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정 평론가의 <한강 시집> 수록 작품해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조연정 평론가의 <한강 시집> 수록 작품해설
우리에게는 소설가 한강이 인상 깊게 각인되어 있지만 지난 20년 동안 그녀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죽은 나무에 손을 뻗는 글쓰기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1993년에 시인으로 등단한 거의 20년 만에 묶는 첫 시집이다. 한강이 오랫동안 써온 시를 한 편 한 편 읽다 보니 그녀에게 소설보다 시가 먼저 쓰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시가 아주 천천히 쓰일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허리를 접고/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지워진 단어”(「심장이라는 사물」)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한강은 시인이 된 이후부터 줄곧 언어와 한 몸이 되어 언어의 타락을 앓고 있다. 그리고 언어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고통의 시간과 더불어 자신의 영혼이 구원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껏 한강의 소설이 보여주었던 상처받은 영혼들은 침묵에서 진실된 말을 건져 올리려는 시를 쓰는 한강 그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이 시집을 읽으며 하게 되었다. 육체의 고통 속에서도 마치 태양을 쏘아보듯 형형한 눈빛을 드러내 보이던 인물들도, 꿈속의 이미지에 몰입하던 인물들도 모두 시인 한강의 페르소나였을 것이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애초에 그림과 말은 분절되지 않는 침묵의 공간을 그 기원으로 공유하고 있다. 말과 동거하는 인간으로서의 한강은 침묵의 그림을 그리는 시인이자, 그러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소설가이다. 암흑과 침묵 속에서 시를 쓰는 한강이 있고,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소설가 한강이 있다. 한강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그림의 실재가 궁금했던 사람들은 이제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펼치면 된다. 이 시집 안에는 침묵의 그림에 육박하기 위해 피 흘리는 언어들이 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언어의 심장을 뜨겁게 응시하며 영혼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확인하려는 시인이 있다. 뜨겁고도 차가운 한강의 첫 시집은 오로지 인간만이 지닌 ‘언어-영혼’의 소생 가능성을 점검해보는 고통의 시금석인 셈이다. 죽은 나무를 향해 부서진 손을 뻗는 듯한 한강의 고통스러운 글쓰기 작업은 아마 앞으로도 꾸준히 지속될 것이다. “살아 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달의 그림자에 가려 붉은 테두리로만 존재하던 태양이 개기일식이 끝나는 순간 다시금 빛을 내기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는 한강의 더딘 작업 속에서 훼손된 언어와 영혼이 본연의 빛을 되찾는 순간을 분명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이 시집의 마지막 시를 옮겨 적으며 글을 마친다. ▨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저녁의 소묘 5」 전문
조연정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평집 『만짐의 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