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너는 내 삶을 망쳤어! 나에게서 젊음을,
에너지를, 재능을 다 빼앗아 갔어!”
- 바냐의 절규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는 19세기 말 러시아 사회의 지적 무력감과 인간 존재의 허무를 정밀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농촌 영지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체호프는 그 시대의 여러 유형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배치해 근대 지식인의 위선과 좌절을 드러낸다. 그 중심에는 두 명의 지식인, 즉 은퇴한 노교수 세레브랴코프와 시골의사 아스트로프,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억눌린 감정과 분노로 요동치는 바냐 아저씨가 있다. 이 세 인물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탐색하지만, 모두 결국 삶의 무력함과 허무에 직면한다. 그 가운데서 세레브랴코프와 아스트로프의 대비는 특히 체호프의 시대비판적 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며, 바냐의 절망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을 이룬다.
먼저 세레브랴코프 교수는 체호프가 비판하고자 한 퇴락한 구세대 지식인의 전형이다. 그는 도시에서 평생을 ‘학자’로 살았지만, 그의 연구는 현실과 아무런 접점을 가지지 못한 공허한 관념의 산물이다. 시골 영지는 그의 전처와 처남 바냐, 그리고 세레브랴코프조카의 전처 소생의 딸 소냐가 피땀 흘려 일군 생계의 터전임에도 그는 그것을 자신의 ‘재산’으로 여긴다. 그는 늙고 병들었으며, 사회적 영향력도 잃었지만 여전히 지식인의 권위와 위계 속에 자신을 가둔다. 체호프는 이 인물을 통해 러시아의 학문 엘리트가 이론적 사유에 매몰되어 현실적 도덕을 상실한 채, 타인의 노동에 기생하는 구조적 위선을 비판한다. 세레브랴코프가 영지를 팔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바로 그 위선의 정점이다. 그는 삶의 윤리를 논할 자격이 없지만, 여전히 가족들의 운명을 결정하려는 냉혹한 권위자로 등장한다.
이에 반해 아스트로프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가능성과 그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시골의 의사로서 병든 농민을 돌보고, 황폐해져 가는 러시아의 산림을 보존하려 애쓴다. 그는 숲을 가꾸며 “100년 뒤를 위해 나무를 심는” 인간의 책임을 설파하지만, 세상은 그의 노력을 무시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술과 나태 속에 빠져 있다. 그는 누구보다 현실을 명확히 인식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를 냉소와 허무로 몰아넣는다. 그는 술로 피로를 달래고, 인간의 감정조차 과학적으로 해석하며, 이상과 감정 사이에서 점점 무감각해져 간다. 그가 옐레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조차 열정보다는 좌절의 변주로 들린다. 아스트로프는 체호프가 제시한 ‘도덕적 감수성을 지닌 근대인’의 초상이지만, 현실의 무력 앞에서 그것을 실천하지 못한 비극적 이상주의자로 남는다.
이 두 인물의 대비는 단순히 세대의 차이를 넘어 지식의 윤리적 방향성에 대한 체호프의 근본적 질문을 드러낸다. 세레브랴코프의 지식은 관념 속에서 부패했고, 아스트로프의 지식은 현실 속에서 절망했다. 한쪽은 과거의 권위에 매달리는 허위의 지식, 다른 한쪽은 미래를 꿈꾸지만 실천할 힘을 잃은 지식이다. 체호프는 이 둘 모두가 사회를 구원할 수 없음을 보여주며, 러시아 근대 지식인의 이중적 실패인 도덕적 타락과 실존적 무력을 해부한다.
이들 사이에 놓인 바냐 아저씨(이바노비치)는 체호프가 가장 깊은 연민을 가지고 그린 인물이다. 그는 세레브랴코프의 처남으로, 평생을 영지의 유지와 교수의 명망을 위해 바쳐왔다. 그러나 교수의 허명이 드러나자 그는 돌연 모든 인생의 의미를 잃는다. “나는 그의 천재를 위해 내 청춘을 바쳤는데,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바냐의 절규는 단지 개인적 배신감이 아니라, 시대의 허위 이념에 속아 인생을 소모한 러시아 중간계층의 절망을 대변한다. 그가 세레브랴코프를 향해 총을 쏘지만 빗나가는 장면은 체호프식 아이러니의 정점이다. 인간은 분노하고 저항하지만, 결국 현실을 바꾸지 못한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세레브랴코프가 허위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아스트로프는 깨달은 허무의 초상, 바냐는 그 둘 사이에서 무너진 인간의 모습이다. 세레브랴코프는 과거의 질서를 고수하며, 아스트로프는 새로운 질서를 꿈꾸지만 실현하지 못하고, 바냐는 그 틈바구니에서 삶의 의미를 잃는다. 이 세 인물의 역학은 체호프가 바라본 러시아의 정신적 풍경이다. 즉 노동하는 사람에 기생하는 구세대, 절망한 신세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소모되는 평범한 인간.
그럼에도 체호프는 절망 속에 희미한 구원의 빛을 남긴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냐가 “우리는 일할 거예요. 그리고 죽으면 신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실 거예요”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한 순종의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에서도 삶을 지속하려는 인간의 윤리적 결단이다. 체호프는 세레브랴코프의 위선과 아스트로프의 무력, 그리고 바냐의 분노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를 폭로하지만, 동시에 그 불완전함 속에서 지속되는 삶의 끈기, 인간적 존엄의 잔불을 잊지 않는다.
요컨대, <바냐 아저씨>의 세레브랴코프와 아스트로프는 지식의 두 얼굴을 보여주며, 바냐는 그 사이에서 실존적 고통을 겪는 인간의 상징으로 존재한다. 세레브랴코프가 부패한 과거를, 아스트로프가 좌절한 이상을, 바냐가 그 잔해 속에서 버티는 현재를 대표한다면, 체호프의 시선은 냉정하지만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그는 절망을 냉철하게 응시하면서도, 그 속에서 여전히 “일하고 견디는 인간”의 가능성을 본다. 그것이야말로 체호프가 말하고자 한 진정한 구원이며, 문명과 인간에 대한 가장 인간적인 신앙이었다.
[등장인물]
*알렉산드르 프라디미로피치 세레브랴코프-은퇴한 대학의 교수
*엘레나 안드레예프나 세레브랴코바-은퇴한 교수의 아름답고, 어린 두 번째 아내(27살).
*소피아 알렉산드로프나 세레브랴코바("쏘냐")-은퇴한 교수의 똑똑한 딸(첫 번째 부인의 딸).
*마리아 바실예프나 보이니트스카야-은퇴한 교수의 첫 번째 아내의 어머니.
*이반 페트로비치 보이니트스키("바냐 아저씨")-마리아의 아들 이자 쏘냐의 백부(주인공)
*미하일 르보비치 아스트로프-시골 의사이자 철학자
*일리야 일리치 텔레진 ("와플")-곤궁한 땅 주인
*마리나-늙은 유모
1막
세레브랴코프 가(家)의 정원. 아스트로프는 늙은 유모 마리나에게 시골 의사로서의 삶이 얼마나 지루한지와 세월의 무상함을 이야기한다. 이때, 막 낮잠에서 깨어난 바냐가 하품하며 등장한다. 바냐는 은퇴한 교수와 엘레나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는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세레브랴코프, 엘레나, 쏘냐, 그리고 텔레진이 산책에서 돌아온다. 바냐는 교수에게 그의 허풍과 거만한 태도를 비난하며, "많이 배운 말라비틀어진 고등어"라고 조롱한다. 세레브랴코프를 존경하는 바냐의 어머니, 마리아 바실예프나는 아들의 경멸적인 발언을 꾸짖으며 엘레나의 아름다움을 칭찬한다. 아스트로프는 환자 진료를 위해 자리를 뜨기 전 나무를 보호해야 한다며 연설한다. 엘ㄹ나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바냐에게 크게 화를 내며 1막이 끝난다.
2막
(며칠 후) 늦은 밤 세레브랴코프의 응접실. 세레브랴코프가 침실로 들어서며, 나이가 들어 온몸이 성한 곳이 없다며 불만을 터트린다. 쏘냐가 부른 의사 아스트로프가 도착하지만, 세레브랴코프는 진료를 거절한다. 세레브랴코프가 잠든 밤, 엘레나와 바냐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엘레나는 집안의 불화를 이야기하고, 바냐는 망가진 희망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바냐는 자신이 유년 시절을 엉망으로 보냈으며, 자신의 황폐한 삶은 엘레나에 대한 대답 없는 사랑과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엘레나는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한다. 홀로 남게 된 바냐는 왜 엘레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때 사랑했었더라면 엘레나와 결혼도 하고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중얼거린다. 한때, 바냐는 세레브랴코프가 정말 위대한 사람이라고 믿었으나 그러한 믿음이 사라진 지금 그의 삶은 공허했다. 바냐가 과거를 회상하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아스트로프가 등장한다. 아스트로프와 바냐는 술에 취해 이야기를 나눈다. 쏘냐는 술에 취한 바냐에게 삶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말라고 잔소리한다.
밖은 폭풍전야. 아스트로프는 쏘냐와 질식해 버릴 것 같은 집안 분위기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아스트로프는, 세레브랴코프는 괴팍하고, 바냐는 위산저하증 환자이며, 엘레나는 매력적이지만 게으르다고 말한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해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며 비탄에 잠긴다. 쏘냐는 그런 아스트로프에게 그가 얼마나 매력적인지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제발 그의 삶을 이렇게 망가뜨리지 말 것을 부탁한다. 쏘냐는 아스트로프에게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아스트로프는 눈치채지 못한다.
아스트로프가 떠난 후, 엘레나가 등장하며 분위기는 평화롭게 전환된다. 과거의 감정들을 해결하고자, 엘레나는 쏘냐에게 자신이 얼마나 세레브랴코프를 사랑했었는지 그러나 지금 현재는 얼마나 불행한지 고백하고, 쏘냐는 아스트로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다. 기분이 좋아진 쏘냐는 세레프랴코프에게 피아노를 연주해도 되는지 허락을 받으러 간다. 세레프랴코프에게 부정적인 대답을 들은 쏘냐는 다시 우울하다.
3막
바냐, 쏘냐, 그리고 엘레나는 세레브랴코프의 부름을 받고, 응접실에 앉아 있다. 바냐는 엘레나를 물의 정령이라고 부르며, 세레브랴코프와 이혼하고 자신에게 올 것을 종용한다. 쏘냐는 자신은 6년 동안 아스트로프를 사랑해 왔지만, 그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며, 아마도 그 이유는 자신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고 엘레나에게 하소연한다. 엘레나는 아스트로프의 마음을 알아봐 주겠다며 쏘냐를 다독인다. 쏘냐는 엘레나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한편으론 차라리 아스트로프의 마음을 확인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린다.
엘레나는 아스트로프에게 쏘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아스트로프가 자신은 쏘냐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고 말하자, 엘레나는 아스트로프를 종용하여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도록 한다. 아스트로프와 엘레나는 포옹하며 키스한다. 이때, 바냐가 등장한다. 이러한 엘레나의 행동에 분노한 바냐에게 엘레나는 용서를 구한다.
세레브랴코프가 가족 모임을 소집한 이유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엘레나는 쏘냐에게 아스트로프는 쏘냐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알려준다. 세레브랴코프는 부동산을 처분해 가족이 겪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한 후, 엘레나와 자신은 핀란드에 빌라를 하나 사들여 떠나겠다고 말한다. 바냐는 자신과, 쏘냐,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는 어디에 살라는 것이냐며 따진다. 화가 난 바냐는 급기야 교수에게 자신이 교수의 빚을 갚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쏘냐 소유의 부동산을 왜 멋대로 처리하려 드는지, 제2의 쇼펜하우어나 제2의 도스토옙스키가 될 수가 있었던 교수가 왜 실패했는지 비난하기 시작했다. 자포자기한 바냐는 어머니를 붙잡고 울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냐의 어머니는 아들을 다독이는 대신 교수의 말을 귀담아들으라며 꾸짖고, 교수는 바냐에게 모욕을 준다. 엘레나는 교수에게 어디든 멀리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고, 쏘냐는 바냐를 대신해 교수에게 잘못을 빈다. 세레브랴코프는 밖으로 나가버린 바냐를 쫓아가고, 곧 무대 뒤에서 총성이 울린다. 세레브랴코프가 무대 위로 다시 등장하고, 그 뒤를 바냐가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쫓아온다. 바냐는 교수를 향해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기지만 불발로 끝나자, 중심을 잃고 의자에 주저앉는다.
4막
(몇 시간 후) 마리나와 테레진이 세레브랴코프와 엘레나가 마을 떠나기로 한 일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때, 바냐와 아스트로프가 등장한다. 아스트로프는 자신과 바냐만이 이 마을에서 정상적인 문명인이었다고 말하며, 10년 동안의 편협한 삶이 자신과 바냐를 저속하게 만들었다며 불평한다. 바냐는 자살하기 위해 아스트로프의 병원에서 수면제가 들어있는 약병을 훔친다. 쏘냐와 아스트로프는 바냐에게 수면제를 돌려달라고 부탁한다.
엘레나와 세레브랴코프는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아스트로프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엘레나를 끌고 가 포옹하며 자신을 잊지 말라며 자신이 아끼는 펜을 선물로 준다. 세레브랴코와 바냐는 다시 전처럼 잘 지내자며 화해의 악수를 한다.
엘레나와 세레브랴코프가 떠난 후, 쏘냐와 바냐는 지급해야 할 영수증을 챙기고, 마리아는 팸플릿을 읽고 있고, 마리나는 뜨개질하고 있다. 바냐는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하소연하고, 쏘냐는 삶, 일, 그리고 저승에서 받을 보답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승에서 받은 고통을 천사들이 보답해 줄 거야. 평화롭고, 부드럽고, 달콤한 포옹과 함께…. 이승에서는 맛보지 못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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