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분신』의 마지막 장면
지난번 우리의 주인공 골랴드낀 씨는 끌라라 올수피예브나 생일파티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그에 더해 망상적인 이상한 행동을 보인 탓에 그는 무도회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다시 찾아온 올스피 이바오비치 집 마당에는 무단칩입자에 대한 몇 가지 방비책이 취해진 상황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골랴드낀 씨는 이번에도 망상을 품게 되는데, 그가 사모하는 이 집의 고명딸 끌라라 올수피예브나가 자신에게 약속된 신호를 보내리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사람들 몰래 그 집 마당에 숨어서 신호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게 이 소설의 마지막 13장은 시작된다.
날씨가 좋아지려는가 싶었다. 지금껏 먹구름이 펑펑 쏟아내던 눅눅한 눈은 정말로 드문드문 내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말짱하게 그쳤다.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별들이 빛을 발했다. 다만 길은 여전히 질척거리고 더럽고 대기는 축축하고 답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든 골랴드낀 씨에겐 더욱 그랬다. 흠뻑 젖어서 무거워진 외투는 눅눅한 온기와 무게를 전하며 그의 사지를 기분 나쁘게 휘감았고, 그렇지 않아도 완전히 힘이 빠져버린 그의 다리를 휙휙 꺾고 있었다. 열병과도 같은 오한이 그의 온몸을 타고 흐르며 따끔따끔 자극적인 소름으로 변해 돋아나고 있었다. 그는 기진맥진해서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그래서 골랴드낀 씨는 단호하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그건 말이지, 어쩌면, 어떤 식으로든 말이야, 아마도, 확실히, 한순간에 모두 잘 해결될 거야’라는 식의 말, 즉 늘상 하기 좋아하던 말을 이런 순간 할 법한데도 그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뭐, 아직은 괜찮아.’ 물이 고여 있다 못해 흐를 정도로 흠씬 젖은 모자의 둥근 테에서는 그의 얼굴 이쪽저쪽으로 차가운 물방울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훔쳐내며 우리의 주인공은 굽힐 줄 모르는 굳은 정신력으로 아직은 괜찮다고 덧붙였고, 올스피 이바노비치 집 마당의 장작더미 옆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꽤 굵은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스페인풍의 세레나데나 비단이 깔린 계단에 대해서는 새삼 떠올릴 필요도 없겠지만, 비록 따뜻해지지는 않아도 편안하고 한적한 이 비밀장소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예전에 이 이야기의 처음에 진열장과 낡은 칸막이, 그리고 온갖 잡동사니, 고물, 못 쓰는 물건 틈에서 우리의 주인공이 두어 시간 서 있었던 올스피 이바노비치의 집 뒤편의 광은 그를 유혹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우리가 시작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끝낼 수 없다
사실 골랴드낀 씨는 지금도 올스피 이바노비치의 집 마당에서 벌써 두 시간 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적하고 편안했던 예전의 은신처에는 없었던 몇 가지 불편한 것은 올스피 이바오비치 집에서 최근 열린 무도회 사건 이후로 그 장소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어 방비책이 취해진 것이고, 두 번째로 끌라라 올수피예브나로부터 약속된 신호를 기다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 약속된 신호가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항상 그래 왔고, 또 ‘우리가 시작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끝낼 수 없다’고들 하지 않던가. 골랴드낀 씨는 갑자기 오래전에 읽은 어떤 소설을 새삼스레 생각해 냈다. 지금과 아주 비슷한 상황에서 여주인공이 분홍색 리본을 창문에 매달아 놓음으로써 알프레드에게 신호를 보냈었다. 하지만 이런 밤에 더구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이 유명한 페테르부르크의 눅눅한 날씨 속에서 분홍색 리본은 도움이 될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완전히 불가능한 한 것이었다.
(…)
마당에 숨었다 사람들에게 잡혀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골랴드낀
골랴드낀 씨가 자신의 운명을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에게 맡긴다고 말하자마자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커다란, 우레와 같은 기쁨의 함성이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수긍하면서도 악의에 가득 차서 으르렁거렸다.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와 안드레이 필립뽀비치는 각각 양쪽에서 골랴드낀 씨의 팔을 잡아 마차에 앉히려 했고, 그의 분신은 비열한 평소 습관대로 뒤에서 거들었다. 불행한 큰 골랴드낀 씨는 모든 사람과 사물에게 마지막으로 눈길을 한번 더 보내더니, 이런 비유가 가능한진 모르겠지만,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새끼 고양이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로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도 바로 따라 들어와 앉았다. 마차의 문이 쾅 닫혔다. 말을 때리는 채찍 소리도 들렸다. 말은 마차를 힘껏 끌었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골랴드낀 씨의 뒤를 따라 뛰었다. 원수들의 고별인사는 귀청을 찢는 듯한 광란의 비명이 되어 그의 뒤를 따라왔다. 골랴드낀 씨를 데려가는 마차 주변에는 얼마간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더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처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가장 멀리까지 따라왔던 사람은 골랴드낀 씨의 쌍둥이 위선자였다. 그는 녹색 제목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아주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달렸다. 마차 오른쪽에서 뛰는가 하면 곧 왼쪽에도 나타나고, 가끔은 창틀을 잡고 매달려서 그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작별의 표시로 골랴드낀 씨에게 손 키스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지치기 시작했는지 점점 드물게 나타나는가 싶더니 어느덧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골랴드낀 씨의 가슴속에서는 심장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뜨거운 피가 머리로 치솟아 올랐다. 그는 너무 답답해서 앞 단추를 풀어헤치고 가슴을 드러내어 눈으로 문지르고 찬물을 끼얹고 싶었다.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마차가 전혀 낯선 길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후략). <끝>
위대한 소설의 전주곡
도스토옙스키의 『분신』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작품 중에서 독자와 비평가에게 가장 냉대받는, 그러면서도 연구자들에게는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한편 꼽으라면 아마도『분신 Dvoinik』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 Bednye liudi』로 비평가들을 감동시켰던 유망한 젊은 작가가 쓴 두 번째 소설로서, 제목부터 무언가 그럴듯한 의미를 내포하는 듯 여겨지지만 이 작품은 당대의 독자들에게 당혹감만을 주었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문체 감각이나 구성 및 인물 묘사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단점들을 고루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놀랄 만큼 지루한 전개 방식, 단조로운 인물 구조,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 반복적인 서술 등이 이 소설을 처음 읽으면서 상식적인 독자들이 보편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특징이다. -역자 석영중 교수의 해설 中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분신』은 작품을 발표했을 당시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현대에 와서 심리적 사실주의와 초현실적 요소를 결합한 선구적 작품으로 재평가되었다.
특히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자아의 붕괴'와 '이중성'을 탐구한 중요한 문학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소설은 카프카의 『변신』,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죄와 벌』 등과 비교되며, 현대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