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동무 덕에 알아 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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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7일 일요일
걷기 둘째 날
Roncesvalles(론세스바예스) >Zubiri(수비리), 알베르게 Albergue El Palo de Avellano
21.5km
여행사가 예약을 대행하는 덕에 알베르게 예약에 대한 염려는 없다.
즉, 선착순 알베르게 입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새벽에 길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모른다.
또한 불빛에 의지해서 길을 트는 것도 경험하지 않았고, 일출이 6시쯤이라서 동이 트기 전 4시에 출발하여 두 시간을 깜깜하게 걸어야 하는 것도 모른다. 덕분에 주변 풍경과 사람 풍경을 놓칠 염려도 없다.
다만 하루에 4만보 가량을 걸어야 한다는 부담은 신경을 예민하게 한다.
좀 더 잘 자고 싶은 욕구가 문제이다.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고 출발. 대략 7시.
3km 지점 첫 마을에서 어제와 다르게 5유로가 아닌 3유로짜리 착즙주스를 마신다.
날씨 좋고, 햇살 좋고, 풍광 좋고, 무엇보다 360도로 탁 트인 벌판과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은 환상이다.
어릴 적 보던 풍경이다.
사방이 트인 천에서 투망을 던져 물고기를 잡던 아버지 옆에서 멱을 감다가 시퍼런 입술로 올려다 본 그 하늘이다.
강물과, 그 옆으로 높아만 보였던 둑에서 소들이 풀을 뜯던 그 물 색깔, 그 풀과 나무 색깔, 그 공기 색깔이다.
오늘부터는 스페인인지라 노란색 화살표를 볼 수 있다.
발의 열기를 식혀야 한다는 사전 지식에 걸맞게 길가에 자리를 펴고 앉아 바게트를 씹을 여유도 생겼다.
푸드트럭에 들러 주스와 바나나를 즐긴다.
휴식을 끝내고 다시 길을 걷던 중에 날이 추워 겉옷을 다시 입었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나무다리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니 새롭고 운치 있다.
마을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고, 다시 마을을 만나는 진짜 순례자처럼 나 자신을 순례자에 투영해 본다.
발걸음이 가벼워짐은 자연이 주는 평안함도 더 했기 때문이리라.
초반이다 보니 걷다가 만나 이야기를 트는 사람의 대부분 우리 팀원들인데 누군가에 의해 어려운 질문이 던져졌다.
'어떻게 오게 됐냐고'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거기서 공로 휴가를 얻게 되었다는 남자가 답변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른다.
남자의 대답을 듣고 질문한 사람이 말했다.
"그랬군요.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였으니 좋고, 삶에도 계단이 험하지 않았으니 더욱 좋군요."
그런 당신은?
그녀는 남자에게서 되돌아온 질문에 답한다. 그때그때 글을 쓰고 정리한 사람답게, 오래전부터 오려 했었다는 그녀답게 말한다.
"삶을 어느 정도 지내봐야 정리하고 싶어지지요"
삶에 대한 반추와 되돌아봄의 과정은 글쓰기 이상 없노라는 조언을 많이 듣던 내가 해석한 바로는 이 길이 자아성찰의 기회를 줄 것이라는 기대 또한 많다.
젊은 사람에게 물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의 인생 설계와 희망을 얘기하지 않았을까?
나이에 맞게 삶을 되돌아보는 관점도 다르겠지.
이제는 내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시간이다.
'항상 염두에 있었지. 일종의 해외 트레킹으로 생각했어'
'헌데 걷다 보니 비난하지 않고 너그러워져야지, 내면 깊숙이 용서해야지, 나보다는 남을 먼저 봐야지 하는 중이야'
'또 그걸 계속 공부하려고'
허걱! 순례길 이틀째인데, 이 길이 주는 성숙을 벌써 얻어 낸 것인가?
자연 속에서 종일 걷다 보니 원망을 가졌던 것이 하릴없어 보이고, 억울했던 상념들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다.
야생화의 손짓과 나무 숲길의 고즈넉함이, 이런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과 집중이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삶의 고비마다 원인을 밖으로 돌리는 우를 이제는 나한테 묻는 시간이 되기로 한다.
어제보다 짧은 거리였기에 도착지점 가까이에서 개울물에 발을 담갔다.
이렇게 해야 발의 욱신거림이 없어진다고, 그 어떤 처방보다 효과가 좋다고 누군가 말했다.
먼저 와서 쉬던 일행이 어서 물속으로 오라 했고, 사진을 찍어주겠노라 했다.
마치 '너 오늘 수고했어. 그러니 즐겨봐' 라 하는 듯했다.
이때는 몰랐다. 오래 걸어서 누적이 되면 발이 얼얼하고 묵직한 통증이 따른다는걸.
하루의 피로를 허공으로 날린 덕에 기분도 상쾌하다.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걷는 중에 쌓인 피로감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 같고, 발가락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의 감촉은 온화함으로 다가온다.
계곡에서 놀다가 들어왔는데도 일정이 일찍 끝나서 늦지 않게 식당에 들어가 소고기 구이(9.5유로)로 호강도 했다.
식도락의 즐거움을, 조금 전에 본 야생화의 싱그러움을 하늘에 던져본다.
230507
안녕!
오늘은 24km를 걸었어.
집 생각이 안 나서 놀라웠지.
어제보다 수월하고 어제와 달리 숲길이 이어져서 편안하고 행복했어.
이기심 챙기느라 부족했던 내가 보이고 비난하고 판단하는 습성이 무섭게 느껴지는 정도까지 생각도 정리할 수 있었어.
하나 더.
평소 운동도 하고 식단도 나쁘지 않다고 자부하는데 왜 몸이 뚱뚱할까 걱정이고 불만이었지.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데 언니가 소갈증일 수도 있으니 잘 들여다 보라지 뭐야!
화장실엘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다니고, 갈증을 자주 느껴 물을 벌컥거리고, 입이 마르는 나를 알아챈 거야.
아, 내가 당뇨 전단계였었지!
신장 기능 회복을 위해 물 섭취를 줄일까?
이곳에서 잘 단련된 몸을 유지하면 될걸.
엄마가, 아내가 나긋나긋, 유연해져 돌아갈게.
엄마가, 아내가 말랑말랑해질 수 있게 준비할게.
덕분에 평화로운 오늘을 선사받을 수 있어 고마워.
기뻐.
행복해.
사랑해.
♥언니!
산티아고를 향해 걷기 이틀째.
어제 첫날은 피레네산맥을 넘었어. 고도 1400미터를 넘느라 고단했지.
오늘은 숲길로 이어지는 길로 집 걱정 덜어내고 걸을 수 있었고.
알베르게에 일찍 도착하여 언니랑 또랑에 갔어.
주목적은 동네 탐방이라서 파란 하늘과 건조하고 청명한 날씨를 즐기려 했는데 얼마 안 가서 청소 중인 여인이 과일가게 찾는 우리에게 안내하더라.
거기는 과일을 파는 곳이 아니라 식당인지라 저녁을 먹기로 했어.
영 말이 안 통해서 한 남자가 먹고 있는 비프 앤 포테이토를 파파고 앱과 손짓으로 주문했어.
오다가 도처에서 만난 소들이 저질러 놓은 소똥의 주범일 텐데도 맛나더라고.
방목인지라 질기지만 좋더라고. 싸더라고.
♥언니!
♥언니가 병원 치료를 하고 있다고 들었어.
언니를 생각하며 기도한다며 눈물을 보이는 언니를 보며 나도 뜨거워졌어.
나도 ♥언니를 위한 기도를 보탤 게.
치료 잘 되길 기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