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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와 한국 연극

― 극작가 차범석과 연출가 이해랑을 중심으로

by 김양훈

안톤 체호프는 19세기말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근대 희곡의 지형을 바꾼 인물이다. 그의 작품은 사건의 부재 속에서도 인물의 내면과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포착하며, 비극과 희극의 경계를 허물고 일상의 서정 속에서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체호프가 구축한 이 새로운 희곡적 세계는 20세기 이후 세계 연극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연극사 역시 그 흐름에 무관하지 않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 희곡 작가 차범석과 연극 연출가 이해랑은 체호프가 가졌던 세계관을 각기 문학적, 연극적 차원에서 계승·발전시킨 인물로 꼽힌다.

먼저 희곡 작가 차범석을 보자. 차범석은 한국 현대 희곡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 그의 대표작 「산불」(1963)은 체호프가 표현하는 정조(情調)를 가장 선명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체호프의 희곡에는 큰 사건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대신 몰락해 가는 지주 계급, 미래에 대한 불안, 인물들의 무력감이 잔잔히 쌓이며 일상의 대화와 침묵 속에 그것들이 드러난다. 차범석 또한 한국전쟁 이후의 농촌을 배경으로, 분단 현실과 산업화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무너지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산불」에서 사건은 단순하다. 한 마을에 불이 나는 비극적 상황이 전개되지만, 진정한 갈등은 불길이 아니라 사람들의 내면에 있다. 체호프의 인물들이 삶의 방향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인간 군상을 보여주듯, 차범석의 인물들 역시 전쟁과 가난,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 속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채 방황한다.

체호프 희곡의 핵심은 인물들이 꿈꾸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 있다. 「세 자매」에서 모스크바로 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결국 떠나지 못하는 세 자매의 모습은, 차범석 희곡의 농민과 지식인들이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면서도 현실의 사슬을 끊지 못하는 모습과 정확히 겹쳐진다. 더욱이 차범석은 체호프처럼 인물 간의 관계와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며, 삶의 슬픔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풀어내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한 태도 속에서 관객은 오히려 더 큰 공감을 느끼게 된다. 체호프적 ‘희비극’의 정조가 한국적 현실에 이식된 결과라 할 수 있다.

한편, 한국 무대에 체호프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그의 연극적 세계를 연출 미학 차원에서 구현한 인물은 이해랑이다. 이해랑은 일찍이 스타니슬랍스키 체계를 접하고, 이를 한국 연극에 맞게 적용한 연출가였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사실주의 연기는 체호프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데 최적화된 기법이었다. 왜냐하면 체호프의 희곡은 겉보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대사 사이, 침묵과 동작 속에 인물들의 내면 갈등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해랑은 배우들에게 심리적 사실주의를 훈련시키며, 체호프의 대사와 정서를 섬세하게 구현하도록 이끌었다.

이해랑이 연출한 체호프의 작품들은 한국 연극사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이전까지 한국 무대는 신파극적 과장과 감정의 직설적 폭발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이해랑은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등을 무대에 올리면서, 감정의 절제를 강조하고 일상적 대화 속에 내재한 긴장을 드러내는 체호프적 무대 언어를 소개하였다. 이는 단순한 번역극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한국 배우들이 자신들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체호프를 표현하면서, 체호프적 사실주의가 한국적 정서와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해랑의 무대에서 체호프는 더 이상 ‘외국 작가’가 아니라, 한국인의 삶과도 밀접히 닿아 있는 동시대적 작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차범석과 이해랑의 작업은 각각 문학적, 연극적 차원에서 체호프적 전통을 한국에 뿌리내리게 한 두 축이었다. 차범석은 체호프의 심리극적 기법을 한국 농촌과 분단 현실 속 인물들로 변용하며 한국 희곡의 내면성을 심화시켰다. 이해랑은 체호프의 무대를 직접 구현하며 한국 연극의 연기와 연출 양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체호프가 보여준 ‘사소한 일상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결국 체호프의 영향은 한국 연극사에서 단순한 모방이나 번역을 넘어, 한국적 현실을 재현하고 성찰하는 토양으로 작동하였다. 차범석의 희곡에서 우리는 체호프의 인간학적 시선이 한국 사회의 모순과 만나 어떻게 비극적이면서도 따뜻한 정조를 만들어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해랑의 연출에서는 체호프의 무대 언어가 배우들의 몸과 목소리를 통해 어떻게 한국 관객의 감수성 속에 스며들었는지를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작업은 체호프가 세계 연극사에 남긴 유산이 한국적 맥락에서 어떻게 새롭게 살아 숨 쉬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할 것이다.

체호프는 언젠가 “인간은 단지 먹고, 마시고, 걷고, 사랑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극적이다”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한국의 연극사에서도 유효했다. 차범석과 이해랑이 체호프의 영향을 받아 구축한 세계는, 바로 한국인의 일상과 역사 속에서 인간 존재의 진실을 담담히 응시하는 자리였다. 체호프의 세계가 러시아라는 국경을 넘어 한국의 무대와 문학 속에서 새롭게 꽃핀 것이다.


안톤 체호프와 이해랑
-사실주의 연극의 한국적 수용

체호프를 한국 무대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그의 사실주의적 미학을 정착시킨 인물이 바로 이해랑이다. 그는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도입해 한국 배우들에게 심리적 사실주의 연기를 훈련시켰으며, 과장과 신파적 감정 표현이 지배적이던 무대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다. 특히 이해랑 예술극장에서 올린 체호프의「벚꽃 동산」, 「갈매기」, 「세 자매」, 「바냐 아저씨」 공연은 그의 연출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대 위 배우들은 일상의 대화 속에 감정을 절제하며, 침묵과 시선의 교차로 긴장을 구축하였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체호프 특유의 ‘사소함 속의 극적 진실’을 한국적 감수성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이해랑의 체호프 연출은 단순한 번역극의 차원을 넘어서, 한국 관객이 자신들의 현실을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세 자매」의 ‘떠날 수 없는 삶’은 분단과 산업화 속에서 갈 길을 잃은 한국인의 자화상으로 읽혔고, 「벚꽃 동산」의 몰락은 전통 사회가 붕괴하는 과정과 겹쳐졌다. 이해랑은 체호프의 작품을 통해 연극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통과 희망을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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