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벨리미르 흘레브나꼬프
한밤중의 영지여, 칭기즈칸하라!
벨리미르 흘레브나꼬프
한밤중의 영지여, 칭기즈칸하라!
푸르른 자작나무여, 웅성거려라.
저녁노을이여, 자라투스트라하라!
푸르른 하늘이여, 모차르트하라!
그리고 구름의 황혼이여, 고야가 되어라!
한밤중에 너 구름이여, 롭스¹하라!
째지는 웃음소리 발톱처럼 세우고
웃음의 회오리바람 날아가버렸을 때,
그제야 형리를 본 나는
밤의 적막을 대담하게 들러보았다.
나는 용감한 얼굴의 당신들을 불러냈고,
물의 정령들을 강물에서 건져 올렸다.
“그들의 물망초는 비명소리보다 우렁차오.”
밤의 돛단배에게 나는 발했다.
지축이 일주야를 더 펄럭이더니,
거대한 밤이 다가온다.
한밤중에 폭포수에서 헤엄치는
연어 아가씨²를 나는 꿈 속에서 보았다.
소나무들은 폭풍에 의해 마마이³ 되고,
바투⁴의 먹구름은 몰려가고,
말(言)들, 침묵의 카인들은 전진하여라.
그리고 저 성스러운 말들은 영락해 간다.
푸른 옷의 하스드루발⁵은 친위대를 거느리고
돌투성이 무도회를 향해 고난의 행군을 하였다.
(1915년)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註]
1) 펠리시앵 롭스(Félicien Victor Rops, 1833-98). 벨기에의 화가. 모더니즘과 상징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2) 핀란드 각지에서 전승되던 민담, 전설, 민요 등을 집대성 한 뢴로트(Elias Lönnrot)의 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에 나오는 형상.
3) 14세기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활동했던 킵차크한국의 군사령관. 1380년 러시아 꿀리꼬보 언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드미뜨리 돈스꼬이가 이끄는 러시아군에 대패했다.
4) 13세기 무렵 활동했던 킵차크한국의 제1대 군주. 칭기스칸의 손자다.
5) 기원전 3세기 카르타고의 장군으로 명장 한니발의 동생이다. 형을 돕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가던 중 급습한 로마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작품의 배경과 시평
리미르 흘레브나꼬프(Velimir Khlebnikov)의 이 시는 러시아 미래주의(Futurism)의 정수를 보여주는 난해하고도 폭발적인 작품입니다. 1915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흘레브나꼬프 특유의 언어 실험 정신을 이해하면 이 몽환적인 이미지들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1. 작품의 배경:
전쟁의 포화와 '시간의 왕'
이 시가 쓰인 1915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입니다. 흘레브나꼬프는 단순한 시인을 넘어, 역사의 주기를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인류의 운명을 예측하고자 했던 '시간의 왕'을 자처했습니다.
◇역사의 반복: 시인은 현재의 전쟁을 과거 몽골의 침입(칭기즈칸, 바투, 마마이)이나 카르타고의 전쟁(하스드루발)과 겹쳐 봅니다. 그에게 역사는 선형적인 흐름이 아니라, 거대한 에너지가 충돌하고 반복되는 소용돌이였습니다.
◇언어의 혁명: 그는 기성 문법을 파괴하고 단어의 뿌리(어근)를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자움(Zaum, 초이성 언어)' 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이 시에서 명사를 동사화하는 표현("칭기즈칸하라", "자라투스트라하라")은 세상의 모든 존재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역동적인 행위로 변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2. 주요 시평:
존재의 변용과 신화적 상상력
① 고유명사의 동사화 (Transmutation)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칭기즈칸하라", "모차르트하라", "고야가 되어라"와 같은 명령형 문장들입니다.
◇칭기즈칸: 파괴적이고 거대한 정복의 힘을 상징합니다.
◇자라투스트라: 초인적 예언과 정신의 고양을 뜻합니다.
◇모차르트: 천상적인 조화와 예술적 순수성을 의미합니다.
◇고야 & 롭스: 어둡고 기괴하며 상징적인 심연의 이미지를 투영합니다.
시인은 자연(영지, 노을, 하늘, 구름)에게 이 위대한 인물들의 속성을 입으라고 명령함으로써, 정지된 밤의 풍경을 거대한 역사적·철학적 무대로 탈바꿈시킵니다.
② 슬라브 신화와 역사의 결합
시 중반부의 "연어 아가씨"나 "물의 정령"은 북유럽과 슬라브의 민속적 색채를 띠며, 후반부의 "바투"와 "마마이"는 러시아 역사 속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이는 전쟁 중인 러시아가 겪는 고통을 인류사적 고난과 신화적 운명으로 격상시키는 장치입니다.
③ 침묵하는 '말(言)'들의 진격
"말(言)들, 침묵의 카인들은 전진하여라."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흘레브나꼬프에게 '단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무기입니다. 형제(아벨)를 죽인 카인처럼, 기존의 낡은 언어를 죽이고 태어난 새로운 '성스러운 말'들이 고난의 행군(하스드루발의 행군)을 시작한다는 선언입니다.
3. 요약 및 결론
이 시는 "세상의 모든 존재여, 잠에서 깨어나 너희 안의 거대한 잠재력을 폭발시켜라!"라는 외침입니다. 한밤중의 정적 속에서 시인은 공포(형리)를 마주하지만, 오히려 그 어둠 속에서 과거의 영웅들과 정령들을 불러내어 새로운 미래를 꿈꿉니다. 파괴(칭기즈칸)를 통해 조화(모차르트)에 이르고자 하는 미래주의적 유토피아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시의 구조적 특징과
핵심 철학인 '자움(Zaum)'
벨리미르 흘레브나꼬프의 이 시는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언어로 세상을 다시 설계하려 했던 설계도'와 같습니다.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시의 구조적 특징과 핵심 철학인 '자움(Zaum)'을 나누어 살펴봅니다.
1. '명사의 동사화':
존재를 행위로 바꾸다
이 시에서 가장 충격적인 기법은 고유명사를 명령형 동사로 만든 것입니다. 러시아어 원문에서도 이는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칭기즈칸하라! (Chingizkhan!): 칭기즈칸이라는 인물을 '정복과 파괴, 그리고 새로운 질서의 수립'이라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변환시킨 것입니다.
•자라투스트라하라! / 모차르트하라!: 니체의 초인(Übermensch)적 의지와 모차르트의 천재적 조화를 자연(노을, 하늘)에 명령합니다.
•의도: 시인은 세상의 모든 사물(나무, 구름, 하늘)이 고정된 '상태'에 머물지 않고, 역사적 거인들의 '역동성'을 갖기를 촉구합니다. 이는 정체된 러시아 사회와 낡은 예술계에 던지는 폭탄과 같았습니다.
2. '자움(Zaum, 초이성 언어)'의 철학
흘레브나꼬프는 '말(言)' 자체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단어의 외피(사전적 의미)를 벗겨내고 그 뿌리에 담긴 태초의 에너지를 찾으려 했습니다.
"말(言)들, 침묵의 카인들은 전진하여라.
•"침묵의 카인: 카인이 아벨을 죽였듯, 시인은 기존의 낡은 의미를 담은 언어를 죽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죽이고 남은 '침묵'의 자리에 새로운 '성스러운 말'이 돋아난다는 논리입니다.
•언어적 고난의 행군: 마지막 구절의 하스드루발(한니발의 동생)이 알프스를 넘듯, 시인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예술적 행군을 자처합니다.
3. 시의 이미지 구조:
밤에서 새벽으로의 투쟁
이 시는 시각적으로 매우 강렬한 대비를 이룹니다.
(단계: 주요 이미지-상징적 의미)
•도입 (한밤중): 칭기즈칸, 밤, 형리-전쟁과 혼돈, 파괴적인 역사적 에너지
•전개 (환상): 물의 정령, 연어 아가씨-신화적 생명력, 내면의 무의식적 힘
•위기 (폭풍): 마마이, 바투의 먹구름-러시아가 직면한 고난과 외세의 위협
•결말 (행군): 하스드루발, 성스러운 말-비극적이지만 숭고한 예술적·역사적 전진
4. 역사적 맥락:
1915년의 절망과 희망
당시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를 거듭하며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흘레브나꼬프는 이 위기를 단순히 정치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거대한 밤'이 지나가고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기 위한 산고(産苦)로 해석했습니다.
•비명보다 우렁찬 물망초: 전쟁의 비명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예술과 정신의 가치를 상징합니다.
•지축의 펄럭임: 지구가 마치 깃발처럼 흔들리는 거대한 변혁의 시대를 묘사합니다.
[종합 시평] 이 시는 "언어의 마술사가 부리는 역사의 소환술"입니다. 흘레브나꼬프는 칭기즈칸부터 모차르트까지 인류사의 명장면들을 한밤중의 러시아 숲으로 불러내어, 전쟁의 공포(형리)를 이겨낼 거대한 정신적 에너지를 연성해 냅니다. 그는 독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그저 밤을 기다리는 존재인가, 아니면 밤 자체를 칭기즈칸처럼 정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