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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물, 나타샤

안톤 체호프의 희곡 <세 자매> 中에서

by 김양훈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나타샤)-안드레이의 부인이 되는 여성. 1막에서는 세 자매의 오빠인 안드레리의 연인이었지만 2막에서는 그의 아내가 된다. 이 희곡에서 제일 무서운 여자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동안 숨겨두었던 난폭함과 저속함을 조금씩 드러낸다. 가족들 몰래 프로토포포프라는 의회의 수장과 불륜을 벌이며, 프로조로프 일가의 저택을 조금씩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세 자매>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을 꼽는다면, 많은 비평가들은 나타샤(나탈리야 이바노브나)를 지목한다. 이 인물은 단순히 세 자매의 삶에 끼어든 외부자 이상의 존재로, 체호프가 구상한 세계의 균열, 즉 몰락해 가는 지식인 계층과 부상하는 속물적 현실주의의 충돌을 가장 뚜렷하게 구현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타샤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이질적이다. 세 자매가 지닌 고상한 교양과 그들이 가진 ‘과거의 영광’에 비해 그녀는 세련되지 못하고, 언행은 촌스럽다. 그러나 이 인물의 촌스러움은 단지 사회적 계급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체호프는 나타샤를 통해 ‘생활의 힘’을 하나하나 제시한다. 그녀는 욕망을 숨기지 않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계산하며, 생존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바꾸려 한다. 이는 이상만을 좇는 세 자매와는 정반대의 태도다.

"난 정말 싫어, 그 옷 입는 꼴이라니! 꼴불견이라거나 유행에 뒤떨어졌거나, 그런 정도가 아니고, 그야말로 가엾을 정도예요. 어쩐지 괴상하고 야단스러운 누르스름한 스커트에 그따위 천덕스러운 방울장식을 달고, 거기에다 빨간 재킷을 입고 있으니, 게다가 뺨을 윤이 나게 닦아냈지 뭐예요! 안드레이가 사랑할 리 없어요, 그건 너무해요. 안드레이에게는 적어도 취미가 있는걸요. 단지 그런 척하면서 우리를 놀리고 있는 거예요.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어제 내가 들은 바로는 그 여자는 이곳 시의회 의장인 쁘로뜨뽀뽀프에게 시집을 간대요. 그게 더 좋을 거야... (옆쪽에 있는 문을 향하여) 안드레이, 이리 와요! 잠깐만! - 극 중에 <마샤가 오빠 안드레이의 연인 나타샤를 평하는 대사>
Aleksandr Bikovskii as Andrey and Ekaterina Kleopina as Natasha

극의 중반부로 갈수록 나타샤는 집안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처음엔 수줍고 불안한 신입이었지만, 결혼과 함께 빠르게 집안의 질서를 자기 방식으로 재편한다. 가정부를 해고하고, 아이들의 방을 바꾸며, 세 자매를 점점 주변으로 몰아낸다. 그녀의 이러한 행위는 탐욕적이지만 체계적이다. 체호프가 설정한 세계 속에서 나타샤는 ‘구질서의 붕괴’를 수행하는 신흥 세력의 대표자로 읽힌다. 귀족적 교양을 상징하는 프로자로프 가문은 몰락하고, 나타샤 같은 실용적 인물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타샤는 단순한 악역이 아니다. 체호프는 그녀를 도덕적으로 단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한 시대의 불가피한 변화를 들여다본다. 나타샤의 등장은 19세기말 러시아 사회의 변화를 상징한다. 귀족층의 퇴조, 도시화, 물질주의의 확산, 여성의 사회적 실리 추구 등이 모두 그녀의 성격 속에 스며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인간적 성숙이나 공동체적 가치를 대신할 만한 윤리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녀의 행동은 생존에는 유효하지만, 인간적 유대와 정서는 파괴한다.

반면 세 자매는 이상과 추억 속에 머문다. “모스크바로 가고 싶다”는 그들의 반복적 대사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이자 정체된 욕망의 상징이다. 이들의 무기력과 나타샤의 현실감각은 서로를 비추며 체호프의 주제를 강화한다. 즉, 낡은 귀족의 이상도, 새로운 속물적인 현실도 인간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타샤는 문제적이지만, 동시에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필연적이다. 그녀 없이는 체호프의 세계가 변화하지 않으며, 그녀를 통해서만 퇴폐한 이상이 완전히 붕괴될 수 있다.

나타샤는 체호프가 만들어낸 “현대성의 그림자”이다. 그녀는 현실의 승자지만, 영혼의 세계에서는 패자다. 세 자매가 ‘잃어버린 세계’를 애도하며 끝없는 그리움을 노래한다면, 나타샤는 그 애도의 감정을 무참히 덮어버리는 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대표한다. 체호프는 그녀를 통해 이상과 현실, 과거와 미래가 충돌하는 지점을 그려낸다. 그런 점에서 나타샤는 단순히 미워해야 할 인물이 아니라, 체호프적 세계의 구조적 균열을 드러내는 핵심 인물, 즉 가장 ‘문제적인’ 존재로 남는다.

<세 자매>의 비극은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가치체계의 변화 또는 사회체제의 교체 국면에서 비롯된 문명적 슬픔이다. 나타샤는 그 변화의 선두에서, 무너져가는 낭만을 실용으로 대체한다. 그녀의 등장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불가피하다. 체호프는 바로 그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슬픔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나타샤는 체호프의 세계를 가장 강렬하게 흔드는 문제적 인물로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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