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벨라 아흐마둘리나
작 별
벨라 아흐마둘리나
마침내 나는 말하리―
“안녕, 사랑할 의무는 없어”
나는 미쳐간다 아니면
광기의 극을 향해 올라간다
너는 어떻게 사랑을 했지?
조금쯤은 괴로웠었나
대수롭지 않았겠지 너의 사랑은?
너로 인해 나는 파멸했어 그토록 어설프게
빗나간 화살의 잔인함… 오, 아니
너에겐 용서가 없어
육신은 살아 움직이고 빛을 본다
내 몸뚱이는 황량해졌는데
관자놀이의 머리칼은
아직도 움직이지만
두 팔은 떨어지고 짐승의 무리처럼
내음과 소리가 비껴서 떠나간다
석영중 옮기고 엮음, 『레퀴엠』-혁명기 러시아 여성시인 선집(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中
벨라 아흐마둘리나(Bella Akhmadulina)의 시 <작별>은 사랑의 종말 앞에서 겪는 영혼의 파멸과 육체적 감각의 마비 과정을 처절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1. 시평:
상실이 가져온 '감각의 황무지'
이 시는 이별의 슬픔을 단순히 눈물로 표현하지 않고, 정신적 착란과 육체적 괴사라는 극단적인 비유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광기로의 상승: 시인은 사랑의 끝에서 "미쳐간다"고 고백하며, 이를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광기의 극을 향해 올라간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고통이 정점에 달해 일상적인 이성을 초월해 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비대칭적 사랑의 허무: "너는 어떻게 사랑을 했지?"라는 질문은 상대의 가벼웠던 사랑과 자신의 파멸적인 사랑을 대비시킵니다. 나를 관통하지 못하고 "빗나간 화살"조차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 시적 화자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용서 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육체적 죽음과 소외: 마지막 연에서 화자의 육체는 살아있으나 영혼은 이미 떠난 상태로 묘사됩니다. 두 팔이 떨어져 나가고 소리와 냄새가 비껴간다는 묘사는, 사랑이라는 매개체가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의 오감(五感)이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식물적 존재'로 전락했음을 상징합니다.
2. 작품의 배경:
'해빙기' 러시아의 서정적 반항
벨라 아흐마둘리나는 1950~60년대 소련의 '해빙기'를 대표하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이 시기의 문학적 배경을 알면 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 서정주의의 회복: 스탈린 사후, 국가와 혁명만을 노래하던 강요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밀한 감정과 고통, 사랑을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작별>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개인의 실존적 고통에 집중한 수작입니다.
•비극적 삶의 궤적: 아흐마둘리나는 당대 최고의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와의 짧고 강렬한 결혼과 이별을 겪었습니다. 이 시에 담긴 서늘한 배신감과 상실감은 그녀의 실제 삶에서 투영된 진실한 감정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음악적 언어: 그녀의 시는 낭독했을 때 고유의 리듬과 선율이 강조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작별> 역시 짧은 문장 속에 응축된 에너지를 담아, 마치 장례식의 독백처럼 장엄하면서도 서늘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사랑할 의무는 없어"라는 첫 문장은 역설적으로 사랑이 삶의 전부였던 사람만이 내뱉을 수 있는 가장 처절한 항복 선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