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경계에 선 새로운 금융결제 질서
디지털 금융의 판도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비트코인이 ‘탈중앙화된 화폐’의 이상을 제시했다면, 스테이블 코인은 ‘안정적 디지털 화폐’라는 현실적 해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스테이블 코인은 달러·엔화·금 등 실물 자산과 가치를 연동해 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한 암호화폐다. 이름 그대로 ‘안정’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언제나 신뢰의 구조 속에서만 유지된다. 테라·루나 사태는 그 신뢰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스테이블 코인의 핵심은 ‘신뢰의 분산’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중개기관이 필요 없다. 반면, 전통적 국제결제 시스템인 SWIFT(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는 중앙집중형 신뢰 구조의 정점에 서 있다. 1973년 설립된 SWIFT는 200여 개국 11,000여 금융기관이 이용하는 글로벌 결제망으로, 국제 송금의 90% 이상이 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둘은 같은 “국제 결제”라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작동 방식과 철학은 극명히 다르다.
우선 SWIFT는 중앙집중형 신뢰 시스템이다. 은행 간 거래를 안전하게 중계하고, 국제 결제 메시지를 표준화함으로써 자금이동의 신뢰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그 대가로 속도와 효율성이 떨어진다. 송금 한 건이 여러 중개은행을 거치며, 수수료와 시간 지연이 발생한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국제 송금 수수료가 5~10%에 달하고, 자금 도착까지 며칠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반면, 스테이블 코인은 탈중앙형 네트워크를 통해 개인 간(P2P) 직접 결제를 가능케 하며, 거래 속도는 몇 초에서 몇 분에 불과하다. 수수료 또한 극히 낮다. 이는 금융의 민주화를 촉진하는 기술적 혁신이라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장점 뒤에는 그만큼의 위험과 불확실성이 도사린다. SWIFT는 국제법과 금융 규제를 기반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부정거래에 대한 법적 책임이 명확하다. 반면 스테이블 코인은 국경을 초월한 익명성과 탈규제성을 지니기에 자금세탁, 불법 송금, 테러 자금 조달의 위험이 내재돼 있다. 특히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 코인은 실물 담보가 없어, 신뢰의 붕괴가 순식간에 연쇄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점에서 스테이블 코인은 “기술로 신뢰를 대체하려는 실험”이지만, 그 실험은 언제든 인간의 신뢰를 다시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방향으로 대응해야 할까?
첫째, 스테이블 코인의 신뢰 구조를 제도적으로 보강해야 한다. 스테이블 코인을 단순한 민간 화폐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의 금융 규제 틀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 발행 주체의 담보 보유 현황을 공개하고, 외부 회계감사를 의무화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한국은 이미 테라 사태를 통해 ‘감독의 부재가 얼마나 큰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오는가’를 경험했다.
둘째,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와의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 한국은행이 추진 중인 CBDC는 국가가 신뢰를 보증하는 디지털 화폐로, 스테이블 코인과 달리 법적 기반 위에 서 있다. CBDC가 ‘공공의 신뢰’를 담당한다면, 스테이블 코인은 ‘민간의 혁신’을 상징한다. 두 화폐를 대립적으로 보기보다, 규제된 공존 모델 속에서 병행 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대형 금융기관이 CBDC 기반 결제망을 운영하면서 민간 스테이블 코인을 보완적으로 활용한다면, 효율성과 신뢰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셋째, 국제 공조 체계의 강화가 필수적이다. 스테이블 코인은 국경을 초월하기 때문에 국내 규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한국은 미국 SEC, EU의 MiCA(암호자산시장규제) 등 국제 규제 틀과의 정합성을 높여야 한다. 나아가 아시아 금융권과 협력하여 공동 결제 표준을 만들고, 스테이블 코인을 활용한 역내 결제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도 있다. 이는 SWIFT 중심의 서구 금융질서에 대한 새로운 균형점이 될 수 있다.
넷째, SWIFT와 스테이블 코인의 상호보완적 역할을 재평가해야 한다. SWIFT는 신뢰와 법적 안전망을 제공하는 대신 느리고 비싸다. 스테이블 코인은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신뢰의 근거가 불안하다. 따라서 장기적으로는 두 시스템이 경쟁하기보다는 ‘하이브리드 결제 생태계’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SWIFT가 블록체인 기술을 일부 도입하고, 스테이블 코인은 규제된 금융망 안으로 편입되는 식이다. 실제로 SWIFT는 이미 블록체인 기반 결제 실험을 진행 중이며, 이는 ‘신뢰의 중앙화’와 ‘자율의 분산화’ 사이의 절충을 모색하는 흐름이다.
결국,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기술의 속도보다 신뢰의 속도에 맞춘 금융정책”이다. 스테이블 코인은 혁신의 이름으로 기존 질서를 흔들지만, 신뢰가 없는 화폐는 결코 화폐가 될 수 없다. 반대로, SWIFT 같은 제도권 금융은 신뢰를 보장하지만 변화에 둔감하다. 진정한 금융 선진국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나라가 아니라, 신뢰와 혁신의 균형을 설계하는 나라다. 한국은 그 경계 위에서, 디지털 화폐 시대의 새로운 금융 질서를 스스로 설계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