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by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by 김양훈

햄릿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소란이 멎었다. 나는 무대로 나갔다.

문설주에 기대어 먼 메아리 속에서

나의 세기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포착해 본다.

한밤의 어둠이 수천의 쌍안경으로

나를 겨누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 하느님이여,

이 잔이 나를 비켜 가게 하소서.¹

나는 당신의 완고한 뜻을 사랑하며

기꺼이 이 역을 맡겠나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극이 상연되고 있으니

이번에는 나를 면하게 하소서.


하지만 막의 순서는 짜여 있고

길의 끝은 피할 수 없다.

홀로인 나. 다들 바리새주의²에 빠져든다.

삶을 사는 것은 들판을 건너는 것이 아니다. (1946)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시선집

『끝까지 살아 있는 존재』 中.

[註]
1)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가 한 기도의 말(「마가복음」 14장 36절);
“이르시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2) 바리새주의는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에 존재했던 유대교의 경건주의 분파입니다. 이들은 중간계급 평신도 경건주의를 추구하며,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반대하며, 율법과 전통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카비 혁명 당시 헬레니즘에 대항해 전통 유대교를 수호하려는 열정으로 혁명에 가담했으나, 마카비 가문이 왕권을 잡으면서 점차 세속화되자, 바리새인은 정치권력에서 멀어지고 영적 순결을 유지하는 종교적 무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 바리새인은 유대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적 지도층 중 하나였습니다.
루가의 복음서 13장 31절에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헤롯이 랍비를 죽이려고 하니까 몸을 숨기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흔히 기독교인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과 달리 바리새인이라고 해서 예수에게 반대한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서 23장 13절-33절을 근거로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비난했다고 보는 해석도 있지만,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과 대립이 투영된 이야기로 보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애쓴 바리새파들의 경건한 신앙은 기독교에도 영향을 주어, 고대교회는 마태복음서와 야고보서라는, 신앙과 삶의 일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독교 전통을 만들어냈다.
예수의 제자 중에 바리새파 출신 인물로는 사도 바울로, 니코데모가 있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 <햄릿>은 그의 소설 《닥터 지바고》의 부록인 '유리 지바고의 시' 제1편으로 실린 작품입니다. 이 시는 단순한 문학적 변주를 넘어, 가혹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뇌와 운명에 대한 수용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1. 작품의 배경: 시대의 어둠과 고립

이 시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가 쓰인 1946년의 소련이라는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스탈린 체제와 검열: 당시 소련은 스탈린의 공포 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작가들은 당의 이념에 맞는 작품만을 써야 했고, 파스테르나크처럼 예술적 순수성을 고집하는 이들은 '사회주의의 적'으로 몰려 감시와 탄압을 받았습니다.

◇셰익스피어 번역: 파스테르나크는 창작의 자유가 막힌 상황에서 생계를 위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번역했습니다. 그는 《햄릿》을 번역하며 주인공 햄릿의 고뇌를 자신의 처지에 대입하게 됩니다.

◇지바고의 목소리: 이 시의 화자는 소설 속 인물 '유리 지바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파스테르나크 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영혼을 지키려는 고독한 투쟁을 시로 승화시켰습니다.

2. 주요 대목 시평(詩評)

Ⅰ. 무대와 쌍안경: 감시당하는 단독자

"한밤의 어둠이 수천의 쌍안경으로

나를 겨누었다."

시의 도입부에서 화자는 무대 위에 선 배우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쌍안경'은 단순히 관객의 시선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감시와 대중의 비판적 시선을 상징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천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겨누고 있다는 표현은 소름 끼치는 고립감과 압박감을 드러냅니다.

Ⅱ. 겟세마네의 기도: 피하고 싶은 고통

"이 잔이 나를 비켜 가게 하소서."

화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役)', 즉 비극적인 운명을 예감합니다. 그는 성서 속 예수가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올린 기도를 빌려와, 인간으로서 느끼는 두려움과 회피의 본능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이는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라는 존재론적 고민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Ⅲ. 운명의 수용과 바리새주의

"하지만 막의 순서는 짜여 있고

길의 끝은 피할 수 없다."

결국 화자는 결단을 내립니다. 비록 결말이 죽음이나 파멸일지라도, 그것이 '짜여진 막(幕 :신의 뜻 혹은 역사의 흐름)'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입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위선과 기회주의(바리새주의)에 빠져들 때, 홀로 진실의 길을 걷겠다는 선언입니다.

Ⅳ. 삶은 들판을 건너는 것이 아니다.

"삶을 사는 것은 들판을 건너는 것이 아니다."

이 마지막 행은 러시아의 유명한 격언을 인용한 것입니다. 인생은 단순히 평탄한 들판을 산책하듯 지나가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고통과 투쟁, 그리고 자기희생을 수반하는 것임을 강조하며 시를 끝맺습니다.

3. 총평: 현대판 햄릿, 그리고 메시아

이 시에서 '햄릿-예수-파스테르나크'는 하나로 겹쳐집니다.

◇햄릿: 부패한 세상(덴마크/소련)을 바로잡아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진 지식인.

◇예수: 인류의 죄를 대신해 고난의 잔을 마시는 희생양.

◇파스테르나크: 전체주의의 압박 속에서도 예술적 양심을 지키려는 시인.

따라서 이 시는 "거대한 악의 조류(潮流)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인간의 품위를 지키며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그는 비겁하게 살아남기보다, 비극적인 결말을 알면서도 무대 중심(역사의 전면)으로 당당히 걸어 나가는 '단독자'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닥터 지바고》에 25편의 시를
부록으로 덧붙인 이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소설 《닥터 지바고》의 끝에 25편의 시를 부록으로 덧붙인 것은 문학사적으로 매우 독특하고 정교한 장치입니다. 그는 왜 산문의 마침표 뒤에 운문의 세계를 펼쳐놓았을까요? 거기에는 작가의 예술적 신념과 인물 형상화를 위한 몇 가지 핵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1. '유리 지바고'라는 인물의 완성

소설 속 주인공 유리 지바고는 의사이자 시인입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지바고가 겪는 고난, 사랑, 상실을 산문으로 서술했지만, 그의 영혼과 내면의 정수는 오직 '시'를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증거로서의 시: 독자는 부록에 실린 시들을 읽으며 "유리 지바고는 정말로 뛰어난 시인이었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내면의 기록: 소설이 지바고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라면, 시는 그의 '영혼'이 남긴 일기장과 같습니다. 산문에서 다 설명하지 못한 그의 고결한 정신세계를 시적 언어로 완결 지은 것입니다.

2. '영생(Immortality)'의 테마 구현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리 지바고는 초라하게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의 시는 친구들에 의해 정리되어 세상에 남습니다.

◇예술을 통한 극복: 파스테르나크는 육체는 소멸하더라도 예술은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주제를 강조하고 싶어 했습니다.

◇부활의 상징: 부록의 시 중 첫 번째인 <햄릿>과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암시합니다. 이는 지바고라는 개인이 비극적 시대를 살다 갔지만, 그의 시(예술)를 통해 정신적으로 부활했음을 상징하는 구조적 장치입니다.

3. 역사적 격동 속의 '개인적 진실' 보존

소설의 배경인 러시아 혁명과 내전기는 모든 개인이 '집단'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던 시기였습니다.

◇산문(역사) vs 시(개인): 산문 파트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와 그에 짓눌리는 삶을 묘사한다면, 시 파트는 그 소음 속에서도 잃지 않은 개인의 순수한 서정성을 대변합니다.

◇자유의 보루: 파스테르나크에게 시는 정치적 구호나 사회적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유일한 성역이었습니다. 소설 뒤에 시를 배치함으로써, 결국 역사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참고] 시편의 구조적 특징

부록에 실린 25편의 시는 소설의 흐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분-내용 및 의미)

▪자연과 계절-지바고가 느꼈던 러시아의 자연과 시간의 흐름을 묘사 (라라와의 사랑 포함)

▪종교적 모티브-성경적 알레고리를 통해 고난 받는 인간의 운명과 구원을 노래

▪서사적 보완-소설 속 특정 사건이나 감정이 시의 형태로 재해석되어 깊이를 더함

결론적으로

파스테르나크에게 《닥터 지바고》는 '산문으로 쓴 시'였고, 부록인 시편들은 '운문으로 요약된 소설'이었습니다. 그는 이 두 형식을 결합함으로써, 비극적인 시대 상황(산문)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인간 정신의 아름다움(시)을 완벽하게 형상화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바고가 죽은 뒤에도 그의 시가 읽히듯, 파스테르나크 역시 이 시편들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양심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랐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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