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란 《쿨투라》 2024년 11월호(통권 125호)
[한강 작가]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최경란(프랑스어 번역가)
2024년 10월 10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따뜻하게 혹은 뜨겁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최신작 『작별하지 않는다』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던 나 역시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벅찬 감동과 헤아릴 수 없는 고마움에 사로잡혔다. 아름다운 작품들을 우리에게 나누어 준 작가에 대한 고마움, 그의 가치를 알아보았던 스웨덴 한림원에 대한 고마움, 그의 수상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다는 행운을 준 온 세상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한강 작가 작품과의 인연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나는 프랑스의 한 메이저 출판사로부터 『채식주의자』를 검토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이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몇 쪽 읽고 났을 때 정말 엄청난 작품을 내 손에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도저히 독서를 중간에서 중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길로 마지막 쪽까지 주행하고 말았고, 이튿날 바로 편집자에게 나의 감상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출판사가 지향하는 방향과 작품이 다소 거리가 있다는 점 등의 이유로 출판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 소식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바로 나의 공동번역자인 피에르 비지유Pierre Bisiou 씨였는데, 당시 그는 ‘르 세르팡 아 플륌Le Serpent à Plumes’이라는 소규모이지만 문학성만큼은 인정받는 출판사의 편집장이었다. 다른 번역자분의 작업으로 이미 번역이 완성되어 있었던 『채식주의자』는 이렇게 해서 2016년 봄 ‘르 세르팡 아 플륌’에서 출판되었고, 이후 2019년까지 『소년이 온다』, 『희랍어 수업』, 『흰』이 차례로 프랑스 독자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리고 2023년 ‘그라세Grasset’ 출판사가 『작별하지 않는다』를 펴내기로 했을 때는, 어찌 하다 보니 나와 피에르 비지유 씨가 번역을 맡게 되었다. 출판 두 달 후에 메디치상 수상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때 격앙된 마음을 겨우 가라앉힐 즈음에 작가의 노벨상 수상의 소식을 접하고 보니 애써 진정시킨 마음이 다시 요동치는 것 같다.
문학동네 제공
프랑스의 4대 주요 문학상은 공쿠르상, 르노도상, 페미나상, 메디치상으로 알려져 있다. 각국의 문학상이 대개 그러하듯, 공쿠르상과 르노도상은 외국문학상 부문을 두지 않는다. 외국문학의 경우 페미나상과 메디치상의 무게가 강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국내 문학상, 즉 신춘문예나 각 출판사에서 제정한 문학상도 대부분 한국문학만을 대상으로 한다. 차제에 문화강국 대한민국에서도 번역문학상 하나쯤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피에르 비지우. Photo OLIVIER DION
『작별하지 않는다』의 번역과정은 순탄했다. 누구나 그렇듯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능률도 떨어지지만,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행복한 법이다. 좋은 작품을 번역하는 일은 선물과도 같다. 출판 후 여러 곳에서 제주방언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지난 세월의 경험에 따르면, 적어도 프랑스어에서는, 방언에 대해 마음을 접는 것이 현명하다. 몇 년 전, 걸쭉한 부산 사투리로 풀어낸 소설을 번역한 일이 있었다. 정말 아쉬웠지만 눈물을 머금고 마음을 비웠다. 서구의 정서가 애초부터 우리와 다른데, 그 다른 문화 속에서 또 다른 특별한 정체성을 가진 지중해 방언으로 부산 사투리를 덮어쓴다면, 프랑스 독자들은 부산보다는 그들의 남부지방을 떠올릴 것이며, 소설 전체의 균형이 비틀거려 결국 원작의 느낌에서 더 멀어진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때 우리말 방언이 가지는 느낌은 프랑스어의 단어, 구두점, 표현방식 등으로 최대한 구현해야 한다.
그간 번역에 대한 여러가지 질문을 받았지만, 공동번역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이번 기회에 간단히 이야기해 보면, 원어민 번역자 가운데 한국어에 능통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우리 팀의 경우, 나의 공동번역자께서는 한글의 가나다라도 모르신다. 그러나 우리 문학을 번역하는 데에 필수적인 부분, 예컨대 한국의 정서, 우리 사회의 작동방식, 한국인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 등을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감수성을 가졌다.
작품의 번역은 보통 세단계로 이루어진다. 먼저 한국인 번역자가 번역 초안을 작성하면, 다음 단계로 원어민 번역자가 프랑스 독자를 염두에 두면서 초안을 감수하고 교정한다. 마지막으로 이 2차 원고를 두 번역자가 논의하여 원작과 가장 가까운 동시에 현지 독자들에게 문학적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집 짓는 일과 종종 비교하는데, 한국인 번역자가 땅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고 지붕을 올리면, 원어민 번역자가 들어와서 페인트 칠하고 마감장식을 하는 방식이다.
이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양쪽 번역자의 문학적 소양이다. 또 모든 공동작업과 마찬가지로 손발이 맞아야 한다는 것도 중요하다. 보통 한 사람의 번역자가 하나의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프랑스어 번역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공동번역이 거의 주를 이룬다. 번역은 항상 모국어 방향으로 진행되는 법이므로, 재능 있는 젊은 프랑스 번역자들이 앞으로 많이 나오기를 고대해본다.
두서 없는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작별하지 않는다』의 번역 초안에 몰입했던 두 달 간의 시간이 떠오른다. 주인공 경하가 친구 인선의 제주집에 도착했을 때, 마치 평행우주 속으로 들어서듯 과거의 아픈 기억과 대면한 것처럼, 이 기간 동안 나 역시 작품의 세계라는 하나의 평행우주 속으로 빠져든 것 같았다. 작업하는 동안 약간 멍한 상태로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시간은 춥고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한없이 가볍고 부드러운 눈송이와 새들 그리고 시와 아름다움 속에 몸을 맡긴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번역을 하는 동안에는 문장 하나하나에 천착한다. 토씨와 문장부호까지 눈을 부릅뜨고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하게 되는데, 이럴 때면 처음 작품을 일독했을 때와는 달리 미세한 냄새나 온도, 공기의 떨림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소설 속에는 병상에 누운 인선이 창밖에 내리는 눈을 보며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게 내려오지”라고 독백하는 장면이 있다. 번역 초안을 마친 후에 나는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지”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데에 대해, 그리고 노벨상이라는 최고의 영예로 우리 문학의 길을 보다 넓게 내주신 것에 대해서 한강 작가님께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하고 싶다.
최경란 프랑스어 번역가, 주프랑스한국문화원 팀장. 연세대학교 불문과 졸업를 졸업하고 파리10대학 언어학과와 동대학원 석사 과정 및 DEA 과정을 마침. 주요 번역서로 정유정의 『종의 기원』(2018),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2019),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2020),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2023),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2024) 등이 있음. 그가 번역한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메디치 외국문학상(2023),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2024) 등을 수상.
*《쿨투라》 2024년 11월호(통권 125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