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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Nov 22. 2023

책 속에 숨은 한마디-나의 쇄신

『루쉰(魯迅)전집2』中, 작은 사건(一件小事)

고향을 떠나 경성 베이징으로 온 지가 어언 6년이다. 그간 귀로 듣고 눈으로 목도한 국가 대사가 적지 않건만, 따져 보니 내 맘속에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일들이 내게 미친 영향을 굳이 찾자면 내 성깔을 더 사납게 만든 일 외엔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남을 무시하는 태도가 나날이 더해 갔던 것이다.


하지만 자그만 사건 하나는 의미가 적지 않다. 그 사건이 나를 나쁜 성벽(性癖)에서 끌어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것이다.


민국(民國) 6년 겨울, 북풍이 한창 용맹을 떨치던 날이었다. 나는 생계 때문에 일찌감치 거리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리엔 거의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간신히 인력거 한 대를 붙들어 S문으로 가자고 했다. 얼마 뒤 바람이 잦아들자 먼지가 씻겨 나간 거리로 깔끔한 대로(大路) 하나가 드러났다. 인력거꾼의 발걸음도 한층 경쾌해졌다. S문에 거의 도착할 무렵, 갑자기 누군가가 인력거 채에 걸려 비틀거리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이는 어떤 여인으로 희끗한 머리에 몹시 남루한 옷차림이었다. 인력거 앞을 불쑥 가로질러 대로를 건너려던 모양이었다. 인력거꾼이 길을 비키긴 했지만, 단추가 안 채워진 낡은 저고리가 바람에 펄럭이면서 인력거 채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인력거꾼이 급정거를 했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곤두박질쳐 머리에 피를 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엎어지자 인력거꾼도 발걸음을 멈췄다. 내 딴엔 상처가 대수롭지 않고 본 사람도 없는데 괜히 일을 번거롭게 만든다고 여겼다. 시비가 인다면 내 일정을 그르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그에게 일렀다. “별일 아니니 어서 가세”


인력거꾼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어쩌면 못 들었는지도-채를 내려놓은 뒤 팔을 부축하며 천천히 노파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신지?”

“나자빠졌잖여!”


나는 생각했다. 비실거리다 넘어지는 걸 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어떻게 나자빠질 수가 있단말이지? 허풍 하고는 정말 가증스럽구만. 인력거꾼도 그렇지. 쓸데없이 일을 만들어 스스로 욕을 보겠다는 거야 뭐야. 이제 자네가 알아서 해.


노파의 대답에 인력거꾼은 주저하지 않고 팔을 부축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향했다. 좀 의아한 생각이 들어 얼른 앞쪽을 보았더니 주재소 하나가 있었다. 큰바람이 지나간 뒤라 바깥엔 아무도 없었다. 노파를 부축해서 가고 있는 곳이 바로 그 주재소였던 것이다.


이때 돌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그의 뒷모습이 순식간에 거대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갈수록 점점 커져 우러러봐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나에 대해서도 점점 위압적인 존재로 변해 가죽 두루마기 안에 감추어진 내 ‘소아(小我)’를 쥐어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삶의 활력이 이 순간 엉겨 붙어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다. 주재소에서 순경 하나가 나오는 걸 보고서야 겨우 인력거에서 내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순경이 다가와 내게 말했다 “다른 인력거를 잡으슈. 저 친구 선생 태우긴 글렀수다.”


나는 깊이 생각해 볼 겨를 도 없이 외투에서 동전 한 줌을 꺼내 순경에게 건넸다. “이걸 좀 그 사람한테...”


바람은 완전히 멎었고 길은 여전히 정적이었다. 걸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되면 어떡하지? 아까 일은 잠시 접어 둔다 해도 한 줌 동전은 또 무슨 의미였을까? 그를 치하하려고? 내가 그를 심판할 수 있을까? 나는 나에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일은 지금도 종종 기억이 난다. 그래서 종종 고통을 참으며 나 자신을 돌이켜 보려고 노력한다. 지난 몇 년 동안의 문치(文治)와 무력(武力)은 한 구절도 머리에 남아 있지 않다. 어릴 적 읽은 ‘공자 왈,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처럼 말이다. 그런데 유독 이 자그마한 사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면서 더욱 또렷해지곤 한다. 나를 부끄럽게 하고, 나의 쇄신을 촉구하고, 내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면서. 1920년 7월. 『루쉰(魯迅)전집2』 中, <작은 사건(一件小事)> 전문 p7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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