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아무도 없으리

by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by 김양훈

집에 아무도 없으리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집에 아무도 없으리

땅거미만 머물 뿐, 커튼 걷힌

창으로 투명하게 내비치는

어느 겨울날.


축축한 흰 눈덩이만

구르는 바퀴처럼 한순간 아른거릴 뿐

오로지 지붕들, 눈,

지붕과 눈 말고는 아무도 없네.


또다시 성에가 그림처럼 맺히고,

또다시 나는 해묵은 우울과

새로운 겨울의 일들로

분주해지리.


지금껏 용서받지 못한 과오로

다시금 아리는 가슴.

창문은 십자형 창살로

부족한 장작을 압박한다.


그런데 문득 두터운 커튼이

홀연히 떨리면서

정적을 헤아리는 발걸음으로

마치 미래처럼, 너는 들어오리.


너는 문 앞에 나타나리,

어느 흰옷 차림으로, 다소곳이,

눈송이로 짠 듯한 옷감으로

지은 옷을 입고서. (1931)


러시아 현대대표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이명현 엮고 옮김) 창비세계문학 35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1931년 작 「집에 아무도 없으리」는 고립된 개인의 내면 풍경과 다가올 상황에 대한 형이상학적 기다림을 겨울이라는 배경 속에 응축해낸 작품이다.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스테르나크 특유의 시각적 이미지즘과 더불어, 1930년대 초반 소련이라는 엄혹한 시대적 압박이 시인의 내면에 드리운 그림자를 동시에 읽어내야 한다.

[詩評]

결빙된 침묵을 깨는 미래의 발소리

1. 공간의 시학: 비어 있음과 가득 참의 역설

시의 시작은 철저한 비어 있음을 선언한다. ‘집에 아무도 없으리’라는 반복적 진술은 물리적 고립을 넘어 주체의 실존적 단절을 의미한다. 여기서 겨울날의 ‘땅거미’와 ‘투명하게 내비치는 창’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허물며, 화자의 내면을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노출시킨다.

눈에 띄는 것은 2연의 묘사다. 지붕과 눈뿐인 풍경 속에서 ‘축축한 흰 눈덩이’만이 바퀴처럼 구른다. 이는 정지된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역동성이지만, 그것은 생명력이기보다 오히려 황량함을 배가시키는 무심한 물리적 운동에 가깝다. 파스테르나크는 여기서 인간이 배제된 자연의 날 선 감각을 통해, 혁명 이후 집단주의적 열광이 휩쓸고 간 뒤 홀로 남겨진 개인의 고독을 형상화한다.

2. 기억의 시학: 성에와 십자형 창살의 고통

3연에서 성에는 ‘그림처럼’ 맺힌다. 성에는 창밖에 맺히는 자연 현상이지만, 화자에게는 ‘해묵은 우울’과 ‘새로운 겨울의 일’을 환기하는 매개체다. 파스테르나크에게 시적 작업은 늘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감각으로 치환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4연의 ‘십자형 창살’과 ‘부족한 장작’의 이미지는 매우 암시적이다. 창살은 외부를 조망하는 통로인 동시에 화자를 가두는 구속의 상징이다. ‘용서받지 못한 과오’로 인해 아린 가슴은 십자형 창살이라는 기독교적 고난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화자가 겪는 고통에 종교적·윤리적 숭고함을 부여한다. 부족한 장작은 생존의 결핍을 의미하며, 이는 당시 소련의 궁핍한 현실과 시인이 느꼈던 정신적 고갈을 동시에 은유하고 있다.

3. 미래의 시학: 눈송이 옷감을 입고 오는 ‘너’

이 정체된 우울을 깨뜨리는 것은 5연의 급격한 반전이다. 정적 속에 ‘홀연히’ 떨리는 커튼은 정지된 시간에 균열을 내고 있다. 여기서 ‘너’는 단순한 연인이나 타인을 넘어 ‘미래처럼’ 들어오는 존재다. 파스테르나크에게 미래는 계획된 정치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예고 없이 찾아오는 신비로운 생명력이자 구원이다.

‘눈송이로 짠 듯한 옷감’을 입은 흰옷 차림의 ‘너’는 겨울의 차가운 속성을 공유하면서도, 그것을 ‘아름다움’과 ‘다소곳함’으로 변모시킨 존재다. 이는 가혹한 현실(겨울/눈) 속에서도 인간적 고귀함과 서정적 진실이 살아남아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라는 시인의 믿음을 상징한다.

4. 시대적 배경: 스탈린 체제와 예술가의 은신처

이 시가 쓰인 1931년은 소련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전환기였다. 1920년대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예술적 풍토가 사라지고, 스탈린의 1차 5개년 계획과 함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압박이 예술가들을 옥죄기 시작한 시기다.

▫정치적 고립: 당시 파스테르나크는 혁명의 대의에 전적으로 동조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으며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으리’라는 선언은 외부 세계(사회적 소음)로부터 자신을 격리하고 순수한 서정의 세계로 침잠하려는 시인의 자기 보호적 선언이기도 하다.

▫지식인의 죄책감: 4연의 ‘용서받지 못한 과오’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지식인의 부채의식, 혹은 동료 문인들이 숙청당하거나 자살(1930년 마야콥스키의 자살 등)하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가 느끼는 형이상학적 죄책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서정적 저항: 이 시는 정치적 구호가 가득했던 당대의 문학적 경향에 반하여, 철저하게 개인적인 고독과 미학적 서경에 집중한다. 이는 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투쟁이라기보다, 인간 내면의 성소(Sanctuary)를 지켜냄으로써 권력에 저항하는 ‘내면의 망명’과 같은 태도다.

겨울의 끝에서 기다리는 존재의 광휘

결국, 파스테르나크의 「집에 아무도 없으리」는 혹독한 겨울로 상징되는 시대적 압박 속에서도, 예술적 영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어떻게 주체의 내면으로 진입하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비어 있는 방, 차가운 성에, 십자형 창살이라는 고통의 기표들을 지나, 눈송이처럼 투명하고 순결한 ‘너(미래/구원/시적 진실)’를 맞이한다. 이는 암흑의 시대에도 시적 언어는 멈추지 않으며, 진정한 미래는 권력의 명령이 아닌 정적을 헤아리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찾아온다는 시인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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