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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by 김양훈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우리가 처음 쓴 새롭고 예상치 못한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직 우리만이 이 시대의 얼굴이다. 시간의 뿔피리는 우리를 통해 언어 예술 속에서 울려 퍼진다.


과거는 갑갑하다. 아카데미와 푸시킨은 상형 문자보다 더 이해하기 힘들다.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을 현대라는 기선에서 던져버려라.

자신의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지막 사랑을 알지 못할 것이다.¹ 대체 누가 자신의 마지막 사랑을 발몬트²의 향수 냄새 풍기는 음란함에 바치겠는가? 그것이 오늘날 강직한 영혼의 반영이란 말인가?

대체 어떤 무기력한 자가 용사 브류소프³의 검은 연미복에서 종이 갑옷을 찢어내는 것을 두려워할까? 혹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새벽 노을이 그것에서 빛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셀 수도 없이 많은 레오니드 안드레예프⁴들이 쓴 책들의 더러운 점액이 묻은 당신들의 두 손을 씻어라.

막심 고리키,⁵ 쿠프린,⁶ 블로크,⁷ 솔로구프,⁸ 레미조프,⁹ 아베르첸코,¹⁰ 초르니,¹¹ 쿠즈민,¹² 부닌,¹³ 등 이 모든 이들에게는 오직 강변의 별장만이 필요할 뿐이다. 운명은 재봉사에게 그런 상을 준다.


우리는 마천루의 높이에 올라 보잘것없는 그들을 내려다본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인의 권리를 존중해줄 것을 명령한다.

1. 독단적이고 자유로운 파생어로 시인 자신의 어휘 범위를 확장시킬 권리(새로운 말).

2. 그들 시대 이전까지 존재해온 언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증오의 권리.

3. 당신들이 목욕탕 회초리로 만든 보잘것없는 명예의 화관을 자신의 오만한 이마에서 혐오스럽게 떼어내 버릴 권리.


4. 비난과 분노의 바다 한가운데서 “우리”라는 말의 바윗덩어리 위에 서 있을 권리.

그리고 만일 당분간 우리와 문장 속에 당신들의 “상식”과 “좋은 취향”의 더러운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자기 충족 적인(자족적인) 말의 새롭고 아름다운 미래의 여름 번갯불과 함께 가장 먼저 명멸할 것이다.

다비드 부를류크,¹⁴ 알렉산드르 크루초니흐,¹⁵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빅토르 흘레브니코프¹⁶

(옮긴이 김성일)


[옮긴이 註]

1) (原註) “첫사랑처럼 러시아의 가슴은 너를 잊지 못할 것이다”(1837년 1월 29일)라는 푸시킨에 관한 튜체프의 시 한 구절을 염두에 두고 썼다.


2) 발몬트(1867~1943)는 20세기 초 십 년 동안 러시아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상징주의 시인이다. 10월 혁명 후 파리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3) 브류소프(1873~1924)는 시인, 학자, 상징주의 운동의 지도자다. 《러시아 사상》의 문학 편집인이었고, 10월 혁명 후 소비에트 정권을 받아들였다.


4) 레오니드 안드레예프(1871~1919)는 단편 소설 및 희곡 작가다. 초기에는 리얼리즘 성격의 작품으로 시작했으나, 후기에는 형이상학적 또는 상징주의적 경향에 관심을 기울였다.

5) 막심 고리키(1868~1936, 본명은 알렉세이 페시코프)는 대표적인 소비에트 작가로 최초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 《어머니》를 썼으며, 훗날 소비에트 작가 동맹 의장을 지냈다.


6) 쿠프린(1870~1938)은 러시아 소설가로 10월 혁명 후 망명했다가 훗날 되돌아왔다.

7) 블로크(1880~1921)는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상징주의 시인이다. 그의 초기 시는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주제에의 관심을 보여준다.


8) 솔로구프(1863~1927, 본명은 표도르 테테그니코프)는 러시아 상징주의의 첫 번째 시기에 속하는 데카당 시인으로, 소설 《작은 악마》(1907)로 오랫동안 명성이 높았다.

9) 레미조프(1877~1957)는 매우 뛰어난 다작의 산문 작가다. 고골과 도스토옙스키의 전통을 이어받은 독창적인 문장가다.


10) 아베르첸코(1881~1925)는 인기 있는 유머 작가다.


11) 초르니(1880~1932, 본명은 알렉산드르 글린베르그)는 풍자 소설 및 단편 소설 작가다. 아동 문학으로도 유명하다.


12) 쿠즈민(1875~1936)은 최초의 후기 상징주의 시인으로 스타일의 명료성을 주장했다.

13) 부닌(1870~1953)은 러시아 사실주의 경향의 작가로 1933년 러시아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4) 다비드 부를류크(1882~1967)는 시인, 예술가다. 러시아 미래주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이다.

15) 알렉산드르 크루초니후(1886~1968)는 시인, 미래주의 이론가다(알렉산드르는 필명이며, 본명은 알렉세이다).


16) 빅토르 흘레브니코프(1885~1922)는 시인이다. 미래주의 경향의 실험적 시를 썼다.


1930년 4월 14일 혁명의 상징이었던 시인, 권총으로 자신의 심장을 쏘다


모든 것은 죽어 없어지리라.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리라.

생명을

주관하는 자는

암흑의 혹성 저 너머로

마지막 태양의

마지막 빛까지도 불사르리라.

오직

나의 고통만이

더욱 가혹하다

나는 서 있다,

불 속에 휘감긴 채로,

상상도 못 할 사랑의

끌 수 없는 커다란 불길 위에.


-마야콥스키가 1917년에 쓴 장시 <인간>에서


1930년 4월 14일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의 모스크바. 그달 초순에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이제는 날씨가 한결 따뜻해져 사람들의 옷차림도 화사해졌다. “탕!” 그런데 어디선가 화사한 옷차림을 어지럽게 만들어버리는 한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정부 출판국 사무실 근처의 작은 방에서 난 소리였다. 그 방문을 나와 걷던 여자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곧 그 작은 방에서 일어난 비극이 사방에 알려졌다. 당시 러시아를 대표하는 혁명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가 자신의 심장을 향해 권총을 쏜 것이었다. 그의 책상에는 이틀 전에 쓴 유서가 놓여있었다.


유명한 혁명시인이자 전위예술가였던 한 시인의 죽음


여러분 모두에게


나의 죽음에 대해서 그 누구도 탓하지 마오. 그리고 이야깃거리로도 만들지 말아 주오. 죽은 자는 가십을 싫어하오.

어머니, 누이, 동지들이여, 나를 용서하오. 이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러분에게는 이 방법을 권하고 싶지 않소) 나로서는 다른 출구가 없었소.


릴리, 나를 사랑해주오.


정부 동지들, 릴리 브릭과 어머니, 누이들, 그리고 베로니카 비톨도프나 폴로스카야가 나의 가족이오.

이들에게 윤택한 생활을 보장한다면 고맙겠소.

완성하지 못한 시는 브릭 부부에게 주시오.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오.

그들 말대로, “사건은 끝났소.”


사랑의 배가

나날에 부딪쳐 부서졌다.

삶과 나는 이해도 득실도 없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와 아픔과 멸시를 일일이 헤아려도

승부의 득점은 없구나.


그대들 모두에게 최고의 행운이 깃들기를!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4/12/30

어린 시절의 마야콥스키(가운데)와 가족

외모처럼 단단하고 강력하고 단호하고 가차 없었던 혁명 시인의 최후는 이처럼 허무했다. 아니 그의 죽음도 그의 시처럼 강력하고 단호하고 가차 없었다. 36년 동안 그는 짧았지만, 누구보다도 굵게 살았다. 십 대 때부터 혁명의 대열에 뛰어들어 갖은 풍파를 겪어야 했고, 많은 시와 희곡을 썼으며, 세상을 뒤흔든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파격적이고 정열적인 사랑의 폭풍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만년에 자기 뜻을 알아주지 않는 정부와 문단과 대중들이 야속했지만, 그는 목숨을 스스로 정리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의 표정은 지극히 편안하여, 고통 속에서 삶을 끝낸 사람이 아니라 멀리 설레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것과 같았다.


대중들의 의지를 고양시킬 선전 선동 시를 쓴 것으로 유명한 혁명 시인 마야콥스키는 또한 전위예술의 최전선에 있었다. 전위예술이 대체로 난해한 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내야 할 선전·선동에 전위예술가가 참여했다는 것은 자못 흥미롭다. 그런 시 세계처럼 그의 삶도 아이러니하다.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첫째, 그는 어떻게 혁명 시인 이 되었을까? 둘째, 그의 연인은 릴리 브릭인데, 어떻게 그녀의 남편 오십 브릭과 친구가 되어 함께 살게 되었는가? 셋째, 그는 왜 자살했는가?

열여섯 살에 감옥에서 보낸 11개월은 혁명 시인의 자양분이었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의 어린 시절은 그가 왜 혁명가가 되었고, 또 전위적인 시인이 되었는지를 자연스럽게 설명해준다. 마야콥스키는 1893년 7월 19일 조지아(그루지야)의 바그다디(지금은 그의 이름을 따서 ‘마야콥스키’로 바뀌었다)에서 태어났다. 산림 감독관이었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말에 태우고 숲으로 갈 때가 많았는데, 이는 어린 마야콥스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산악 지대에서 자연과 함께 보냈던 어린 시절이 오히려 그에게 도시를 동경하게 했는지 모른다. 그는 사춘기가 되자마자 도시인이 되어갔고, 시인이 된 후에도 자연을 노래한 일은 거의 없었다.

마야콥스키가 노동자들에게 파업에 참여하라고 독려하기 위해 만든 포스터

마야콥스키 가족은 러시아인이었는데, 바그다디 지역에는 주로 조지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마야콥스키가 일곱 살이 되자 그의 부모는 자식을 러시아어로 교육하기 위해 군청 소재지인 쿠타이시로 이사했다. 1902년에 김나지움에 들어가게 되는데, 마야콥스키는 자서전에 입학시험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했다. 면접관이 “오코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마야콥스키는 조지아어로 착각하여 “3파운드”라고 대답했다. 면접관은 친절하게 고대 슬라브 교회 말로 ‘눈’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것 때문에 그는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고, 그때부터 그는 오래된 것과 교회와 관계된 것과 슬라브적인 것은 무엇이나 다 증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아마도 자신이 미래주의와 무신론과 세계주의를 동경하게 된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는 큰누나의 영향으로 정치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방학 때마다 누나가 가져온 차르 체제에 반대하는 유인물은 마야콥스키가 보기에 ‘혁명’이었고 ‘시’였다. 소년 시절부터 그의 가슴속에서 혁명과 시가 하나로 녹아들게 된 이유였다.

1906년 아버지가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은 빈털터리가 되어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어머니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치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하숙생 중 한 명이 볼셰비키여서인지, 열다섯 살의 마야콥스키는 노동당원이 되었다. 마야콥스키는 선전원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처음으로 경찰에 체포된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금방 풀려나긴 했지만, 이듬해에 체포되었을 때에는 독방에서 11개월이나 보내야 했다. 청소년 시절에 이런 고초를 겪으면 기가 꺾이게 마련이지만, 이 맹랑한 소년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독방 생활이 자신에게 대단히 소중한 체험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독방에서 동시대 작가들의 글을 끊임없이 읽었으며, 꾸준히 시를 썼다. 시는 간수에게 압수당했지만, 감옥에서의 시 창작이 좋은 수련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혁명 시인은 자연스럽게 역사 속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고 외친 러시아 미래주의 선언


마야콥스키는 석방된 뒤 모스크바 미술학교에 다녔는데, 거기서 중요한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보다 열 살이나 많은 학생 중에 미래파 화가 다비드 브를류크가 있었다. 단 한 편의 시를 읽고 부를류크는 마야콥스키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부를류크는 마야콥스키를 “나의 훌륭한 친구이자 천재시인”이라고 소개했다. 마야콥스키가 “왜 나를 천재 시인이라고 소개했느냐”고 항변하자 부를류크가 소리쳤다. “그러니까 너는 써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나까지 바보가 되는 거야, 알지?” 이렇게 마야콥스키는 시를 써야 하는 운명에 접근해가고 있었다. 그것도 미래파 시인으로서 말이다.


1912년 12월 마야콥스키는 부를류크가 작성한 그 유명한 미래주의 선언문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에 서명한다. 모범적인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모든 과거의 전통을 과감하게 깨부수자는 과격한 선언이었다. “과거는 갑갑하다. 아카데미와 푸슈킨은 상형문자보다 더 이해하기 힘들다. 푸슈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을 현대라는 기선에서 던져버려라.” 전통을 깨부수자는 것은 1909년의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의 미래파와 상통하지만,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옹호한 마리네티의 미래파와 차르 체제에 반대한 러시아 미래파는 엄연히 달랐다. 이들의 선언문은 같은 제목의 사화집에 실렸는데, 그 사화집에 시 <밤>과 <아침>을 발표함으로써 마야콥스키는 대중 앞에 서게 된다.

모스크바의 마야콥스키 도서관 입구

이후 마야콥스키의 문학적 행보는 참으로 눈부셨다. 그의 시는 자기주장이 매우 강하고 도전적이었으며, 자아에 대한 과도한 긍정과 더불어 대상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표출했다. 1913년 첫 시집 <나>를 시작으로, 1915년에는 장시 <바지를 입은 구름>과 <등골의 플루트>를 발표함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나자, 온몸으로 혁명 정신이 차올랐던 마야콥스키는 그야말로 물을 만난 물고기였다. <혁명 송시>(1918), <좌익의 행진>(1919)은 대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시였다. 1924년 레닌의 죽음을 추모하는 장시를 써내기도 했다. 이런 시들이 또한 미래파의 전위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다소 기이하게 보일 수 있다.


릴리 브릭, 오십 브릭과의 독특한 삼각관계, 그리고 즉흥적이고 열정적인 사랑
릴리 브릭과 마야콥스키

시에 열정적이었듯이, 마야콥스키는 여인에 대해서도 열정적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연인은 릴리 브릭, 마야콥스키가 존경하는 문학평론가 오십 브릭의 부인이었다. 1915년 7월 15일 브릭 부부와 릴리의 여동생 엘자 트리올레가 함께한 자리에서 마야콥스키는 자신의 장시 <바지를 입은 구름>을 낭송했다. 이 시를 들은 이들은 모두 그의 팬이 되었고, 특히 릴리는 그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릴리는 마야콥스키와 깊은 관계까지 발전하게 되자 이를 남편에게 고백했다. 이미 마야콥스키의 후원자가 된 오십은 릴리에게 “우리는 절대로 헤어져서는 안되오”라고 말하며 아예 셋이서 함께 살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하여 세 사람의 기이한 동거가 시작되었고, 브릭의 아파트는 미래파 예술가들의 문학살롱이 되었다.


마야콥스키가 성년이 되어 줄기차게 사랑했던 여인은 릴리 브릭이었지만, 다른 여인들에게도 정염을 바치곤 했다. 특히 프랑스에서 만난 타티야나 야코블레바와의 사랑은 가슴 아프다. 마야콥스키는 문학으로 성공한 후 여러 나라를 여행한다. 어린 시절부터 러시아적인 것을 싫어해서, 외국 여행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접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독일, 폴란드, 체코, 프랑스 등 유럽은 물론 미국과 멕시코에도 다녀왔다. 1928년 프랑스에서 엘자 트리올레를 통해 타티야나를 만나게 되는데, 마야콥스키는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대와 나는 / 모스크바에서 필요한 사람, / 거기엔 다리가 긴 사람이 / 부족하오”라고 쓴 시 <편지>는 타티야나를 언젠가는 러시아로 데려가겠다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시이다. 이듬해 4월 마야콥스키는 파리에 다시 와서 타티야나로부터 10월에 결혼할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마야콥스키가 신청한 비자가 거절당했고, 그것으로 둘의 혼인은 물거품이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타티야나는 어느 자작과 결혼했다.

마이코프스키는 외모처럼 단단하고, 강력하고, 단호하고, 가차 없었다.

마야콥스키는 왜 이토록 여러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일까? 타티야나와 혼인하기로 한동안에도 그는 노라 폴론스카야라는 젊은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다. 가치관에 따라 달리 볼 수 있겠지만, 마야콥스키의 애정행각을 무조건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의 사랑이야말로 진정으로 순수한 것이었다. 그는 계산하지 않았으며,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열정에 충실할 수 있었다. 열정적이고 즉흥적인 그의 문학세계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의 작품이 의도적인 실험이 아니듯이, 그의 여성관계도 의도적이었다기보다는 몸과 마음의 실존적인 요구에 충실한 결과였다. 전통을 부정하였듯이 이성에 의한 통제를 부정하고 감각에 충실한 것 또한 마야콥스키에게는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관료화된 소련 정부를 비판하는 쪽에 선 시인, 정부에 가까운 작가들과도 갈등 빚어


마야콥스키의 시는 점점 무르익어갔지만, 소비에트 공산주의 정부와는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신경제정책과 함께 등장한 소부르주아 세력과 관료주의는 혁명의 순수성이 변질된 것이었다. 그의 의식은 엄밀히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통제된 사회와는 맞지 않았다. 그가 누구보다도 자아를 중시하는 사람이었음은 첫 시집 제목이 <나>였다는 것만으로도 증명된다. 그의 문학 속에도 암암리에 관료화된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가 엿보였으며, 개인주의적인 성향 또한 스며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새로운 정부의 적이 될 수는 없었다. 마야콥스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정부도 그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결국, 정부의 억압적인 정치 경향을 꼬집은 연극 <목욕탕>이 참담하게 실패하면서 마야콥스키의 절망감은 극에 달하게 된다. 1930년 2월 1일, 마야콥스키는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 건물에서 ‘작품 20년’ 전시회를 열었는데, 여기에서도 정부 편 작가들은 몰려드는 학생들을 돌려보냈다. 러시아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RAPP)에 가입하여 신뢰 회복을 꿈꾸어보았지만, 괴리감만 더 커졌다. 마야콥스키의 고독은 깊어만 갔다. 사랑도 사라지고 자신의 시도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는 절망 속에서 <목청을 다하여>라는 시를 썼다.


선전과 선동이, 내 마음에도 역시 걸렸다,

차라리 난 당신들을 위해서 로맨스를 쓰고 싶었다

좀 더 이롭고 좀 더 매력 있는.

그러나 나는 나를 억누르고

내 노래의 목청을 짓밟았다.

나의 시는 그대들에게 가리라,

모든 시대의 절정을 뛰어넘어.

그리고 시인과 정부를 앞질러...


<목청을 다하여>에서 (신동란 역)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에 있는 마야콥스키의 무덤

1930년 3월 마야콥스키는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다. 마야콥스키는 다시 일에 파묻혔지만, 자신의 운명 전체를 감싸 안은 듯한 절망감은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1930년 4월 14일, 여배우 노라 폴론스카야가 나간 직후 마야콥스키는 서랍에서 권총을 꺼냈다. 혁명에 정열을 바쳤지만, 정작 혁명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는 그 혁명세력 때문에 마야콥스키는 결국 죽음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가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험난한 행로가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마야콥스키를 각별히 사랑했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혁명에 대해 비판적인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대숙청 기간에 전전긍긍했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마야콥스키는 근본적으로 봉건적 왕정을 타파하는 것을 열광적으로 환호했지만, 그는 사실상 어떤 절대주의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꿈이 더는 나아갈 길이 없다고 느꼈을 때 자신의 시처럼 단호했다. 그것 또한 충동적인 몸과 마음의 요구에 따른 결과였다. 그의 몸은 순간적으로 사라졌지만, 그러나 그의 시는 여전히 많은 사람의 가슴에 망치질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 시인의 압운은 / 애무이자 / 슬로건이자 / 칼이자 / 채찍”(<재무 감독관과의 시에 관한 대화>)이기 때문일까?

-러시아의 혁명 시인 (인물 세계사, 차창룡)


[네이버 지식백과] 마야콥스키(Vladimir Vladimirovich Mayakov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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