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지나이다 니꼴라예브나 기삐우스
밑바닥까지
지나이다 기삐우스
너를 환영한다, 나의 패배여,
너와 승리를 나는 똑같이 사랑한다.
내 오만의 밑바닥에는 겸손이 깃들어 있고,
기쁨과 고통은 언제나 하나이므로.
고요 속에 잦아든 물결 위로
저녁 빛이 환한데도, 도처에 안개가 서성인다.
그렇게 최후의 잔인함 속에는 무한한 다정함이,
신의 진실 속에는 기만이 숨어 있는 법.
나는 나의 한없는 절망을 사랑한다.
기쁨은 최후의 한 방울 속에 주어지므로,
지금 내가 아는 확실한 한가지는
모든 잔은 밑바닥까지 비워야 한다는 것. (1901)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이명현 엮고 옮김) 창비세계문학 35
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 (5)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의 '대모'라 불리는 지나이다 니꼴라예브나 기삐우스(Zinaida Nikolayevna Gippius)의 시 「밑바닥까지」는 역설의 미학이 정점에 달한 작품이다. 시평과 작품의 배경, 그리고 시인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덧붙인다.
1. [詩評] 역설과 통합의 미학
이 시의 핵심 키워드는 '양면성의 일치'다. 시인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서로 반대되는 가치들이 사실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통찰한다.
•패배와 승리의 동일시: "너를 환영한다, 나의 패배여"라는 첫 문장은 도발적이다. 시인은 승리뿐만 아니라 패배조차 삶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오만함 속에 겸손이 있고, 고통 속에 기쁨이 있다는 인식은 불교의 '색즉시공'이나 변증법적 합일과도 닮아있다.
•잔인함 속의 다정함: 저녁 빛과 안개가 공존하듯, 신의 진실과 기만, 잔인함과 다정함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이는 인간이 겪는 비극적 운명조차 거대한 우주의 질서 안에서는 반드시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밑바닥'의 철학: 시의 제목이기도 한 '밑바닥'은 고통의 끝을 의미한다. 기쁨은 적당히 마실 때가 아니라, 고통과 절망이라는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비웠을 때 비로소 찾아오는 '최후의 선물'이다. 즉, 절망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고 끝까지 견뎌내는 자만이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실존적 결단을 보여준다.
2. 창작 배경: 세기말의 우울과 영성
이 시가 쓰인 1901년은 러시아 제국 말기, 이른바 '은의 시대(Silver Age)'가 시작되던 시기다.
•시대적 불안: 당시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는 구체제가 무너져가는 불안감과 새로운 세기에 대한 갈망이 뒤섞여 있었다. 이러한 '세기말(Fin de siècle)'적 정서는 허무주의와 신비주의를 동시에 낳았다.
•종교적 탐구: 기삐우스는 남편 드미트리 메레쥬꼬프스끼와 함께 '새로운 종교 의식'을 주창했다. 그녀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넘어, 육체와 정신, 악과 선이 통합되는 새로운 영적 세계를 꿈꿨다. 이 시에 나타난 역설적인 표현들은 바로 이러한 신비주의적 종교관을 반영하고 있다.
3. [詩人] 지나이다 니꼴라예브나 기삐우스 (1869~1945)
기삐우스는 20세기 초 러시아 문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사람이자, 매우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상징주의의 여왕: 러시아 상징주의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그녀의 집은 당시 예술가들이 모여 토론하는 가장 유명한 문학 살롱이었다.
•중성적 이미지: 그녀는 종종 남성복을 입거나 남성 필명(안똔 끄라이니)으로 평론을 쓰는 등, 성별의 경계를 허무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는 그녀의 시 세계가 추구하는 '대립물의 합일'과도 맥을 같이 한다.
•치밀한 지성: 그녀의 시는 감상적이기보다 지적이고 차갑고 정교하다. '사탄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가졌지만, 그 내면에는 절대적 진리와 신을 향한 갈망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망명 생활: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여 파리로 망명했으며,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요약하자면
이 시는 "삶의 모든 고통과 절망을 회피하지 말고, 그 잔을 밑바닥까지 비워낼 때 비로소 진정한 생의 기쁨과 신의 섭리를 만날 수 있다"는 강인한 정신력을 노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