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된 뼈’와 영화 '네브라스카' 그리고 문명의 기원
고고학자 마거릿 미드는 한 제자에게 “문명의 첫 증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주저 없이 “치유된 대퇴골(femur)”이라고 답했다. 이는 사냥이나 전투 중 다리가 부러진 사람의 뼈가 나중에 다시 붙은 흔적이 남은 화석을 의미한다. 이 짧은 대답 속에는 인류문명의 핵심이 응축되어 있다. 즉, ‘타인의 고통을 돌보는 행위’가 곧 문명의 시작이라는 통찰이다.
자연 상태의 동물 사회에서 다리가 부러진 개체는 곧 포식자에게 잡히거나 굶어 죽는다.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생존의 불가능을 뜻한다. 그러나 부러진 뼈가 다시 붙었다는 것은, 그동안 그 부상자가 공동체의 돌봄과 보호 아래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누군가가 음식을 가져다주었고,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었으며, 치유의 시간을 허락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본능을 넘어선 공감과 윤리적 관계성의 출현을 보여준다.
이러한 발견은 인간 진화의 과정에서 ‘이타성(altruism)’과 ‘협력(cooperation)’이 생존 전략으로 자리 잡은 시점을 가리킨다. 도구의 발명이나 불의 사용보다도 먼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것은 ‘공감의 기술’이었다. 이는 단순히 감정적인 동정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를 유지하기 위한 인식의 진화, 곧 타자의 고통을 나의 문제로 인식하는 능력이었다.
고고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치유된 뼈'는 인류 사회의 윤리적 구조가 형성된 최초의 물적 증거이기도 하다. 그것은 제도 이전의 도덕, 법 이전의 정의였다. 사냥 공동체에서 부상자를 돌보는 행위는 즉각적인 생존 이익과는 무관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집단의 결속력과 상호 신뢰를 강화시켰다. 협력적 생존의 토대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더 나아가, 이러한 치유의 흔적은 의술과 종교, 예술의 기원과도 연결된다. 부러진 뼈를 맞추고 돌보는 과정에서 인간은 신체와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고통을 함께 견디는 경험은 제의적·상징적 행위를 낳았다. 이는 후대의 주술, 장례의식, 치유 의례로 발전하며, 인간이 자연을 넘어 초월적 세계를 사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부러졌다 다시 붙은 뼛조각은 단순한 의학적 사실이 아니라, 인류가 ‘인간성’을 획득한 결정적 증거다. 그것은 문명이 건축되기 이전, 돌칼과 사냥도구의 시대에 이미 존재했던 ‘돌봄의 문화’, 즉 서로를 살게 하는 윤리적 본능의 기원을 말해준다. 문명은 거대한 도시나 제국의 탄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포기하지 않았던 순간에 태어났다.
그 작은 뼛조각은 지금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여전히 타인의 부러진 뼈 곁에 머무를 수 있는가?”
추석 연휴 재밌게 보내고들 계시쥬? 어젯밤 늦게 흑백 영화 <네브라스카>를 보았네요.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 게 있었습니다. 고고학적 발견인 '부러진 뼛조각' 말입니다. '곁'을 지켜주고 '돌봄'을 베푸는 일이 인류 문명사의 시작이더군요. 추석은 가족을 성찰하는 명절입니다. 자기만의 상처를 핥는 자기 연민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에까지 생각의 꼬리가 길어졌답니다. 가족! 누가 보는 눈이 없다면 어디에다 버리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자학했던 슬픈 이야기도 있더군요. 바람이 꽤나 붑니다. 이처럼 비바람이 부는 날, 곁을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면 따뜻한 체온을 나누는 게 사랑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