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번역의 푸시킨 詩
겨울 밤
푸시킨
눈보라 뭉게뭉게 소용돌리며
모진 바람 눈안개로 하늘 가린다
짐승인 듯 볼을 털고
아이처럼 울음 울고
고삭은 짚이엉에 와
갑자기 밀짚을 뒤설레 놓고
갈 길 저문 나그네 같이
내 집 영창을 두들기고
우리네 낡은 오막살이
어두워라 구슬퍼라,
여보서요 할멈, 어인 일로
창가에 잠잠 말이 없는가?
혹시나 눈보라 울부짖는 소리
할멈이여, 그 소리에 지치였나
혹시나 물레 도는 부르렁 소리
당신의 졸음을 부르는가?
마시자, 가난한, 이 내 청춘의
정답고 살틀한 벗아
홧술을 마시자, 잔은 어디?
마음은 한결 흥겨워질라
노래를 나에게 불러 다오
바다 건너 평화롭던 비비새 노래
노래를 나에게 불러 다오
아침물 길러 가던 처녀의 노래
눈보라 뭉게뭉게 소용돌리며
모진 바람 눈안개로 하늘 가린다.
짐승인 듯 볼을 털고
아이처럼 우노나
마시자 이 내 청춘의
정답고 살틀한 벗아
홧술을 마시자, 잔은 어디?
마음은 한결 흥겨워질라. (1825년)
[詩評]
푸시킨의 「겨울 밤」(Зимний вечер)은 혹한의 자연 풍경을 통해 인간 내면의 고독과 삶의 비애, 그리고 이를 견뎌내게 하는 사람 사이의 우정을 갈구하는 작품이다. 푸시킨의 시를 번역하는 데 있어 백석은 언어 전환을 넘어서, 러시아적 정조(tone)와 한국적 정서를 교차시키는 그만의 미학적 능력을 보여준다. 백석의 번역을 읽는 우리는 러시아의 눈보라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조선 농가의 따뜻한 사랑방에 앉아 있는 듯한 정서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백석 번역의 힘이며, 그의 문학적 감성이 발휘되는 지점이다.
시의 첫 연에서 “눈보라 뭉게뭉게 소용돌리며/모진 바람 눈안개로 하늘 가린다”라는 표현은 원문의 ‘вьюга мело́вит, и кру́тит(뷔우가 멜로비트, 이 크루티트)’의 동적 이미지를 그대로 살리면서도, “뭉게뭉게”라는 의성어를 사용해 눈보라의 회오리뿐 아니라 시각적 부드러움과 감각적 질감을 동시에 표현한다. 러시아의 혹독한 자연이 차갑고 잔혹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을 휘감는 생생한 정감으로 다가온다. 또한 “짐승인 듯 볼을 털고/아이처럼 울음 울고”는 자연을 의인화한 원문의 정조를 한국적 어법으로 번역함으로써, 혹한 속 자연의 야성성과 나약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백석은 ‘볼을 털고’라는 일상에서의 신체 묘사를 통해, 바람과 눈보라만을 시의 배경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피가 흐르는 인간을 비유적으로 자연 속에 재현한다.
두 번째 연에서 등장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인간적 따스함을 향한 갈망으로 전환된다. “여보서요 할멈, 어인 일로/창가에 잠잠 말이 없는가?”라는 구절은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 사이의 정겨운 호칭과 노년의 비애를 담는다. 백석이 선택한 “할멈”이라는 단어는 러시아어 원문의 ‘старушка(스따루시카)’가 가진 애잔한 분위기를 정확히 되살리고, ‘오막살이’라는 표현은 러시아 농가의 빈곤함을 한국 산골의 겨울로 옮겨놓는다. 그 결과 백석 번역의 시는 러시아의 정서가 아니라 한국인의 삶과 자연스럽게 접속되는 정조를 갖게 한다.
또한 “마시자, 가난한, 이 내 청춘의/정답고 살틀한 벗아”라는 대목은 원문의 정감을 감각적으로 확대한다. ‘살틀한’이라는 단어는 백석이 가진 언어 감각이 빛나는 지점이다. 따뜻하면서도 살결을 만지는 듯한 온기를 가진 이 단어는 술과 벗, 그리고 삶의 온기라는 세 가지 의미를 하나로 묶는다.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 일상의 끝에 붙잡는 것은 부와 명예와 영광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체온과 기억의 노래와 함께 나누는 술 한 잔인 것이다.
시의 반복 구조는 자연의 폭력성과 인간 정서의 순환을 강조한다. 첫 연에서의 눈보라가 마지막 연에 다시 등장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대화와 노래, 술을 권하는 정감은 폭풍을 단순한 절망의 풍경으로 끝내지 않는다. 눈보라 속에서도 마음은 “한결 흥겨워질라”라는 말은 위안의 문장일 뿐 아니라 고통을 견디는 따뜻한 우정의 풍경이다.
이처럼 백석은 푸시킨의 시를 원문보다 더 절실하고 더 따뜻하게 만든다. 푸시킨이 표현한 고독과 비애는 백석의 언어를 통해 한국적 정한(情恨)과 공동체가 지니는 연대의 감정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