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by 발레리 야꼬블레비치 브류소프

by 김양훈

기쁨

발레리 브류소프

네 가지 달콤한 기쁨을 나 알고 있으니

첫째는 각성된 의식으로 사는 기쁨.

새들도, 먹구름도, 환영도 기뻐한다.

한순간 영원을 위해 존재함을.

두 번째 기쁨은 불꽃처럼 찬란한 것!

그것은 시, 바로 존재의 의미.

쮸체프¹의 노래와 베르하렌²의 상념들이여,

고개 숙여 그대들을 환영한다.


세 번째 희열은 사랑받는 기쁨,

그대가 혼자 아님을 항상 아는 것.

보이지 않는 언어로 연결되어 묶여 있는

우리 둘은 심연의 공포 위를 날아다닌다.

마지막 기쁨은 예감의 기쁨,

죽음 너머 실재의 세계가 있음을 아는 것.

완성의 꿈들이여! 몽상과 예술 속에서

고개 숙여 그대들을 환영한다! (1900)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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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 (16)

[註]
1) 표도르 쮸체프(Fyodor Tyutchev, 1803-73) : 아파나시 페뜨(Afanasii Fet, 1820-92)와 함께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철학적이고 낭만적이며 범신론적 경향의 시를 썼다.
2) 에밀 베르하렌(Émile Verhaeren, 1855-1916):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 시인이자 극작가, 예술비평가, 상징주의자로서 30여 권의 시집을 남겼다.
시평과 해설
Valery Brusov's portrait was Mikhail Vrubel's last painting.
발레리 브류소프의 시 <기쁨>은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시는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도달할 수 있는 네 가지 차원의 '깨달음'을 단계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시평: 존재의 심연을 건너는 네 가지 등불

이 시는 '기쁨'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네 가지 층위로 구조화하여 사람이 살아가야 할 삶의 지향점을 제시합니다.

◇제1의 기쁨 (각성): 단순히 살아있음이 아니라 '의식이 깨어있음'을 의미합니다. 만물과 교감하며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는 원초적이고도 명징한 생명력을 노래합니다.

◇제2의 기쁨 (창조와 영감): 시와 예술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입니다. 시인이 쮸체프와 베르하렌을 언급한 것은 전통과 현대, 내면적 철학과 외부적 상징을 모두 아우르겠다는 예술적 의지의 표명입니다.

◇제3의 기쁨 (연대와 사랑):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나, 사랑을 통해 '보이지 않는 언어'로 연결됩니다. 특히 "심연의 공포 위를 날아다닌다"는 표현은 허무와 죽음이라는 근원적 불안을 이겨내게 하는 사랑의 힘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제4의 기쁨 (초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실재로 향하는 문턱임을 예감하는 단계입니다. 이는 상징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가시적 세계 너머의 본질'에 대한 갈망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이 시는 감각적인 기쁨에서 시작하여 예술과 사랑을 거쳐 형이상학적인 초월로 나아가는 정신적 승화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2. 작품의 배경 및 문학사적 의미

이 시가 쓰인 1900년은 러시아 문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세기말(Fin de siècle)의 정서: 19세기 말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는 기성 가치관의 붕괴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했습니다. 브류소프는 이러한 허무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예술과 의식의 각성을 통해 새로운 삶의 가치를 세우려 했습니다.

◇상징주의의 확립: 브류소프는 이 시기 쮸체프와 같은 러시아 전통 서정시의 철학적 깊이와 베르하렌 같은 서구 상징주의의 혁신성을 결합하고자 했습니다. 주석에 언급된 두 시인은 브류소프가 지향했던 '전통의 계승과 현대적 변용'을 상징하는 인물들입니다.

◇심연(Abyss)의 테마: 당시 상징주의자들은 세계를 '심연' 혹은 '카오스'로 인식했습니다. 이 시에서 "심연의 공포 위를 날아다닌다"라는 구절은 당대 시인들이 느꼈던 실존적 위기감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예술적 도전을 잘 보여줍니다.


시인의 프로필:
발레리 브류소프 (Valery Bryusov)

발레리 야꼬블레비치 브류소프 (1873–1924)는 러시아 상징주의 운동의 개척자이자 '대부'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상징주의의 기수: 1890년대 초 프랑스 상징주의를 러시아에 소개하며, 러시아 시단에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지적인 시인: 그의 시는 감정적이기보다 지적이고 통제된 형식을 갖춘 것이 특징입니다. 고전적인 완벽주의와 현대적인 불안감을 동시에 지녔습니다.

◇다재다능한 활동: 시인뿐만 아니라 소설가, 비평가, 번역가, 편집자로 활동하며 당대 러시아 문단을 지배했습니다. 훗날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는 소비에트 정부의 문화 행정가로도 일하며 문학적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젊은 시인에게
이미지 속의 인물은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의 거두인 발레리 브류소프(Valery Bryusov)이며, 텍스트는 그의 대표적인 시 "젊은 시인에게(Юному поэту)"입니다. 이 시는 예술을 위한 예술, 즉 탐미주의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젊은 시인에게

불타는 눈동자를 가진 창백한 청년이여,

내 이제 그대에게 세 가지 유훈을 주노라.

첫째를 받으라 — 현재에 살지 말지니,

오직 미래만이 시인의 영역이라네!


둘째를 기억하라 — 그 누구도 동정하지 말지니,

오직 너 자신만을 무한히 사랑하라.

셋째를 간직하라 — 예술을 숭배하라,

오직 예술만을 — 무분별하게, 목적도 없이!


창백한 청년이여, 당황한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여!

만일 그대가 나의 이 세 가지 유훈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패배한 전사처럼 묵묵히 쓰러지리니,

이 세상에 시인을 남겼음을 알기에…

(1896년 7월 15일)


작품의 배경 및 해설

<젊은 시인에게>는 19세기 말 러시아 문학계에 몰아친 상징주의(Symbolism)와 데카당스(Decadence) 정신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선언문과 같습니다.

1. 세 가지 유훈의 의미

브류소프는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 세속적인 가치를 버릴 것을 강조합니다.

▪미래 지향: 일상의 지루한 '현재'에 얽매이지 말고 영원한 예술의 세계(미래)를 보라는 뜻입니다.

▪자기애(나르시시즘): 타인에 대한 동정이나 사회적 책임보다는 예술가 개인의 내면과 감정에 집중하라는 철저한 개인주의를 표방합니다.

▪순수 예술: 예술을 도덕이나 교육, 정치의 도구로 쓰지 말고, 예술 그 자체를 위한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예술지상주의'를 선언합니다.

2. 문학사적 가치

당시 러시아 문학은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사실주의가 주류였습니다. 브류소프는 이 시를 통해 "예술가는 사회의 하인이 아니라, 고고한 창조자여야 한다"는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이는 이후 러시아 '은의 시대' 시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3. "창백한 청년"과 "패배한 전사"

시의 마지막에서 브류소프는 자신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새로운 시인이 탄생한다면, 선구자인 자신은 기꺼이 물러나겠다는 비장미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패배한 전사'는 실제 패배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예술의 횃불을 넘겨주는 세대교체를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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