한 꿈속에서 있는 듯 어떤 언어로도 이해 불가능한 자신의 진실과 마주하는 응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울 저편의 얼굴 9-탱고 극장의 플라맹코」를 연달아 읽어보자.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맹렬하게 플라맹코를 추고 있는 사람의 ”이글거“리는 눈빛 속에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마치 ”태양 또는 죽음“처럼 ”마주 볼 수 없는 걸 똑바로 쏘아“보려는 사람의 얼굴에 새겨진 ”공포 또는 슬픔“이다. 거울을 통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직접 보려는 사람처럼 마주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보고자 하는 ”피 흘리는 눈“(「피 흐르는 눈」) 앞에서 과연 어떤 일이 펼쳐질까. 소리도 없고 빛도 없는 침묵과 어둠의 공간에서 시인이 발견하는 것은 순수한 언어의 존재이다.     


한 사람이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이렇게 멎는다

기억이

예감이

나침반이

내가 나라는 것도     


스며오는 것

번져오는 것     


만져지는 물결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의 피     


어둠과 빛

사이     


어떤 소리도 광선도 닿지 않는

심해의 밤

             ―「마크 로스코와 나 2」 부분   

  

선이 아닌 단지 면으로 이루어진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추상화를 마주하고 있는 심정을 한강은 ”어떤 소리도/광선도 닿지 않는/심해의 밤“에 들어앉아 있는 느낌으로 그려낸다. 그 침묵과 암흑의 공간에 놓여 ”내가/나라는 것도“ 잊은 채 시인은 천천히 자신의 실핏줄 속으로 번져오는 ”당신의 피“를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의 피“를 감지하는 그 생생한 느낌이 바로 누군가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심정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영혼의 만남을 위해서는 소리도 빛도 방해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명명한 ”당신“은 과연 누구일까. 1970년 2월에 양쪽 손목을 칼로 그어 죽은 화가와 자신이 ”죽음과 생명 사이“(「마크 로스코와 나-2월의 죽음」)에서 비슷한 모양의 영혼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시에서 소개되는 일화는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 지성사, 2011)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시의 ”당신“은 내가 하나의 점으로 잉태되던 순간 죽음을 선택해버린 화가이다. 내가 생겨나던 그 순간 죽음의 공간으로 들어감으로써 ‘나’의 명료한 삶이 결국 불가해한 어둠(죽음)으로부터 탄생했다는 사실을 은연중 일깨워준 사람이다. 죽음으로부터 삶이 탄생하고 어둠으로부터 빛이 탄생했다. 이 시의 화자가 이러한 사실을 거대한 추상화의 침묵 속에서 깨닫고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앞에서 우리는 언어가 그림의 침묵으로부터 생겨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소리도 빛도 없는 공간에서 ‘나’의 실핏줄에 스며들고 있는 ”당신 영혼의 피“를 우리는 언어의 영혼이라 불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새벽에 들은 노래」 전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실린 두 번째 시이다. 시집에 실린 시들 중에서 가장 간결한 말로 이루어진 시에 속하지만 어쩐지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썼을 것만 같은 시다. 빛과 어둠의 틈으로 ”반쯤 죽은 넋“이 비친다. 절반쯤 죽은 넋은 이제는 껍데기로만 남은 타락한 언어를 가리키는 것일까. 침묵과 암흑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렸던 최초의 언어가 가진 넋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시인은 반쯤 죽은 언어의 넋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가만히 ”입술을 다문다.“ 언어가 타락한 세계를 애써 거절하는 방법은 오로지 침묵뿐이라는 듯이 말이다. 물론 언어가 주는 고통을 뚫고 나가는 것을 숙명으로 삼는 시인의 의지가 이러한 소극적 행위에서 멈출 리 없다. 자신의 피 흘리는 육체를 담보로 세계의 타락을 증명하고 순수한 영혼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시인은 이제, 죽은 말에 대한 애도를 넘어 그 죽은 말을 되살리는 방법까지 생각해 보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입술을 꽉 다문 채로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이라고 천천히 말해보는 이 시의 ‘나’는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를 연상케 한다. 말을 배울 때 우리가 처음 접하는 것은 오로지 재귀적 용법만을 갖는 명사들이다. 그 무엇의 이름도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일 뿐인 말들의 존재를 생각하며 자신의 영혼과 언어의 넋이 서로에게 천천히 스며드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말과 동거하는’ 시인의 숙명이자 환희라고 이 간결한 시는 말해주고 있다. 일상의 언어에 익숙해진 혀를 녹인 이후에 비로소 천천히 입 밖으로 뱉어지는 말들이 모여 비로소 시를 이루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이 시는 몸소 보여주고 있다. <계속>  


조연정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평집 『만짐의 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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