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조용히

by 지나이다 기삐우스

by 김양훈

더욱 조용히

지나이다 기삐우스

(위대한 업적은 찬미받으리)

ㅡ솔로구브¹


시인들아, 너무 일찍 시를 쓰지 말라

승리는 아직도 신의 손에 달려 있어

아직도 상처는 연기를 내며 타니

그 어떤 말도 오늘은 필요치 않다


이유 없는 고통과

불확실한 전투의 시간에

필요한 것은 지혜로운 침묵

어쩌면 소리 없는 기도

[註]
1) 표도르 솔로구프(Sologub, Fyodor Kuz'mich, 1863~1927)는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사에서도 독특한 사상을 지닌 데카당파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본명은 표도르 쿠지미치 테테르니코프이다. 그와 기삐우스는 서로의 재능을 흠모하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솔로구프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2살 때였다. 그가 좋아했던 시인은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였으며, 미성년 때 그에게 가장 강렬한 영향을 준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이었다고 한다. 또한 솔로구프는 프랑스 상징주의에 심취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폴 베를렌에 빠져들어 이미 1892년에 베를렌의 시를 감흥에 넘쳐 자발적으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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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세계] 일반적으로 솔로구프는 보들레르, 랭보, 폴 베를렌 같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미학이론과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된다. 또한 1892년부터 초기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인 메레주코프스키, 기피우스 등과 친교를 맺으며 <북방 통보>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의 영향 역시 받게 된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욕망과 악과 증오, 공상과 환상, 잠과 꿈의 세계는 이들의 시학과 철학이 그에게 준 영향으로 설명된다.
솔로구프는 이미 초기 시집에서부터 욕망과 악과 증오의 세계인 현세에서 벗어나 공상과 환상과 잠의 세계에서 구원을 찾아야 한다는 관점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낮과 태양이 비추는 세계는 ‘악’으로 형상화되는 반면, 밤의 어둠과 죽음은 ‘미’의 극치로 표현되기도 한다.
솔로구프의 작품 이해에서 중요한 또 다른 요소는 교육자로서의 삶의 경험이다. 그는 모친이 가정부로 일하던 가정에서 원조를 받아 1882년 교육대학을 졸업하자 노브고로드의 한 지방도시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지역 장학관직을 맡기도 했다. 1890년에 페테르부르크로 전출되기까지 10여 년간 지방 소도시를 전전하며 교사생활을 하였고, 이 기간 동안 러시아의 현실과 인간의 내면 속에 숨겨진 추악한 속성들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작가 자신이 체험한 교사로서의 삶과 지방학교의 분위기, 교사들의 풍속도, 많은 선생들이 희생자이자 가해자가 되었던 당시의 분위기 등이 ≪악몽≫(1895)과 ≪작은 악마(Мелкий бес)≫(1898~1902, 1905년에 발표)에 반영되어 있다. 삶의 추악한 단면들이 에피소드처럼 등장하는 이 소설들은 솔로구프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페시미즘적 작가라는 표현을 더욱 부추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악을 표현했던 것은 단순히 부정적인 현실을 조장하려고 했던 것이 아님을 주지해야 한다. 그는 삶의 본질을 간파하기 위해서는 현상계를 직관하고 세계의 악을 절대화하여 그 악의 모습을 응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07년은 솔로구프의 삶에서 많은 변화가 파도처럼 몰려왔던 중요한 해였다. 분신처럼 사랑했던 누이동생 올가가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25년간 일했던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솔로구프는 자신의 고통을 응축시켜 그 힘을 작품을 통해 폭발시킨다. 솔로구프의 시집 가운데 가장 심미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불타는 원≫ 역시 이 시기에 집필되었으며, 시집 ≪뱀≫, 단편집 ≪썩어가는 가면들≫, ≪죽음의 승리≫, ≪지혜로운 꿀벌의 선물≫, ≪사랑≫등과 같은 일련의 희곡 역시 같은 해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그 이후로는 소설 ≪창조되는 전설≫(1908~1912)과 ≪이별의 서, 단편집≫(1908), ≪매혹의 서, 소설과 전설≫(1909) 등이 집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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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1908년 이후로 교사직을 그만둔 솔로구프는 본격적인 직업작가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고통으로 점철되었던 시기에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체보타옙스카야(1873~1921)라는 신여성과의 결혼은 그의 삶에 또 다른 한 줄기 빛이 되었다. 그녀는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으며, 논문을 쓰기도 하고 번역을 하기도 했다. 솔로구프의 탁월한 문학 매니저 역할까지 했던 아내는 문인들을 자주 초대하여 문학 살롱을 형성하고 작품 번역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솔로구프의 개인적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05년 1월 9일, 당시 14세였던 그의 딸이 동궁(冬宮)으로 향하던 노동자들의 시위를 보기 위해 도시로 나갔다가 피의 일요일 사건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딸의 죽음은 솔로구프 가족 전체의 불행이었으며, 이로써 심각한 정신장애를 앓고 있던 그의 아내 역시 1921년 네바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던 솔로구프는 고독한 삶을 견디기 힘들어 소비에트 정부에 망명을 요청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적이며 반혁명적인 작가란 낙인 때문에 결국 망명 허락을 얻지 못하고 1927년 12월 5일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위키백과>

지나이다 기삐우스(Zinaida Gippius)의 「더욱 조용히」는 러시아 은세기 시문학의 빼어난 작품이자, 격동의 역사 속에서 시인이 지녀야 할 도덕적·영적 태도를 엄중하게 묻는 작품입니다.

1. 작품의 배경: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초 러시아의 비극적인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시대적 상황: 이 시는 제1차 세계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이라는 거대한 파국 속에서 쓰였습니다. 기삐우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적 중심지였던 자신의 살롱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제국의 몰락을 목격했습니다.

•상징주의의 거장: 기삐우스는 '러시아 상징주의의 어머니'로 불립니다. 그녀에게 시는 단순한 문학적 유희가 아니라, 신성(Divinity)에 도달하기 위한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솔로구브와의 대화: 시의 서문에 인용된 표도르 솔로구브(Fyodor Sologub)는 동시대 상징주의 시인입니다. "위대한 업적은 찬미 받으리"라는 솔로구브의 구절에 대해, 기삐우스는 '아직은 찬미할 때가 아니다'라는 준엄한 대답으로 이 시를 쓴 것입니다.

2. 시평:

침묵이라는 가장 치열한 언어

■ 성급한 언어에 대한 경계 (1연)

시인은 동료 시인들에게 "너무 일찍 시를 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전쟁의 포화가 가시지 않았고 상처에서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현재 진행형의 비극' 속에서, 그것을 성급하게 '승리'나 '업적'으로 포장하여 노래하는 것은 기만일 수 있다는 통찰입니다. 이는 고통의 현장을 미화하거나 도구화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윤리적 결벽을 보여줍니다.

■ 불확실성 속의 실존적 고뇌 (2연)

기삐우스는 당시의 상황을 "이유 없는 고통"과 "불확실한 전투"로 정의합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참혹한 죽음들 앞에서 인간의 언어는 무력해집니다. 여기서 시인이 제시하는 해답은 역설적이게도 '지혜로운 침묵'입니다.

■ 기도가 된 침묵 (결구)

마지막 행의 "소리 없는 기도"는 이 시의 핵심입니다. 기삐우스에게 침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며, 신의 뜻을 기다리는 가장 능동적이고 경건한 영적 투쟁입니다. 섣부른 선동이나 찬양보다, 침묵 속에서 사태의 본질을 응시하는 것이 시인의 참된 소명임을 강조합니다.

3. 이용악의 「오랑캐꽃」과 기삐우스의 「더욱 조용히」

- 아래 이용악의 詩 「오랑캐꽃」참조.

두 시는 각기 다른 배경(식민지 조선과 혁명기 러시아)에서 쓰였지만, '고통을 대하는 시인의 자세'에서 깊은 유대감을 보입니다.

•연민의 방식: 이용악이 오랑캐꽃의 슬픔을 "목놓아 울어보렴"이라며 밖으로 터뜨려 위로했다면, 기삐우스는 그 슬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침묵"의 위로를 선택했습니다.

•역사의 무게: 두 시인 모두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짓눌린 개인의 삶을 목격했습니다. 이용악이 쫓겨간 유랑민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면, 기삐우스는 그 비극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업적을 논하는 세태를 향해 엄숙한 경종을 울린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지혜로운 침묵"

기삐우스의 이 구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줍니다. 타인의 고통을 너무 쉽게 언어화하거나 소비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이 고통 앞에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는 사실을 시인은 나지막이 속삭이고 있습니다.


<봄도 오고 해서, 덧붙이는 詩>


오랑캐꽃

이용악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¹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 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註]
1) 윤관 장군;
월북작가 이용악의 詩 '오랑캐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오랑캐꽃 전설과는 사뭇 다르다. 먹고살기 어려워지는 보릿고개를 앞두고 변경의 사람들이 여진족에게 침략을 당하며 고통을 당하던 이야기와는 딴판이다.
오랑캐는 바로 여진족이고 고려 장군은 윤관이다. 시인 이용악은 고려가 정벌했던 여진족을 떠올리며 애상에 잠긴다.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인 도래샘, 벼처럼 생긴 띠로 엮은 지붕의 띳집, 돌 몇 개를 고아놓은 가마솥인 돌가마, 털로 된 신발인 털메투리. 이것들은 여진족의 일상에 있던 풍경과 사물이다.
제비꽃의 다른 이름인 오랑캐꽃 앞에서 시인은, 윤관장군에게 쫓겨가던 여진족의 슬픈 삶을 동정하고 있다. 비록 고려가 우리 겨레였고 여진이 이민족이었을망정, 쫓기는 자의 심정은 다 같다는 감정이입이었을 것이다. 마치 슬픈 사람을 껴안아주듯 제비꽃을 감싸며, 실컷 울어나 보라고 말하는, 1947년의 詩. 고려를 선진국으로 여겼던 여진족은 과거의 이름이다.
여진족(女眞族)은 수나라 이후에는 말갈족이라 불리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일곱 개 부족으로 나뉘어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고구려가 망하자 거의 발해에 예속되었고, 일부는 신라에 편입되기도 했다. 여진족은 크게 만주의 길림성 동북 지방에 흩어져 사는 생여진과 그 남서쪽의 숙여진으로 나뉜다. 여진은 문화적으로 선진국가였던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그를 통하여 문화적인 욕구를 만족시켰다.
우야소의 아우 아구다가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여진을 통일하고, 1115년에 후이닝을 수도로 하여 금을 건국했다. 1127년 송의 수도 지금의 북경인 카이펑을 함락시키고 송을 화이허 강 이남으로 축출하여 만주 전역과 내몽골·화북 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이룩했다. 그러다 1234년 몽골·남송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이들은 분열된 씨족사회를 이루어가며 명나라 치하에서 근근히 살아갔다. 이 당시 여진족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는데, 명나라는 그렇다 쳐도 조선에서도 때때로 여진족 마을을 토벌하러 나섰으며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토벌기록을 보면 기병대가 마을에 들어가서 미적거리던 민간인을 학살하고 포로로 잡았다. 저항하는 자는 살해하고, 집은 불태우고 숨겨둔 식량까지 꺼내서 뒤엎어버렸다. 산으로 도망간 여진족들은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걸 보면서 통곡을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이런 토벌은 거의 누르하치의 건국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여진족이 사는 땅이 점령하기에는 탐이 나지 않았지만, 여진족이 힘을 기르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약간만 세력이 큰 부족이 나타나면 충돌을 핑계로 기병대가 가서 짓밟아 놓는 식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참한 역사를 몇백 년간 쌓아오다가 여진족의 마지막 전성기가 열리게 된다. 1586년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해 만주족으로 개칭하며 후금을 건국, 이것이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의 변경에 살던 여진족을 한반도 사람들은 계속 여진족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에게 재가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주로 함경도의 재가승촌에서 천민 신분으로 살았으며 분단 전까지도 함경도의 여진족 마을인 재가승촌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증언에 따르면 현재도 북한에 여진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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