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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사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의 출현: 억압에서 해방, 해방에서 동원

by 김양훈
2025년 11월 10일 류한수 교수의
러시아 혁명사 특별강연을 위한 예습

1. 1917년 혁명 이전의 러시아 제국
Peter The Great Of Russia

동슬라브(東Slav)인의 한 지파인 러시아인은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와 정교를 받아들이고 12세기부터 두 세기 넘게 몽골의 지배를 겪으면서 서유럽과는 다른 발전 경로를 걸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사라진 뒤에 올바른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로 ‘제3의 로마’를 자처하던 러시아인의 국가는 표트르 대제 재위 기간 (1682-1725년)에 큰 변화를 겪었다. 표트르는 행정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유럽과 가까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고 유럽의 기술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중앙 권력을 비약적으로 강화하는 이 개혁을 발판 삼아 러시아 제국은 유럽의 한 주역으로 발돋움했다. 서방을 지향하는 개혁은 18세기 후반 예카테리나 대제 재위 기간(1762-1796년)에 한층 더 세게 추진되어 러시아 제국은 동유럽의 열강으로 자라났다. 예카테리나의 손자 알렉산드르 1세가 유럽의 패권을 쥔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물리치면서 러시아 제국은 유럽의 대열강 이 되었고, 그 뒤 한 세기 동안 ‘보수반동의 보루’ 노릇을 했다.

예카테리나 대제의 공식 초상화를 재해석한 이미지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열강의 지위에 올라서는 과정에서 숱한 모순을 떠안게 되었다. 지배 엘리트인 지주귀족과 인구의 절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 사이에 넓고 깊은 골이 파였다. 제국 정부가 중앙 권력을 확장하고자 키워낸 신진 귀족은 러시아의 전통문화가 아닌 서방 문화에 흠뻑 젖었고 전제정을 떠받치는 대가로 특권을 얻어냈다. 그들은 영지의 농민을 마음대로 부렸고, 농민의 지위는 꾸준히 떨어져 귀족에 예속된 존재가 되었다. 하느님은 땅을 일하는 사 람에게 주셨다고 믿는 농민은 일하지 않으면서도 땅을 거머쥔 귀족을 내쫓고 언젠가는 그 땅을 차지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의 중심부에서 농노제가 확산되는 한편으로, 중앙권력이 세지자 제국의 변두리가 예전에 누리던 자율권이 줄어들었고 제국의 영토가 넓어지자 다른 여러 민족이 제국의 백성이 되었다. 지위 하락에 불만을 품은 농민, 자율권을 되찾으려는 변방 주민, 러시아인의 지배에 항거하는 소수민족이 결합되면 제국의 기초를 뒤흔드는 대봉기가 일어났다. 그 대표 사례가 1670-1671년 스텐카 라진(Stenka Razin)의 봉기와 1773-1774년 푸가초프(Pugachev)의 봉기였다. 러시아 제국의 전제권력은 중앙집권적 국가의 형성이라는 근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이런 저항을 이겨냈지만, 밑으로부터의 저항을 힘으로 억눌러 만들어낸 통치구조 아래서 괴로움을 겪는 피지배층은 사회구조를 억눌리는 ‘우리’와 억누르는 ‘그들’로 구분해서 인식했다.

러시아 제국은 서방과 맺는 관계에서 더 큰 시련을 맞이했다. 세계 체제에 편입된 러시아는 정치에서는 열강이었지만 경제에서는 유럽의 중심부에 값싼 곡물을 대주는 반주변부였다. 이런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취약성은 19세기 중반에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지면서 그대로 드러났다. 19세기 초엽까지 유럽의 다른 여러 열강을 상대로 인구와 영토의 규모에서 보이는 우위를 바탕으로 누려온 군사강국의 지위가 밑동부터 흔들렸다. 경제의 산업화와 정치의 자유주의화에서 앞선 서방열강의 군대가 발휘하는 전쟁수행의 효율성 앞에서 러시아 군대가 내세운 단순한 양적우세는 더는 통하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이 근대화에 뒤처져 열강의 지위를 잃는다면 그동안 군사적 팽창으로 감춰온 통치구조의 불안정성이 증폭되어 체제가 무너질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일찍이 19세기 초에 서방의 변혁을 목도하며 전제체제의 모순을 감지한 러시아의 일부 귀족엘리트가 자유주의적 통치체제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서방이 겪는 근대화의 진통을 하느님이 ‘타락’한 자들에게 내리는 벌로 여기는 전제정은 이러한 시도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경직되어 있었다. 체제를 바꾸려는 귀족엘리트의 열망은 1825년 데카브리스트(Dekabrist)의 봉기로 표출되었지만, 대중과 동떨어진 음모집단의 한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곧바로 진압되었다. 그 뒤로 오히려 전제체제를 강화하는 러시아 제국과 근대화의 길을 성큼성큼 나아가는 서방의 간격은 더 벌어졌다.

1855년에 크림전쟁의 패배를 맞이하며 제위에 오른 알렉산드르 2세는 위기감 속에서 일정한 체제개혁에 나섰다. 개혁의 핵심은 1861년의 농노해방령이었다. 이 법령으로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예속 농민이 자유민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농민은 자기가 일구던 땅을 높은 값을 치르고 사야 했고, 노른자위 땅은 귀족의 손에 남아서 불만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더구나 의회민주주의는 도입되지 않았다. 1870년대 초에 특권을 모두 내버리고 인민 속으로 들어가 체제변혁을 촉진하려는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에 나선 엘리트 청년 지식인은 사회혁명의 주체로 삼은 농민을 일깨워 전제체제를 깨뜨리고자 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서유럽에서 부르주아지가 노동계급을 수탈하는 데 경악한 그들은 러시아 농촌에서 유지되는 농민공동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어 새로운 이상사회를 세워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전제 군주인 차르를 ‘어버이’로 여기는 농민은 체제를 바꾸자는 선전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농민공동체는 자본주의의 참상을 우회할 수 있게 해 줄 사회주의적 조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브나로드 운동

브나로드 운동의 실패에 좌절한 청년 지식인들은 테러전술로 기울었고, 1881년에 폭탄으로 알렉산드르 2세의 목숨을 빼앗았다. 하지만 차르가 제거되어도 기대한 체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심을 불태우는 새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반동정책에 밀려 혁명세력은 교수대에 오르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시베리아 유형지로 쫓겨났다.

반동의 삭풍이 세차게 몰아쳐와 두꺼워지는 반동의 얼음장 밑에서는 돌이킬 길 없는 산업화의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대도시에서는 공업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1890년대에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이 추진되면서 제국의 변경도 자본주의의 자장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20세기 초까지 경제 성장률은 매우 높았고,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이 자라나면서 신분으로 편성되어 있던 낡은 사회 구조가 흔들렸다. 전제정은 굳건해 보였지만 사회의 역동성은 꾸준히 커졌다.

정부의 비호 아래서 육성된 자본가계급은 전제정에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사회혁명이 두려워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선에 머물렀다. 노동계급은 전체 제국 인구의 10퍼센트에 못 미쳤지만, 비율에 걸맞지 않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1917년에 수도 페트로그라드(Petrograd,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인구 240만 명 가운데 40만 명이 공장 노동자였다. 대도시의 대규모 산업체에 밀집해 있는 노동자의 저항은, 분산된 농민의 고립된 저항과 달리, 기존 체제를 뒤흔드는 위협 요소였다.

농민의 수동성에 실망한 반(反)체제 세력의 일부는 혁명을 주도할 노동계급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 도시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던 마르크스주의자의 활동은 1898년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노동당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이론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러시아 인민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포개지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한편, 아직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지 않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에조차 들어서지 못한 러시아 제국에서 노동계급의 당면 과제를 놓고 견해차가 생긴 끝에 1903년에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장기간의 자본주의 발전단계를 상정하고 미숙한 러시아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지와 힘을 합쳐 전제정과 싸워 야 한다고 보는 이들은 멘셰비키(Men’sheviki)가 되었고,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지와 제휴하기보다는 독자적 주도권을 발휘해서 체제를 변혁해야 한다고 보는 이들은 볼셰비키(Bol’sheviki)가 되었다.

Bol’sheviki

세기의 전환기에 러시아 제국은 서방 선진국에 견줘서는 뒤떨어졌을지라도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나라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세계 제5위의 산업국가였다. 문제는 사회와 경제가 빠르게 바뀌는 가운데 발생하는 크나큰 경제부문간 편차와 지역 간 편차에서 비롯되는 충격을 조정하면서 체제를 지켜낼 능력이 통치계급에게 있는지였다. 1894년에 제위에 오른 니콜라이 2세는 집단과 계급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국가 전체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전제정 원칙을 고수해야만 이질적 요소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광대한 다민족국가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믿고는 전제체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모든 세력을 억눌렀다.

경직된 기존체제는 1905년 1월에 드디어 큰 시련을 맞이했다.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일본과 맞붙은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러시아 전제정의 권위가 크게 흔들리는 와중에 수도에서 차르에게 호소해 경제적 지위를 개선하려던 노동자들의 평화시위를 황궁수비대가 무차별 총격으로 진압해서 많은 이가 목숨을 잃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어버이 차르’의 신화가 산산이 깨졌고 끓는점을 넘은 사회의 불만은 총파업으로 번졌다. 노동자들이 공장별로 선출한 대표들로 이루어진 노동계급의 대의기구인 소비에트가 노동운동과 혁명투쟁의 구심점이 되었다. 레닌(Lenin)이나 트로츠키(Trotskii) 등 해외에 망명해 있던 혁명가들도 돌아와서 활동에 나섰다.

해외 망명에서 귀환한 레닌의 연설 장면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헌법과 의회제도를 약속함으로써 혁명진영에서 자유주의 세력을 떼어내고 모스크바 노동자들의 무장봉기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1905년 혁명 기간 동안 흔들리던 군대가 결국은 체제수호의 편으로 돌아선 덕에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전제정은 1906년부터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고, 러시아 인민은 힘을 되찾은 전제정의 위세에 짓눌렸다. 1905년 혁명은 제한된 권한을 지닌 의회인 두마(Duma)를 얻어낸 것을 빼고는 성과 없이 끝났지만, 열두 해 뒤에 일어날 대혁명의 ‘총 예행연습’이었다.

겨울잠에 들어간 체제 저항 운동은 1912년에 기지개를 켰다. 시베리아 레나(Lena)강의 한 금광에서 일어난 노동자 파업이 군대를 동원해 진압에 나선 정부의 위세에 밀려 숱한 사상자를 내고 끝났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잠잠하던 노동운동이 깨어났다. 급진화하는 공장노동자 사이에서 볼셰비키가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1905년 혁명 때 소비에트 의장으로 활약했던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거치고 한참 뒤에 프롤 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다는 단계론적 혁명이론을 내버리고 그 두 혁명이 잇달아 일어난다는 ‘연속혁명’ 이론을 내놓았다. 1906년에 다시 외국으로 망명해야 했던 볼셰비키당 지도자 레닌은 당기관지《프라브다(Pravda)》를 매체로 삼아 혁명운동을 지도했고, 러시아제국 안에서는 스탈린(Stalin) 등을 비롯한 혁명가들이 묵묵히 전제정에 맞서 싸웠다. 1914년 7월에는 수도의 거리가 바리케이드로 뒤덮여 있을 만큼 노동 운동이 격렬해졌다.

이런 와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유럽 슬라브 국가들의 후견자를 자처하던 러시아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한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군 동원령을 내리면서 대전쟁에 휘말려 들었다. 니콜라이 2세는 전쟁으로 제국 내부의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러시아 제국이 전쟁에 뛰어들자, 애국주의 열풍이 불었고 반체제 세력의 기세가 단번에 꺾였다. 러시아제국의 목숨은 전쟁으로 늘어날 듯 보였다. 전쟁은 늘 체제의 시험대였다. 전제정 원칙을 고수하며 나름대로 근대화의 길을 걸어온 러시아제국은 단순히 군대의 충돌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치르는 총력전을 수행할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만 버텨낼 수 있었다. 러시아제국의 동원 체제는 독일에 한참 못 미쳤고, 이 격차 탓에 러시아군은 독일군에게 거듭 패했다. 군인의 인명피해는 천문학적 수준으로 치솟았고, 민간인에 가해지는 압박은 패전과 맞물려 몇 곱절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날이 갈수록 전쟁에 넌더리를 내는 분위기가 전선과 후방에 퍼졌다.

스위스에 있던 레닌은 제1차 세계대전의 본질을 자본주의 열강들이 세계의 식민지를 놓고 벌이는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사회주의자의 당면 과제는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는 것, 즉 자국의 패전을 촉진해서 지배계급을 위기에 몰아넣은 뒤 혁명을 일으켜 노동자 정부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혁명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지 않으면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체제의 위기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끓는점에 이르러 혁명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다.


2. 러시아 혁명과 내전

1917년 2월 23일(그레고리오 달력으로는 3월 8일)에 수도에서 식량이 모자라 빵 배급이 중단되자, 전시체제에서 쌓여온 여성 노동자와 주부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시위가 벌어졌다. 남성 노동자와 시민이 합세하면서 시위가 도시 곳곳으로 번지자 군대가 시위진압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병사들이 시위대에 발포하라고 다그치는 장교에게 항명하고 시위에 합류했다. 노동자들은 1905년 혁명의 기억을 되살려 소비에트를 조직했고, 군부대 병사의 대표까지 받아들여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로 확대했다. 다른 도시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1905년 말에는기존체제 유지의 편에 섰던 군대가 1917년에는 체제에 등을 돌리자, 니콜라이 2세가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전제정이 무너졌다.

이 ‘2월 혁명’에서 전제군주의 퇴위로 생긴 권력의 공백을 메운 것은 이중(二重)권력이라는 기묘한 체제였다. 헌법제정회의가 선출되어 헌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국정을 이끌 임시정부가 자유주의자 위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정부의 법령은 소비에트의 인가 없이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소비에트 지도부의 온건 사회주의자는 러시아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 있다고 보고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명목상의 권력을 가진 임시정부와 실질적 권력을 가진 소비에트가 서로 의지하면서 견제하는 관계가 유지되었다. 이 이중권력은 모든 사회영역에 나타났다. 군대에서는 폭압적인 지휘관이 쫓겨났고 장교의 명령은 병사대표로 이루어진 병사위원회의 인가를 얻어야 효력을 지녔다. 산업체에서도 노동자 위에 군림하던 경영자와 관리자가 쫓겨났고 새로 들어선 경영진은 노동자가 뽑은 대표들로 이루어진 공장위원회의 감시 아래 공장을 운영했다. 대중이 바라는 혁명은 권력자의 전횡이 억제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권위의 위계제가 허물어져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구분하는 구조 자체가 사라지는 권력관계의 근본적 변혁이었다.

지구 지표면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한 나라의 국정을 떠맡은 임시정부에 전쟁이라는 쟁점을 둘러싸고 첫 위기가 닥쳐왔다. 끔찍한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 대중의 절실한 염원은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반발을 의식한 임시정부는 독일과 강화 협상에 나서기를 꺼렸다. 외무장관이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지속한다’는 비밀 각서를 연합국 정부에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노동자와 병사가 시위를 벌였다. 외무장관의 사임으로 사태를 수습한 임시정부는 위기를 넘기고 권력기반을 다지고자 온건 사회주의자들에게 정부 각료직을 제안했고, 온건 사회주의 세력은 자유주의 세력과 제휴하지 않아 혁명의 힘이 약해지면 반동세력이 복귀하게 되어 내전이 일어나리라고 판단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임시정부의 자유주의 세력과 온건 사회주의 세력은 공동 운명체가 되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볼셰비키당 최고지도자 레닌의 입장을 익히 알고 있던 독일정부는 스위스에 있던 그를 러시아로 보내면 동부전선의 러시아군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러시아로 가는 길을 터주었다. 4월에 러시아에 도착한 레닌은「4월 테제」를 볼셰비키당에 내놓았고,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의 현 상황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이 미성숙하고 조직이 취약해서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은 혁명의 제1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 계층이 권력을 장악하는 제2단계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있다. 임시정부에 그 어떤 지지를 보내서도 안된다. 노동자 소비에트가 있는 현 상황에서 의회제 공화국 수립이 당면 목표일 수는 없으므로,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즉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에 집중되어야 한다.

또한 레닌은 러시아에서 일어날 사회주의혁명의 임무를 독일의 혁명을 촉발해서 세계혁명을 완수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레닌은 유럽에서 공업이 가장 발달한 나라인 독일에 들어설 노동자 정부의 도움을 받으면 러시아의 미숙한 사회주의 혁명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격론 끝에 당 지도부는「4 월 테제」를 받아들이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으로 내걸고 임시정부를 뒤엎어서 사회주의 정부를 세운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뒤늦게 러시아로 돌아온 트로츠키도 볼셰비키당에 들어가서 레닌과 함께 혁명을 이끌었다.

1917년 혁명 과정을 결정하는 가장 큰 힘은 대중이었다. 혁명 러시아에서 대중은 끊임없이 토론을 벌였다. 레닌과 함께 귀국한 그의 아내 크룹스카야(Krupskaia)에게 가장 인상 깊은 혁명 러시아의 모습은 길모퉁이마다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정치토론을 하는 광경이었다. 전선의 참호에 있는 병사는 후방에서 사람이 오면 뭔가 읽을 것, 즉 신문이나 팸플릿을 달라고 부탁했다. 대중의 각성 속에서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노동조합에서 온건 사회주의자를 밀어내고 다수파의 지위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당은 “토지, 평화, 빵!”이라는 슬로건으로 토지를 분배하라는 농민의 요구, 전쟁을 끝내라는 병사의 요구, 노동자의 경영개입을 허용해서 경제 파국을 막으라는 노동자의 요구에 기민하게 대응했다. 이런 기민성은 볼셰비키당의 체질이 1917년 혁명과정에서 바뀐 결과였다. 노동자와 병사 등 ‘풀뿌리’ 대중을 당원으로 받아들인 볼셰비키당은 레닌이 1902년에 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주창한 소수 직업혁명가의 전위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탈바꿈함으로써 당내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일반 당원과 대중의 요구를 재빨리 감지할 수 있었다.

나날이 급진화하는 대중은 소비에트가 권력을 단독으로 차지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대중 사이에서 임시정부에 입각한 온건 사회주의자들을 제치고 볼셰비키의 인기가 치솟았다. 임시정부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난국을 타개하고자 여름에 대공세를 펼칠 계획을 세웠다. 전쟁을 끝내기는커녕 대공세를 펼치려는 임시정부에 분노한 수도의 대중이 7월에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이며 사회주의자들에게 권력을 잡으라고 요구했다. 임시정부는 이 시위를 무력 진압했고, 시위를 획책한 배후로 볼셰비키당을 지목하고 당 지도부를 체포했다. 러시아군의 대공세는 초기에 반짝 성공했을 뿐, 곧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났다. 임시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중권력 체제가 밑동부터 흔들렸다. 어떻게든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전쟁을 계속 수행하려는 러시아의 우익세력은 임시정부가 사회주의 세력에 휘둘려 무정부 상태를 방조한다고 보고 대안을 모색했다. 그 대안은 군사독재였고, 독재자 후보는 러시아군 총사령관 코르닐로프(Kornilov) 장군이었다. 전선부대를 수도로 보내서 혁명세력을 제압하려던 코르닐로프의 시도는 8월에 볼셰비키가 이끄는 대중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고비를 넘긴 볼셰비키는 힘을 되찾았다.

혁명 러시아의 사회주의 정부 1주년 축하 포스터, 1918년 10월. 연기를 내뿜는 공장 굴뚝 사이로 찬란한 해가 떠오르는 가운데 노동계급과 농민계급의 연대를 대표하는 두 사내가 각각 망치와 낫을 쥐고 있으며, 바닥에는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진 구체제를 표상하는 상징물들이 나뒹굴고 있다.

농촌에서는 농민이 정부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족의 토지를 차지하는 일이 번져나갔다. 또한 지난날 러시아 제국의 억압적 민족정책에 신음하던 소수민족 사이에서는 독자정부를 세워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경향 이 거세졌다.

레닌은 반(反)혁명 세력이 반격하기 전에 하루라도 더 빨리 무장봉기를 일으켜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으라고 볼셰비키당 지도부를 다그쳤다. 그러나 당 지도자 다수는 소비에트 전국대회를 열어 더 다양한 사회주의 세력을 끌어들여야 한다며 레닌의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월에 열린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격론 끝에 무장봉기가 결정되었다. 봉기의 주력은 공장의 노동자 민병대원과 좌익의 아성 크론시타트(Kronshtadt) 해군기지의 병사였다. 10월 25일(11월 7일)에 봉기세력이 임시정부 각료들이 있는 겨울궁전을 점령했다. 이튿날 열린 소비에트 전국대회에서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 권력’이 인준되었고, 볼셰비키 정부가 구성되었다. 이 사건에 ‘10월 혁명’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러시아에 들어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권력의 앞에는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었다. 볼셰비키 정권의 기반은 몇몇 대도시에 한정되어 있었고, 농민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정세변화에 어두웠다. 또한 볼셰비키 정권을 환영하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11월에 전국에서 치러진 헌법제정회의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대도시 공장노동자의 지지를 얻었지만, 총득표율은 25퍼센트에 못 미쳤다. 농민표를 많이 얻은 사회주의자혁명가당 우파의 득표율은 55퍼센 트를 웃돌았다. 볼셰비키는 권력을 넘기기를 거부하고 1918년 1월에 헌법제정 회의를 강제로 해산해서 의회민주주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길로 나아갔다. 볼셰비키 정부는 수도를 내륙 중심부에 있는 모스크바로 옮겼다. 또한 볼셰비키 정권은 3월에 독일과 단독 강화조약을 맺어 전쟁에서 빠져나왔지만, 그 대가로 유럽 러시아의 서부 영토 대부분과 우크라이나를 독일에 넘겨줘야 했다. 어렵게 얻은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여름부터 볼셰비키정권과 이에 반대하는 세력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내전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갓 태어 난 사회주의 국가는 이러한 불의 세례를 견뎌내고 살아남아야 했다.

국제주의 원칙을 신봉하는 볼셰비키당 지도부는 러시아에서 내전이 일어나더라도 10월 혁명이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을 촉발해서 독일에 노동자 정부가 들어서면 독일 노동계급의 도움을 얻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1919년 1월에 독일에서 일어난 사회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볼셰비키 정권은 혼자 힘으로 내전에서 승리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했다. 1914년부터 전쟁 피해가 지속되고 혁명과정에서 혼란이 일어나고 자본주의 열강들이 러시아를 봉쇄한 탓에 경제가 무너졌다. 도시의 공장이 멈춰버리자 공산품을 얻지 못한 농민은 도시에 곡물을 내놓지 않았다. 많은 노동자가 식량을 찾아 도시에서 빠져나갔다. 노동계급의 해체는 곧 혁명의 파멸이므로 볼셰비키 정권은 곡물을 강제로 빼앗아야 했고, 이 때문에 농민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혁명정부의 권력이 미치는 영토도 크게 줄어들었다. 1918년에 볼셰비키 정권은 러시아제국의 일부였던 폴란드와 핀란드의 독립을 허용했고,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했다. 가장 직접적인 위협은 1919년에 최고조에 이른 반혁명군의 파상공세였다. 남쪽에서는 유데니치(Iudenich) 장군, 서쪽에서는 데니킨(Denikin) 장군, 동쪽에서는 콜차크(Kolchak) 장군이 볼셰비키 정권을 공격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을 비롯한 14개국이 간섭군을 보내 러시아 곳곳을 점령하고 반혁명을 도왔다. “볼셰비즘을 요람에 있을 때 목 졸라 죽여야 한다”라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의 발언은 볼셰비키 정권을 대하는 열강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혁명정부가 새로 창설한 ‘붉은 군대’는 서툴러서 반혁명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볼셰비키는 선전으로 대중을 동원하고 때로는 무자비한 조치를 서슴지 않으며 자원을 쥐어짜내 내전을 수행했다.

혁명 러시아 수도의 거리 풍경, 1918년. 10월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 정권은 세상이 바뀌었음을 느끼게 해 주려는 의도로 당시에 가장 허드렛일로 여겨지던 눈 치우는 노동을 일부러 구체제의 특권 계층이었던 장교들에게 시켰다.

원래는 기간산업과 중앙은행만 국유화하는 정책을 구상했던 볼셰비키는 철저한 동원체제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볼셰비키정권은 농촌에서 곡물을 강제징발했고, 중소기업까지 국유화했고, 극심한 물자부족 사태를 타개하고자 배급제를 실시하고 시장을 금지했고, 효율성을 높인다며 조직내의 민주주의적 관행을 축소하고 관리자의 권한을 키우려고 애썼다. 비밀경찰은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을 철저히 억눌렀다. ‘전시 공산주의’라고 불린 이 일련의 조치들은 내전과 경제 파탄에 대처하는 임기응변이었지만, 얼마간은 볼셰비키가 품은 사회주의 개념의 발현이기도 했다. 1917년 혁명과정에서 당내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대중정당으로 변모했던 볼셰비키당은 내전 동안 집권당으로서 상명하복의 조직원칙을 강조하며 권위주의적 위계제를 복원하는 경향을 보였다.

볼셰비키 정권이 1919년의 위기 속에서 무너지지 않은 까닭은 농민이 볼셰비키보다는 반혁명 세력에 더 큰 반감을 보였다는 데 있다.

내전에서 반혁명군과 싸운 붉은 군대의 한 군인. 이름이 안톤 블리즈냐크인 이 기관총 사수의 왼쪽 소매에 붙은 검정 줄은 그가 중상을 13번 입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전투에서 오른쪽 눈을 잃은 이 소년의 목에 걸린 쌍안경은 그가 지휘관임을 암시한다.

반혁명이 이기면 지주가 되돌아와 토지를 빼앗아가리라고 생각한 농민은 곡물을 빼앗아가는 볼셰비키를 미워하면서도 내전에서 반혁명 세력보다는 볼셰비키정권을 지지했다. 마흐노(Makhno)가 이끄는 농민 비정규군은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에서 반혁명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붉은 군대는 내전의 불세례를 견뎌내며 굳세졌다. 총사령관 트로츠키는 지원자로 구성되는 무장시민의 민병대 원칙을 버리고 전통적인 정규군 체제를 도입해 강제징집을 하고 장교의 권위를 키우고 병사의 권한을 줄였다. 이런 변모를 통해 붉은 군대는 강한 군대가 되었다. 1920년에 붉은 군대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공격해 온 폴란드 군대를 다시 밀어냈고, 마지막 반혁명군을 크림반도에서 몰아냈다. 세 해 동안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은 마침내 볼셰비키 정권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승리는 일종의 ‘피로스 왕의 승리’였다. 반혁명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볼셰비키 지도부가 복원하는 권위주의적 위계제에 실망한 노동자 대중은 당에 등을 돌리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반혁명군이 기세를 올리면 위기감을 품고 볼셰비키 정권에 협조했지만, 위기가 가시면 파업과 태업을 벌이며 저항했다. 당황한 볼셰비키당은 노동자가 혁명적 계급의식을 잃고 소시민화했다는 ‘탈(脫)계급화’론을 내세우며 노동자 운동을 억눌렸다. 그러나 이 ‘탈계급화’론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권력자의 행태를 보이는 볼셰비키를 비판했을 뿐이며 혁명 정부가 ‘우리 정부’라는 인식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볼셰비키 정권이 대중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이 일어났다. 1921년 3월에 크론시타트 해군기지에서 해군병사들이 볼셰비키가 혁명을 배반했다며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혁명의 전위였던 해군병사가 반기를 치켜들었다는 사실에 볼셰비키는 경악했지만, 곧 크론시타트 봉기를 반혁명 세력의 책동이라고 비난하며 군대를 보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집권당으로서 새로운 권력구조를 만들어낸 볼셰비키는 내전의 끝자락에서 1917년 혁명의 이상을 기억하고 있는 인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할 만큼 경직되어 있었다.

1922년에 농민층의 마지막 무장저항이 결국은 진압되고 시베리아에서 버티던 일본군이 물러나 간섭군이 사라지면서,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은 마침내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떨어져 나갔던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도 발트해 연안국가들을 빼고는 빠짐없이 혁명 러시아로 복귀했다. 레닌이 내세운 민족 자결주의는 제국의 해체로 쏠리는 원심력으로 작용하지 않았고, 일시적으로 갈라섰던 옛 러시아 제국의 여러 민족은 제 각각 나름대로의 계급투쟁을 거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형태로 러시아 주위로 결집했다. 그 결과물이 1922년 12월에 성립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이었고, 여러 민족의 소비에트공화국들로 이루어진 이 체제는 그 뒤 70년 동안 지속된다.


3 혁명과 내전 이후의 소비에트 러시아

세계혁명의 불길을 당기는 불꽃 역할을 하겠다는 볼셰비키의 포부와 기대에 어긋나게도 유럽의, 특히 독일의 혁명운동이 잠잠해지는 상황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러시아는 1920년대를 홀로 버텨내야 했다. 1921년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제는 벼랑 끝에 있었다. 공업생산 수준은 제1차 세 계대전 직전의 13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전시 공산주의’ 체제는 내전이 끝나가면서 도시민과 농민의 극심한 불만을 사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파업이 자주 일어났고, 농촌에서는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볼셰비키는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내버리고 이른바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했다. 곡물징발이 폐지되어 농민은 일정한 현물세를 내고 남은 곡물을 시장에서 팔수 있게 되었고, 도시의 기간산업을 제외한 중소기업체는 민영화되었다. ‘네프만’으로 알려진 자영업자들은 제한된 상황에서 허용된 시장체제에 적응해서 큰돈을 벌었다. 경제가 빠르게 되살아나서 1927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수준을 되찾았다.

문화 분야에서도 활력이 유지되었다. 배우려는 대중의 욕구가 불타오르면서 문맹률이 뚝 떨어졌다. 전통을 벗어던지려는 자유분방한 신세대 예술가에게 혁명 러시아는 새로운 문화의 씨를 뿌릴 기름진 들판이었다. 20세기 초에 구상되었던 다양한 예술 실험이 현실에서 실현되었고, 신선한 시도가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음악에서는 권위를 깨뜨리는 혁명 정신을 반영해서 지휘자 없는 관현악단이 교향곡을 연주했다. 이러한 숱한 실험 가운데 살아남은 몇몇 사조가 세계의 예술을 선도했다. 일례로, 에이젠시테인(Eizenshtein) 감독의 영화에서 시도된 몽타주 기법은 그 뒤 영화예술의 일반 문법이 되었다. 혁명 러시아의 경험은 유럽에서보다도 유럽 이외 지역에서 더 큰 관심과 기대를 끌었다.

1922년 1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동방민족 대회의 한 장면. “공산당은 원동(극동) 해방의 선봉대”라는 표어가 눈에 띈다. 반(反)제국주의 투쟁에 아시아의 여러 민족을 끌어들이려는 볼셰비키 정권의 노력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사회주의자들도 호응했다.

특히 자본주의 열강의 식민지가 된 나라의 젊은이들은 제국주 의의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을 이룩할 가르침을 러시아 혁명에서 얻고자 애썼 다. 중국, 인도, 베트남, 조선의 젊은이들이 모스크바로 몰려와 배움을 구했다. 레닌이 1919년에 세운 제3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에서 소련 공산당은 유라시 아 대륙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의 공산당들을 이끄는 주도 세력이 되었다. 훗날 사회주의 베트남의 국부가 될 호찌민은 1923년에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들어가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학습했고, 코민테른이 세운 이 교육기관에는 조선에서 온 청년 활동가가 많이 있었다. 이처럼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식민지인의 운동을 북돋았다.

내전과 봉쇄를 견디고 살아남은 러시아의 사회주의 체제가 맞이한 1920년대는 활력과 억압, 희망과 실망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정치영역에서는 공산 당의 권력을 유지하지만 경제 영역에서는 자본주의 요소를 용인하는 ‘신경제정책’의 상황을 마냥 반기지는 않는 볼셰비키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신문에 ‘하녀 급구’라는 광고가 실릴 만큼 자본주의적 요소가 되살아나는 세태에 초조해했고 네프만의 대두나 ‘옛사람’, 즉 구체제 인물의 잔존을 못마땅해했다. 또한, 내전시기에 빚어진 군사식 사고방식과 맞물려 세계혁명의 실패에서 비롯된 위기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볼셰비키 정권은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사실상 불법화했고, 공산당 안에서도 분파 활동을 금지하며 당규율을 강화했다. 이런 가운데 최고 지도자 레닌이 1924년 1월에 숨졌다. 레닌은 죽기에 앞서 당과 정부가 집단지도 체제로 운영되기를 바랐지만, 트로츠키와 스탈린을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 사이에서 이합집산과 권력 투쟁이 펼쳐졌다.

권력투쟁은 노선대결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기대했던 독일의 혁명이 실패한 상황에서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새 세상의 건설을 실행하면서 기댈 수 있는 지침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공산주의의 몇몇 원칙을 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전통적인 국제주의 원칙에 충실한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의 궁극적 생존은 국제혁명의 성공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 반면, 스탈 린은 국제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러시아에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해야 하고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一國) 사회주의’ 이론을 내놓았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외국에서 얻을 수 없는 소비에트 연방이 산업화의 동력을 어떻게 마련할지를 놓고 논쟁이 일었다. 어떤 이는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공업화를 차근차근 진행하자는 주장을, 다른 어떤 이는 농업부문을 쥐어짜서 공업화의 재원을 마련해서 공업화를 급속히 추진하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노선논쟁과 맞물린 권력투쟁의 마지막 승자는 스탈린이었다. 1917년 혁명 과정에서는 돋보이지 않았던 스탈린은 정치무대의 뒤에서 묵묵히 일해온 조직가였으며, 레닌의 가장 충실한 제자라는 이미지를 활용해서 신세대 활동가들 사이에서 지지기반을 다졌다. 혁명이 변질되고 있다는 불만을 품은 열혈당원들은 일국사회주의 이론에 더 공감했고, 이런 상황에서 힘을 잃은 트로츠키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결국 외국으로 쫓겨났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맞설 때 손을 맞잡았던 여러 경쟁자를 시차를 두고 차근차근 쓰러뜨렸다. 권력의 위계를 철저히 타파하기보다는 단순히 재편해서 혁명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고 본 레닌의 혁명 개념은 궁극적으로는 스탈린이 최고 권력자로 떠 오르는 길을 터주었다.

경제부문에서 노동자-농민 동맹에 바탕을 둔 점진적 공업화를 주장했던 스탈린은 비교적 안정적인 권력기반을 마련한 1920년대 말엽부터 급속하기 이를 데 없는 산업화 강행노선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29년에 공업부문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5개년계획’이 실행되었고, 더불어 농업부문에서는 소농체제를 대규모 국영농장 및 집단농장 체제로 바꾸는 농업집산화 정책이 강행되었다. 이러한 노선 급선회는 스탈린 개인의 권력욕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1920년대 말엽에 농촌의 소농 체제가 도시에 충분한 곡물을 공급하는 데에서 한계를 드러냈고 신경제정책 시기의 자본주의적 요소의 성장에 인내심을 잃어가는 젊은 공산당원 세대의 불만이 솟구쳤다. 이렇게 불안정성이 커지는 가운데 1927년에 영국이 소비에트연방과 외교 관계를 끊고 자본주의 국가들 의 적대적 태도가 거세지자 볼셰비키 지도부는 또다시 전쟁 위기가 엄습해 온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러한 여러 요인이 어우러져 작용하면서 급격한 산업화로 키를 돌리는 방향선회가 1929년에 이루어졌다.

‘5개년 계획’과 더불어 농업집산화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된 1930년대에 소비에트 연방은 1917년 혁명 못지않은 대변혁을 겪었다. 거대한 중공업단지가 곳곳에 들어섰고, 농촌에서는 말로 나무 쟁기를 끌어 땅을 일구는 모습이 대형콤바인이 대형농장의 밭을 가는 광경으로 대체되었다.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한 이들이 노동계급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연간 경제 성장률이 10퍼센트를 웃도는 1930년대 전반기의 소비에트 연방은 같은 시기에 경제대공황으로 극심한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극명한 대비를 이 루며 세계 3위의 공업 국가로 올라섰다. ‘스탈린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이 대변혁의 밑바탕에는 고립된 상황에서 자력으로 성장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는 절박함이 있었다. 이러한 심리는 1931년 2월에 한 대회에서 스탈린이 한 다 음과 같은 연설에서 잘 드러나 있다.

옛 러시아 역사의 특징 하나는 러시아의 후진성 때문에 끊임없이 얻어맞았다는 데 있습니다. (……) 우리는 선진국가들에 50년 내지 100년 뒤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10년 안에 이 격차를 따라잡아야만 합니다. 우 리가 이것을 해내든지, 아니면 그들이 우리를 쳐부수든지 둘 가운데 하 나입니다.

1930년대는 억압에서 벗어나 인간을 해방하려는 혁명이 현대적 산업국가를 건설하는 동원체제로 변화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바야흐로 공산주의 시대를 연다는 부푼 희망과 후발 국가의 압축적 현대 화에서 비롯되는 격통이 교차했다. 농업집산화에 반발하는 농민의 저항이 무 자비하게 진압되고 숱하게 많은 사람이 굶어죽는 대기근이 발생하는 한편으로, 공업단지로 이주해서 공장노동자가 된 농촌 젊은이들은 도시문명을 맛볼 수 있었다. 도시민은 급속한 경제성장이 주는 기회를 누리면서도 그 성장을 위해 극도로 낮춰진 소비수준을 감내해야 했다. 대규모 동원으로 압축성장을 이룩하는 ‘스탈린 혁명’에서 대숙청이라는 비극이 빚어졌다. 대놓고 소련을 극도로 적대시하는 나치즘이 독일에서 발호하는 1930년대 후반기에 소련에서는, 많은 경우에 근거 없이, ‘인민의 적’이라고 지목된 숱한 당원, 관료, 시민, 소수민족이 처형되거나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레닌과 스탈린, 1922년 9월. 러시아 혁명의 최고 지도자 레닌의 가장 충실한 제자라는 이미지를 선점한 스탈린은 레닌이 1924년에 죽은 뒤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최종승자가 되어 소비에트연방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도 비밀경찰의 체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단순히 스탈린 개인의 권력욕이나 이상성격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 거대한 테러는 스탈린 지도부가 실상이든, 가상이든 반대 세력을 없애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국가 및 당기구 안에서 자기 나름의 아성을 만들어 그 안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관료’와 지도자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의 힘을 빼앗고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했다.

1917년 혁명 이후 스무 해 동안 이상과 현실, 연대와 고립, 건설과 파괴가 엇갈리며 스탈린체제가 완성되었다. 이 체제의 정치 영역에서는 스탈린을 구 심점으로 삼는 공산당이 국가기구 위에 서고 경제영역에서는 계획경제가 ‘명령-행정 체제’로 작동되고 사회영역에서는 상부가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만 시민의 자발성이 허용되고 문화영역에서는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최고의 가치로 내세워졌다. 이 체제는 1940년대 전반기에는 제2차 세계대 전이라는, 이후에는 냉전이라는 시련을 거치야 했다.


4 나오는 말

근현대에 일어난 여러 혁명이 재해석되면서 단절적 격변이 아닌 점진적 변화로 다시 자리매김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20세기 초엽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대격변에서 혁명이라는 꼬리표를 떼내려는 움직임은 없다. 러시아 혁명은 여전히 ‘혁명’이다.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제시한 가치인 ‘자유, 평등, 형제애’를 마저 완성하는 혁명으로 여겼다. 또한 대중은 권력을 이 계급에서 저 계급으로 넘겨서 정권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권력의 얼개를 뜯어고쳐서 명령을 내리는 이와 명령을 받는 이 사이의 구분을 없애는 근본적 변혁을 바랐다. 레닌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성립을 선언한 1917년과 스탈린이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한 1936년 사이에 러시아는 크나큰 변화를 겪었고 이 변화는 전 세계의 눈과 귀를 모았다. 러시아 제국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으로, 전제체제는 공산당 일당체제로, 볼셰비키당(공산당)은 러시아의 소수 지하정당에서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의 반체제 운동을 이끄는 조직으로 바뀌었다. 또한 농업국가가 공업국가로 탈바꿈했고, 기회를 잡은 노동자-농민 출신의 젊은이들이 출세해서 토지 귀족과 특권층이 사라진 자리를 메웠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으로 나타난 체제는 1917년의 혁명 대중이 바란 대로, 모든 권위주의 구조가 타파되어 권력을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의 구분이 사라진 체제는 아니었다.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사회적 출신이 특권 계급에서 기층민중으로 바뀌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도 권력이 행사되는 구조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러시아 혁명의 성과이자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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