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잎사귀

한강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by 김양훈

저녁 잎사귀

한 강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 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작품의 배경과 시평
한강 작가의 시 「저녁 잎사귀」는 그의 첫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2013)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소설가로서 세계적인 거장이 된 한강의 문장이 ‘이야기’라는 틀을 벗어던지고, 오로지 ‘감각과 존재’에만 집중했을 때 어떤 깊이를 만들어내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입니다. 이 작품의 배경과 아울러 시평을 요약해 봅니다.

1. 작품의 배경:

고통을 통과한 뒤의 정적

한강의 시 세계는 그의 소설과 궤를 같이합니다. 그는 인간의 폭력성, 그로 인한 상처, 그리고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육체의 고통을 집요하게 탐구해 왔습니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이 발간될 무렵, 한강은 이미 『채식주의자(2007)』와 『바람이 분다, 가라(2010)』 등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을 형상화하고 있었습니다.

「저녁 잎사귀」는 그 치열한 고통의 정점 이후, 혹은 그 고통이 일상이 되어버린 뒤의 '지독한 권태와 고요'를 배경으로 합니다. 시적 화자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으며, 그가 느끼는 시간은 현실의 물리적 시간과는 완전히 괴리되어 있습니다. 이는 작가가 평소 천착해온 '삶의 허무'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육체의 운명'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기 위한 설정입니다.

2. 시평:

고통의 깊이로 빚은 항아리,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백 년의 보행

[시간의 왜곡과 존재의 무게]

시의 도입부에서 화자는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밤을 기다렸으나 찾아온 것은 아침이라는 서술은, 화자가 시간의 흐름을 통제하지 못하거나 혹은 시간의 순리에 완전히 소외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다”는 표현은 주관적인 고통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특히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다”라는 구절은 곱씹어 볼 만한 시각적 풍경입니다. 항아리는 비어 있지만,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화자의 몸은 고통과 침묵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고, 그 깊이는 백 년이라는 세월만큼이나 아득해졌습니다. 이는 상처를 견뎌낸 인간이 갖게 되는 비대해진 내면의 공동(空洞)을 시각화한 것입니다.

[언어에 대한 후회와 자각]

세 번째 연에서 화자는 “혀와 입술을 기억해 내고 나는 후회했다”라고 말합니다. 한강의 문학에서 '말'과 '음식'은 종종 폭력적이거나 세속적인 세계와 연결됩니다. 혀와 입술을 기억해 냈다는 것은 다시 타인과 소통해야 하고, 무언가를 먹어야 하며, 결국 이 지겨운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자각입니다. 고요한 정적 속에 머물고 싶었던 존재에게 '말할 수 있는 기관'을 자각하는 것은 곧 현실로의 강제 소환이며, 그렇기에 이는 '후회'로 다가옵니다.

[빛과 어둠의 역설: 저녁 잎사귀]

시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 볕 속을 걸어야 한다”라고 담담하게 읊조립니다. 우리에게 '볕'은 긍정적인 이미지일 때가 많지만, 이 시에서의 볕은 피할 수 없는 생의 의무이자 견뎌야 할 노출입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등장하는 “저녁 잎사귀”는 화자의 분신과도 같습니다. 빛을 향해 몸을 뒤집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본능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캄캄히 잠기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즉, 산다는 것은 빛 아래 자신을 노출하는 동시에, 그만큼의 어둠 속으로 침잠하는 이중적인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3. 고통의 연대기

이 시는 한강 작가 특유의 '정적인 역동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웅크리고 있던 몸이 항아리가 되고, 다시 일어서서 볕 속을 걷는 과정은 흡사 수행자의 고행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작가는 '저녁 잎사귀'라는 가냘픈 존재를 통해, 인간이 겪는 존재론적 슬픔이 가볍지 않음을, 오히려 그것은 백 년의 시간을 품은 깊은 항아리와 같음을 역설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항아리를 품은 채, 다시 찾아온 아침의 볕 속을 묵묵히 걸어가는 잎사귀들인 셈입니다.

이 시는 독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몸은 지금 무엇을 담아 얼마나 깊어졌느냐고, 그리고 오늘 당신은 어떤 빛을 향해 몸을 뒤집었느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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