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의 시

by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by 김양훈

미완성의 시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

이미 1시가 넘은 시간

-그대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겠소

한밤 은빛 오카강¹과 닮은 은하수

나는 서두르지 않소 지급전보로

그대의 잠을 깨우고 괴롭힐 이유가 어디 있겠소

흔히 말하듯 사건은 종결됐소

사랑의 쪽배는 일상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 버렸소

우리가 주고받은

불행과 모욕의 고통을 따진들 무슨 소용 있겠소

그대 세상 가득한 적막을 보오

별들의 공물로 하늘을 덮어 버린 이 밤

바로 이 시간 사람들은 일어나

시대와 역사와 우주에게 말을 건다오

***

나는 말(言)의 위력을 말이 울리는 경종을 안다

극장 특별석이 박수갈채로 화답하는

-그런 말이 아닌

관(棺)이 불쑥 튀어나와

참나무 네 다리로 걷게 하는 그런 말

간혹 인쇄도 출판도 되지 않고 버려지지만

말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질주해

수 세기를 쟁쟁하게 울리고 시의

굳은살 박인 손을 핥으려 열차처럼 기어든다

말의 위력을 나는 안다

댄서의 굽에 밟힌 꽃잎처럼 하찮아 보일지라도

인간은 영혼으로 입술로 뼈로 이루어진 존재 (1928-1930)


조규연 옮김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세계시인선59) 민음사 2024


[註]

1) 오카강(Ока́)은 길이 1,480km, 유역면적 245,000㎢인 볼가강 최대의 지류이다. 중앙 러시아 고지(해발 고도 260m)에서 발원한다. 이 강에 접해 있는 도시는 콜롬나, 니즈니노브고로드, 제르진스크, 랴잔, 오룔 등이다.
러시아 혁명의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Vladimir Mayakovsky)의 유고작인 이 시는 그의 생애 가장 고통스럽고도 찬란했던 마지막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는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한 인간이 거대한 시대의 파고와 개인적인 사랑의 파멸 사이에서 내뱉은 마지막 고백과 같습니다.

Vladimir Maiakovski와 동료들

1. 작품의 배경:

혁명과 사랑, 그 막다른 골목

이 시가 쓰인 1928년에서 1930년 사이는 마야콥스키의 삶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기였습니다.

•정치적 고립: 혁명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그였지만, 스탈린 체제가 공고해지면서 검열과 관료주의에 부딪혔습니다. 동료 문인들의 비난과 정치적 압박으로 인해 그는 "혁명의 나팔수"로서의 정체성에 깊은 회의를 느꼈습니다.

•사랑의 파국: 평생의 연인이었던 릴리 브릭(Lili Brik)과의 관계는 이미 소원해졌고, 파리에서 만난 타티아나 야코블레바, 마지막 연인 베로니카 폴론스카야와의 사랑도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비극적 결말: 이 시의 구절들은 1930년 4월 14일, 그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남긴 유서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즉, 이 시는 그의 '백조의 노래(Swan Song)'이자 미리 쓴 비망록입니다.

2. 시평:

사랑의 침몰과 언어의 영생

사랑의 쪽배는 일상에 부딪혀 깨지고

"사랑의 쪽배는 일상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 버렸소"

이 구절은 시의 핵심적인 비유입니다. 혁명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항해하던 시인에게도 '생활(일상)'이라는 현실의 암초는 가혹했습니다. 여기서 '일상'은 단순한 지루함이 아니라, 시인을 옥죄는 관료주의, 가난, 그리고 감정적 소모를 의미합니다. 사랑조차 구원이 되지 못한 채 파편이 된 비참함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개인적 슬픔을 넘어 우주로 향하는 시선

시인은 1시가 넘은 깊은 밤, 연인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 합니다. 자신의 불행과 모욕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시선을 하늘의 '은하수'와 '우주'로 돌립니다. 이는 사사로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역사와 운명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선 단독자의 모습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말(言)'의 위력

2부에서 시인은 다시 '시인'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믿는 말은 극장의 박수갈채를 받는 화려한 수사가 아닙니다.

•관(棺)을 걷게 하는 말: 죽음마저 움직이게 하는 생명력과 투쟁성을 의미합니다.

•열차처럼 기어드는 말: 시의 '굳은살 박인 손'을 핥는다는 표현은 시 쓰기가 노동이며, 시가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기계적 힘(열차)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3. 총평:

마야콥스키의 마지막 선언

이 시는 극도로 개인적인 고독과 광활한 우주적 자아가 충돌하며 묘한 균형을 이룹니다. 사랑에 실패하고 시대에 버림받은 남자는 나약하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육신은 뼈와 입술로 이루어진 유한한 존재일지라도, 자신이 남긴 '말'은 수 세기를 울릴 것이라는 확신을 남깁니다.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이 시를 통해 "사건은 종결되었으나, 나의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승리를 선언한 것입니다.

Mayakovsky by Sergey Maziloff
Vladimir Mayakovsky e Lilya Yuryevna Br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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