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지나이다 기삐우스
거미
지나이다 기삐우스
나는 숨통 조이는 감방 안에 있다.
감방은 이 세상이다
숨통 조이는 감방은 낮게 내려앉는다
사방 구석에
네 마리의 지칠 줄 모르는 거미가 꿈틀거린다.
교활하고 기름지고 더러운 거미
그들은 자꾸만 자꾸만 자꾸만
거미줄을 짠다….
단조롭고 끊임없는 거미의 노동
무섭기만 하다.
사방의 거미줄이 한데 모여 거대한 올가미가 되고
사악하고 음침한 먼지 속에서
그들의 등판이
꿈틀거리는 게 보인다.
나의 눈동자 역시 거미줄에
부드럽고 끈끈한 회색 거미줄에 걸리고
네 마리의 살찐 거미는
즐거워한다.
석영중 옮기고 엮음, 『레퀴엠』혁명기 러시아 여성시인 선집(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中
지나이다 기삐우스(Zinaida Gippius)의 시 <거미>는 상징주의 문학의 정수이자, 세기말적 퇴폐미와 영적 고뇌가 응축된 작품이다. 이 시는 단순한 공포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립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거미’라는 강렬한 메타포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1. [시평] 끈적이는 허무와 존재의 감옥
이 시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공간의 설정이다. 시인은 세계를 '숨통 조이는 감방'으로 규정한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육신을 영혼의 감옥으로 보던 시각과 맞닿아 있으며, 동시에 당대 러시아 사회의 폐쇄성을 암시한다.
네 마리의 거미: 시간과 공간의 지배자
사방 구석에서 실을 뽑아내는 네 마리의 거미는 동서남북, 혹은 사방팔방에서 조여 오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나 죽음의 전조를 의미한다. 그들은 '지칠 줄 모르고', '교활하며', '기름지다'. 여기서 거미의 노동이 '단조롭고 끊임없다'라는 묘사는 삶의 권태가 주는 공포를 극대화한다. 거미줄이 모여 '거대한 올가미'가 되는 과정은 개인이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의 질서나 소멸의 과정을 시각화한 것이다.
회색의 미학
시의 색채는 '회색'과 '먼지'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생명력이 거세된 상태를 뜻한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의 눈동자가 거미줄에 걸리고, 거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은 자아의 완전한 패배를 선언한다. 화자는 관찰자에서 포획물로 전락하며, 독자는 숨 막히는 질식감을 공유하게 된다.
2. 시대적 배경:
은의 시대(Silver Age)와 세기말
이 시가 쓰인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의 러시아는 소위 '러시아 문학의 은의 시대'로 불린다. 푸시킨으로 대표되는 금의 시대가 명료함과 형식을 중시했다면, 은의 시대는 신비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극도의 비관론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세기말적 불안(Fin de siècle):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 예감, 산업화의 가속도, 혁명의 기운이 뒤섞여 지식인들 사이에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다.
•러시아 상징주의: 기삐우스는 상징주의의 선구자였다. 이들은 현실 너머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갈망하면서도, 현실의 추악함(거미, 먼지, 감옥)을 극단적으로 묘사하여 그 괴리감을 표현했다.
•사회적 질식: 제정 러시아 말기의 검열과 억압적인 분위기는 지식인들에게 세상을 '숨통 조이는 감방'으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3. 시인 지나이다 기삐우스:
"데카당스의 여왕"
지나이다 기삐우스(1869–1945)는 러시아 상징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자 논란의 중심에 있던 여성이었다.
영적인 선동가
그녀는 단순히 시를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남편인 드미트리 메레즈콥스키와 함께 새로운 종교적 의식을 주도했다. 그녀는 '제3의 성'을 꿈꾸며 남성적인 이름으로 비평을 쓰거나 남장을 즐기기도 했는데, 이는 기존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거부하는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냉혹한 지성
기삐우스는 '회색 눈의 마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통찰력과 독설로 유명했다. <거미>에서 보여주는 냉소적이고도 치밀한 묘사는 그녀의 성격과도 닮았다. 그녀에게 문학은 위안이 아니라, 영혼의 밑바닥에 도사린 심연을 응시하는 도구였다.
망명과 고독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악마의 승리'라 비판하며 파리로 망명한 그녀는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지켰다. 그녀의 시가 주는 서늘한 공포는 실제 그녀가 겪었던 시대의 격변과 그 속에서 느낀 인간 존재의 무력함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4. 종합적 고찰
지나이다 기삐우스의 <거미>는 단순히 '거미가 무섭다'라는 정서를 노래한 시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거미가 짜놓은 그물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다룬다.
시 속의 거미줄은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단조로운 노동'일 수도 있고, 우리를 옭아매는 '사회적 제도'일 수도 있다. 100년도 더 된 이 시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이유는, 현대인들 역시 각자의 '회색 거미줄'에 걸린 채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감옥 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