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정 평론가의 <한강 시집> 수록 작품해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조연정 평론가의 <한강 시집> 수록 작품해설
우리에게는 소설가 한강이 인상 깊게 각인되어 있지만 지난 20년 동안 그녀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말과 동거하는 시인
막스 피카르트¹의 철학 에세이 『인간과 말』²(봄날의 책, 2013)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소개한 소설가 배수아는 이 진지한 산문집이 “말과 동거하는 인간”을 위한 책이자 결국 ”글을 쓰는 인간, 곧 작가의 영혼을 위한 책“(p.246)일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란 누구인가. 일상적 소통을 위해서든 심오한 진리의 전달을 위해서든 모든 인간이 점차 기능적으로 완벽한 말만을 추구해갈 때, 말의 효용성에 무심한 채 그 효용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자가 바로 작가이다. 시대의 변화와 가장 무관한 장르로 생각해온 문학조차 점차 장르 자체의 고유성을 잃어가고 문학 종사자들의 수도 줄고 있기는 하지만, 될 수 있는 한 언어를 비효율적으로 다루려는 문학적 행위와 관련된 인간의 욕망은 결코 줄거나 퇴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사실은 말과 관련된 인간의 능력과 욕망이 대체 불가의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인간이 지닌 다양한 능력을 완벽하게 대체하고 그것을 멋지게 초과하는 다양한 매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능력만큼은 그 대체물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내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말한다. 침묵하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상대로 말하고 있으며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마치 무성영화처럼 펼쳐지는 꿈속에서 말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음’과 더불어 놀라운 사유를 창조해내고, ’말할 수 없음‘과 더불어 언어 너머 심연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한다. 인간의 조그만 육체 안에는 이처럼 엄청난 말이 존재한다. 우리가 실제로 감지하는 말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말에 비하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처럼 기능적인 것으로 퇴화한 언어를 붙잡고 그로부터 진리를 발견하려는 자이다. 막스 피카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한 언어는 시인에게 ”커다란 유혹이자 동시에 위험“(p.225)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을 그 원천으로부터 새롭게 퍼 올리는 작업은 유혹적이지만, 시인은 말과 더불어 자기 안의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막스 피카르트는 이렇게 덧붙인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심연을 잠재우고, 심연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같은 곳). 시를 쓴다는 것은 심연을 열어젖히는 행위인 동시에 심연을 메우는 행위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같은 유혹과 불안 사이에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어느 정도는 언어를 결코 수단화하지 않고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점에서 저 유혹과 불안에 훨씬 더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자이다.
시인 한강의 첫 시집을 읽는 자리에서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능력과 욕망에 대해, 그리고 말과 더불어 시인이 경험하는 환희와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왜일까. 에둘러 가보자. 한강은 이제껏 여덟 권의 책을 출간한 등단 20년 차의 소설가이다. 물론 그녀가 소설가로 등단하기 한 해 전에 이미 시인으로서 문단에 출사표를 던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는 소설가 한강이 인상 깊게 각인되어 있지만 지난 20년 동안 그녀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늦게나마 그간의 작업을 정리하면서 새삼 시인으로서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로지 시인으로서 한강을 읽어야 하는 자리지만 소설가 한강을 완전히 지우고 그녀의 시를 읽어내는 일은 불가능할 테니 그녀의 소설 작업을 잠시 되짚어보는 것도 좋겠다. 주로 인간 삶의 진실과 관련하여 언제나 근본적인 질문을 제출하곤 했던 한강의 소설을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녀의 소설에 어김없이 고통받는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분명한 사실은 재차 강조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인물들이나 그러한 인물들을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작가에게서 어떤 결기가 감지될 정도로 한강의 인물들은 일상의 건강한 삶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생리적 예민함을 드러냄으로써 일상적 세계에 대한 부적응을 증명하는 인물로부터, 급기야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파괴하면서까지 이 세계에 대한 전면적이고도 강력한 거절의 의지를 드러내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이제껏 한강의 인물이 보여준 고통의 양상들로 날로 진화해왔다. 그뿐만 아니라 한강은 그 고통의 기원으로부터 구체적이고도 특별한 불행들을 점차 소거해왔다. 고통의 기원을 텅 빈 자리로 남겨놓음으로써 한강 소설은 인간에 관한 더욱 근본적인 질문에 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저 인간에 대해 쓰고 있다“(강지희, 「[작가 인터뷰] 고통으로 ’빛의 지문(指紋)‘을 찍는 작가」, 『작가세계』 2011년 봄호)라고 말한 그녀가 고통받는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인간의 진실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고통이 아니었을까.
인간에 대한 탐색은 언어에 대한 탐색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지어주는 유일한 종차³가 바로 언어라는 당연한 사실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모든 특징이 이 언어에서 파생된다. 그런 점에서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가 등장하는 한강의 근작 장편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2)은 한강의 글쓰기가 인간과 언어에 대한 본격적 탐색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한 예로써 중요하다. 그간 한강 소설이 제기해온 여러 질문이 이 소설에 이르러 비로소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고통에 관한 것으로 압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력을 잃고 있는 남자는 눈앞의 모든 이미지를 상실한 채 관념의 세계로 진입하기 직전이다. 이미지 없는 관념의 세계는 온전히 말로만 이루어진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말을 잃은 여자는, 정확히 말해 모국어로 말할 수 없게 된 여자는 침묵의 세계 안에 있다. 이처럼 이미지와 소리를 상실한 남자와 여자는 암흑과 침묵 속에서 언어 그 자체와 투명하게 대면한다. 이들이 지닌 언어는 각각 한가지의 물질성을 상실했다는 한계로 인하여 오히려 더 순수한 것으로 거듭난다. “심해의 숲”이라는 제목 아래 쓰인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은 흡사 ”빛도 소리도“(p.185) 없는 곳으로부터 인간이 최초로 말을 길어 올리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희랍어 시간』은 타락한 언어의 한계보다는 순수한 언어의 능력에 집중하는 소설인 셈이다.
한강의 감각적인 문장이나 그녀가 그려내는 강렬한 이미지에 매혹된 우리는 그녀의 소설에 언제나 시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왔다. 그녀의 소설이 시적이라는 사실은 전적으로 옳다. 물론 이때 ’시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언어를 통해 다양한 감각을 재현하는 것만을 가리켜 시적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강의 소설이 시적이라면 그것은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해야 한다. 시의 언어보다 순수하지 못한 소설의 언어로 이미 시적인 것의 본질을 관통해버린 한강은 과연 어떤 시인일까. 그녀의 첫 시집을 읽어보자. <계속>
[옮긴이 註]
1)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 1888년 6월 5일 독일 바덴 쇼프하임 출생, 1965년 10월 3일 스위스 소렌고 사망)는 스위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이며, 20세기에 철저히 플라톤적 감성으로 글을 쓰는 소수의 사상가 중 중요한 인물이었다.
스위스 국경 독일 마을 쇼프하임(Schopfheim)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막스 피카르트는 의학을 공부했고 1911년에 의학 학위를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이후에는 뮌헨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당시 의학계의 실증주의적, 다윈주의적 성향이 불만족스러웠던 그는 1915년부터 의학계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여 철학 쪽으로 관심사를 돌렸다. 1919년에 그는 스위스 로카르노로 이주했으며, 이후 브리사고로 이주했다.
1929년에 그는 저서 Das Menschengesicht(인간의 얼굴)을 완성했다. 1934년에는 Die Flucht vor Gott (신으로부터의 도피)가 출판되었다. 그는 1930년대 후반에 동료 이민자이자 예술가인 Gunter Böhmer와 친분을 쌓았다. 1939년에 피카르트는 젊은 시절 믿었던 유대교에서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1947년에 그는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을 처음 만났고, 평생 우정을 쌓고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마르셀은 1953년 피카르트의 Die Welt des Schweigens(침묵의 세계)의 첫 프랑스어 번역본 서문을 썼다. 피카르트는 1952년에 요한-페터-헤벨 상을 받았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1976년 자신의 컬렉션 Noms propres(Proper Names)에서 Picard의 작품을 칭찬했다.
2) 막스 피카르트가 전하는 인간과 말의 ‘명상록’ by 이완재 기자 <토요경제> 2013. 7. 5
『침묵의 세계』가 '침묵'에 관한 성전이라면,
『인간과 말』은 '말(wort)'에 관한 성전이다!
『인간과 말』은 말과 언어, 그리고 인간에 관한 매우 아름다우며 시적인 운율을 가진 명상록이다. 말을 중심으로 말과 소리, 말과 빛, 말과 진리, 말과 결정, 말과 사물, 말과 행위, 말의 시간과 공간, 말과 인간의 형상, 말과 목소리, 그림과 말, 말과 시의 관계를 깊이 들여다본다. 또한, 말이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 그리고 말이 탄생하는 순간에 펼쳐진 세계를 깊이 응시하고 그것이 빛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여 인간과 말의 관계를 관조한다. 독자들은 말의 껍질이 벗겨지고 말이 원래 지니고 있던 빛이 드러나면서 언어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놀라운 세계를 경험할 것이다.
『인간과 말』은 제목에서 연상되는, 언어에 관한 책이 아니다. 또 비트겐슈타인 유(類의) 철학책도 아니다. 저자가 관찰하는 언어는 언어학과는 관련이 없고, 철학적인 문구들도 사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나 전문용어에 크게 의존하고 있지 않다. 이 책은 언어로 함축된 해방의 모든 몸짓이며 진지함에 관한 책이다. 그것도 파편이 아니라 온전한 전체성으로서의 진지함을 말한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인간의 육체, 인간의 얼굴, 이미지와 회화와 같은 시각적 요소들이, 대개의 경우 철학자의 주된 관심사에서 밀려나기 마련인 것들이, 말에 대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피카르트는 인간의 육체를 정신의 산물, 말의 산물로 보았다. 그러므로 말이 우리를 보게 하며, 보이게 한다. 또 그는 우리 현대인이 그동안 거의 자명한 것으로 여겨왔던 현대적인 가치들, 즉 실존주의, 개인, 주관, 정신분석, 감성 등을 비판한다.
3) 종차(種差)는 논리학에서 상위개념에 같이 속하고 있는 하위개념들 중 어떤 하위개념이 다른 하위개념과 구별되는 요소이다. 이를테면 동물에 속하는 사람이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이성적이며 언어를 가졌다는 차이 따위이다. 일반적으로 개념 또는 명사를 정의하는 데 사용된다.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평집 『만짐의 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