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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Oct 19. 2023

구엄리 이야기 셋

4. 셋째 이야기-두 어머니 (그림 by 김양훈)


구장댁

1948년 이 해도 구엄리 마을은 여느 동네처럼 보릿고개를 넘고 있었다. 어머니들은 하루하루 비어 가는 고팡 쌀독을 볼 때마다 마음이 심란했다. 그래도 경칩이 지나며 초록색이 짙어지는 보리밭이 위안이었다. 겨우내 아이들이 연을 날리며 밟은 보리밭은 파릇파릇 이파리들이 바닷바람에 싱그러웠다. 종다리들이 짹짹대며 보리밭을 차고 푸른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장승처럼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늙은 폭낭의 휘어진 가지에는 새싹들이 녹두알처럼 매달렸다. 우영팟에는 봄동과 갯무가 피어낸 장다리꽃에 벌 나비가 분주히 날아다녔다. 


따스워진 봄볕에 어머니들은 겨울 동안 모아두었던 빨랫감과 가마솥단지를 지고 바닷가로 향했다. 지들커를 등에 진 꼬마들이 엄마 뒤를 따랐다. 어머니들은 때 절은 겨울옷을 하나하나 펴 비누를 쓱쓱 문질러 가마솥에 넣고 푹 삶은 다음, 미운 세상에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방망이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쪄낸 옷을 쾅쾅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땟물이 그럭저럭 빠지면 이리저리 헹궈서 봄볕에 데워진 빌레 위에 가득 널었다. 빨래를 마치면 아이들 때 벗길 차례였다. 가마솥에 다시 물을 끓이고 아이들을 홀라당 벗겨 겨울 때를 밀었다. 억센 어머니 손을 견디느라 아이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마침내 엄마 손에서 해방된 아이들이 까르르 대는 웃음소리가 바닷가에 가득했고, 작은 파도가 알작지 신다리내 자갈돌을 굴리며 또르르 다가왔다 이내 또르르 물러갔다. 여느 마을처럼 구엄리도 평화로웠다. 그러나 이런 일상이 폭풍전야의 평온함인 줄을 사람들은 몰랐다.


구엄리는 해방 직후부터 우익활동이 왕성한 동네였다. 일제강점기 중반부터 구장을 지낸 마을 유지의 영향 때문이었다. 구장은 지금의 이장에 해당하지만, 일제는 지역에 대한 행정력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지역 유력자를 뽑아 자기들 입맛에 맞게 부려먹었다. 문 구장은 기골이 장대하고 언변이 좋았으며 용모도 훤칠했는데 해방 이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간부직을 맡았다. 그리고 경무부장 조병옥이 제주에 내려와 좌익척결을 외친 후에는 대동청년단을 지원하고 나섰다. 그의 영향력으로 구엄리 청년들은 대거 지서 보조원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경찰에 투신하는 사람도 많았다. 


구엄리가 결정적으로 좌익진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47년 3·1절 28주년을 맞이해 발생한 '3·1 사건' 때였다. 이날 각 읍면의 마을 사람들은 제주시 북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몰려가 3·1절 시위에 참가하였는데, 구엄리 사람들의 참가율이 매우 낮았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백창원을 비롯한 신엄리 청년들이 삼일절 시위 이튿날 구엄리로 몰려와 우익청년단원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은 좌익과 우익진영 사이에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4월 3일 무장봉기가 시작된 새벽 구엄리는 산사람들이 노리는 습격대상 1호 마을이 되었다. 이후 구엄리는 11월 9일과 12월 19일, 두 차례 더 무장대의 습격을 받았다. 


1948년 4월 3일 이른 새벽에 무장대가 오름마다 봉기의 횃불을 올린 그 날 음력 이월 스무나흘은 문 구장 할머니 식갯날이었다. 시할망 식개를 하루 앞둔 한밤중, 구장댁은 정지에서 제사음식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안거리 큰방에는 문 구장이 누워 있었고, 아랫방에는 열네 살 큰딸과 열 살 먹은 작은 딸이 잠자고 있었다. 누나들 옆에는 두 살배기 막내가 수리대를 엮어 만든 애기구덕에 뉘어 있었다. 밖거리에는 창호지 바른 큰 방이 하나 있었는데, 시내 농업학교에 다니는 큰아들과 열두 살짜리 작은아들이 함께 잠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소리를 죽인 채 문 구장 집을 포위한 무장대는 먼저 안거리부터 덮쳤다. 선잠에서 깨어난 문 구장은 인기척이 나자마자 살기를 느끼고 뒷문을 통해 도망쳤다. 문 구장을 놓친 무장대는 화풀이라도 하듯이 열네 살 큰딸과 이어 열 살 작은딸을 죽창과 칼로 배와 팔목을 마구 찔러 살해하였다. 두 누나 옆 애기구덕 안에서 잠자던 막내 두 살배기 아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소란과 고함에 잠이 깬 큰아들이 도망치려다 무장대에 붙잡혔다. 그의 양쪽 어깨를 잡고 무장대원이 일본도로 내리치려 하는 순간 덩치가 큰 큰아들은 필사적으로 이들을 뿌리치고 마당 밖으로 도망쳤다. 무장대와 형이 사투를 벌이는 동안 잠이 깬 작은아들은 재빠르게 정지에 있는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구장댁은 이 와중에 울담 너머로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집 안에 남겨진 어린 자식들 걱정으로 피가 말랐다. 죽음의 공포로 사지가 떨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무장대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돌아갈 때까지 구장댁은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장대 습격이 조용해질 무렵, ‘도둑년 뭍은 테역’ 소나무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구장댁은 고양이처럼 집 마당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구장댁은 눈앞에 벌어진 처참한 광경에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안방에는 죽창에 배가 찔려 무참하게 살해된 채 피투성이가 된 어린 두 딸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날 새벽 구엄리를 습격한 무장대는 120명이 넘는 대부대였다. 이날 습격으로 사망자만 아홉 명이었다. 


이날의 충격으로 구장댁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한창 피어나는 두 딸을 지켜주지 못한 어미로써 죄책감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세 아들은 장성한 나이가 되자 하나둘 구엄을 떠났고, 문 구장은 신작로로 올라가는 마을 길목에 방앗간을 세웠다. 이후 한 일 자로 입을 굳게 닫아버린 그는 방앗간 아저씨로 여생을 마감했다.


새댁 송옥춘

구엄리 서쪽 해변 절벽 위에는 '모징개'라는 테역밭이 있다. 동쪽으로는 서치강굴과 돌염전 터가 있고, 더 나아가 구엄포구 철무지개를 지나면 이웃마을 가문동이다. 반대편 서쪽으로는 완만한 고갯마루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해안도로가 고내포구를 거쳐 애월포구까지 꼬불꼬불 이어진다. 나는 모징개는 ‘모진 바닷가’라는 뜻이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 이곳을 모징개 불렀는지 지금껏 알 길이 없다. 이곳에 어두움이 내리면 인적은 끊기고 바람만 불었다. 


이 삭막한 모징개 테역밭은 오랜 옛날부터 갓난아기들의 무덤 터였다. 가을부터는 키 작은 갯쑥부쟁이꽃이 만발했다. 바다 쪽으로는 직각에 가까운 '몰털어진 기정'이 솟아 있다. 말들이 어쩌다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해서 생긴 이름이라 전해진다. 달 밝은 밤은 인적이 딱 끊겨 괴괴했다. 그래서 동네 처녀 총각이 남몰래 정분을 나누는 미밀 장소가 되었다.


제주4·3항쟁 와중에 수난을 당한 새댁 송옥춘의 가여운 아기도 이곳에 묻혔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갓난아기나 젖먹이가 죽으면 어미 몰래 이곳에 묻었다. 아기 잃은 슬픔을 잊으라고 그랬을까! 그러나 이곳 자그만 돌무덤 사이로 발길이 사방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어미들이 정처 없이 헤매던 흔적이 아니면 무엇이랴.


무장대가 세 번째로 구엄리를 습격한 것은 1948년 12월 19일이었다. 이날 습격으로 가옥 서른 채가 소실되고 마을 주민은 스무 명 넘게 희생됐다. 신작로에 있던 일신학교 학교 건물도 무장대의 방화로 모두 타버렸고 숙직과 경비를 서던 교사는 한 사람만 빼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날 밤, 무장대의 습격 와중에 살아남은 새댁 송옥춘의 남편은 좌익으로 의심을 받아 경찰에 끌려갔다. 다른 교사들은 무장대에 죽임을 당했는데도 남편만 살려준 게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남편을 붙잡아간 경찰은 스물한 살 새댁 송옥춘도 가만두지 않았다. 집에 있으면 잡아가 때리다 돌려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잡아가 때리고 군홧발로 짓밟기를 반복했다. 아홉 번째 불려 갈 때였다. 새댁은 어린 아기를 데리고 가면 혹시나 덜 때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개월 갓 넘은 아기를 품에 안은 채 새댁은 다시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날 새댁은 남편과 경찰서 취조실에서 잠깐 만났다. 남편은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자포자기 상태였다. 고초를 겪고 있는 아내를 안타깝게 여긴 남편이 경찰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죄가 없다. 풀어줘라. 이혼하겠으니 앞으로 부르지 말라.“


그렇게 남편은 경찰들 앞에서 이혼 도장을 찍고 새댁과의 인연을 놓았다. 그런데 그날 새댁은 남편과의 인연뿐 아니라, 아기도 잃었다. 경찰서 조사를 받는 와중에 젖이 고픈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경찰이 시끄럽다며 개머리판으로 아기 머리를 내리쳤다. 아기의 머리에서 '퍽' 소리가 나고 아기는 울음을 뚝 그쳤다. 


새댁은 경황이 없어 아기가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축 늘어진 아기와 함께 풀려난 새댁은 친정인 구엄리로 돌아왔다. 넋이 빠진 채 친정집으로 돌아온 제 딸이 안고 있는 아기를 들쳐보던 친정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죽은 아기는 뭐 하러 데려왔어. 시집에 가서 두고 오지 왜 여기를 데리고 왔어!“ 


새댁은 그제야 아기의 죽음을 알아챘다. 짓밟힌 등허리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자리에 주저앉은 그녀는 땅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몇 날 며칠 실성한 채 울며 지새는 새댁 손녀에게 할머니가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네 어미가 남들이 아기를 낳지 않는 날에 너를 낳아서 그렇단다. 네 고통은 삼신할망이 내리신 거다. 살암시믄 살아진다.” 


그러나 새댁 송옥춘은 자신도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남편과 아기를 그렇게 보내고 몇 년 후, 친정아버지는 친정집과 멀지 않은 길가에 자그만 초가를 딸에게 마련해 주었다. 오빠와 남동생은 제주 성안에서 공무원을 했다. 스스로는 지은 죄가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출가외인 새댁은 자신이 겪은 악몽과 같은 좌익 누명이 친정 피붙이들에게 해가 될까 봐 늘 좌불안석이었다. 


나지막한 울담 너머로 보이는 송옥춘의 작은 흙 마당은 언제나 깨끗하고 단정했다. 마당 곁 우영팟에는 가지가지 송키들이 자랐다. 마당과 우영팟 경계석으로 괴어 놓은 돌 사이에는 화초들을 심었다. 채송화, 분꽃, 기생초, 과꽃, 맨드라미, 하나 같이 소박한 시골 꽃들이었다. 


그녀는 아무하고도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농사일도 수눌음 없이 혼자 했다. 표정 변화도 없고 사람과 말을 섞는 일도 없었다. 사람들이 인사말이라도 건넬라치면 엷은 미소를 힐끗 보내고 도망치듯 지나쳤다. 젊은 나이에도 꾸부정한 허리에 팔을 사방으로 휘저으며 헤엄치듯 길을 걸어 다녔다. 경찰서에 잡혀가 마구잡이로 구타를 당할 때 배 쪽을 맞으면 죽을 것 같아 그녀는 잔뜩 웅크렸다. 경찰은 새댁의 등허리를 군홧발로 마구 짓밟았다. 그 후유증으로 노파처럼 허리가 굽은 그녀는 마치 살아있어도 없는 존재처럼 마을에서 늙어갔다. 그녀는 우익 마을 구엄리의 살아있는 유령이었고, 외로운 섬이었다. 


무서움과 두려움은 사람들의 가슴과 머리에 오래 머물렀다. 마을은 제주4·3이 빚은 참극에 대해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스물세 살 새댁은 60년이 지난 후 여든세 살 할머니가 되어서야 가슴속 한 많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2009년 3월 31일, 제주4·3의 참상을 증언하는 본풀이 마당에서였다. 숨겨졌던 마을의 아픔과 상처에 마을의 후예들은 놀랐다. 비극의 진상을 제 때에 알 수 없었고, 역사의 교훈을 올바르게 배우지 못했다. 모두가 죄인이었다. 


에필로그

-낯선 고향 바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 풍경은 낯설다. 바닷가는 이제 아이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1997년, 마을 동쪽 가문동에서 시작해 내깍과 돌염전을 지나고 모징개 동산을 넘어 서쪽 애월포구까지 길이 10km의 2차선 해안도로가 개통됐다. 모시(牛馬)가 꾸역꾸역 지나가고 테왁 진 좀녀(潛女)들이 오가던 오붓한 길이 날랜 자동차 길로 변했다. 차라리 빈 바다가 좋았다. 아름다웠다. 한적했던 해안 주변에 외래자본이 몰리면서 뭐라도 되는 듯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고 개발은 가속되고 있다. 한편 원주민은 도시적 상업문화에 못 견뎌 내몰리고 소외되었다. 소위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다. 원형을 잃은 고향의 추억담은 쓸쓸하다. 그래서 옛날부터 말하길 고향이란 마음속에나 있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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