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죽어도 좋다.
2023년 5월 11일, 6일차
Estella(에스떼야 -별) --> Los arcos(로스 아르코스), 알베르게 : Albergue La fuente Casa Austria
오늘은 22km.
어떤 사람이 물었다. 그 사람을 왜 그리 오래 만나냐고.
묻는 사람의 의중을 모르는 건 아니나, 그 질문은 그 사람에 대한 험담을 벗어나 나에 대한 일종의 얕잡음이었다.
그 누구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즘같이 종일, 오랫동안 근접해서 숨소리까지 듣는 사이는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이 관계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오래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 좋다.
오늘은 바람이 마구 불고, 구름이 잔뜩 끼어서 춥다.
출발하기 전에 옷을 단단하게 여민다.
길 위에서 만난 대장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장장이가 정겹고 고맙다.
각양각색의 농기구와 여러 장식품과 소품을 만들어 팔고 있는 장인을 만났다.
불옆에서 시뻘겋게 달구어진 쇠를 망치질로 다루는 사진을 걸어 두었는데, 문득 우리나라 시골장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풀무질을 돕는 어린 소년을 재촉하면서 망치질 할 때마다 요리 조리 변해가던 호미와 낫, 대장장이의 거친 손마디가 떠 올랐다.
먹구름이 낀 선선한 날씨는 길을 걷는 데 한없이 좋다.
미류나무 꼭대기에서 작은 손바닥이 날 부르는 듯 정겹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 돌아가는 길, 쪽 뻗은 길 등 매번 다른 길을 만난다.
하늘과 구름, 밀밭과 포도나무 밭, 고혹적인 양귀비꽃과 살랑이는 바람이 더 하는 풍경에 '좋다',
'행복하다'를 연발한다.
어찌나 추운지 배낭 안에 있던 고어텍스 노란 옷이 언니에게 갔다.
Bodegas Irache 양조 공장.
저 간판 디자인은 이 광활한 곳에서만 어울릴까?
집에 돌아가 저런 종류의 간판을 세우는 상상을 해 본다.
넓은 땅에 어울리는, 하얀색의 글자들이 빛나는.
출발 후 3km 정도 지나서 수도원 옆에 있는 보데가스 이라체( Bodegas Irache) 양조장에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다.
순례객을 위하여 달아 놓은 꼭지 중 하나는 물, 하나는 레드 와인인데, 흰색의 꼭지가 화이트 와인인 줄 알고는 병에 담는 언니!
술을 좋아하는 우리 남편이라면, 병을 채우는 것도 모자라 벌컥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니 웃음이 난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제한적으로 조금씩만 맛 보라고 열어 놓은 꼭지인데 가끔은 그런 사람도 있다니 말이다.
잠깐 워낙 말랐는데다가 먹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남편을 걱정해 본다.
밭에서 딴 오이와 고추로 한 상을 차렸노라며 사진을 보내서 한국밥상을 그리워하는 나를 약올려 놓고는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더라 했었다.
포도나무 재배법이 색다르다. 무릎 위를 넘지 않는 나무둥치에서 순이 올라오는데 순을 잡아주는 거치대도 없고, 줄도 없다.
우리들의 포도 재배법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 포도 수확철의 풍경이 자못 궁금하다.
포도를 사람 손으로 따지 않고 기계로 훝으며 지나가는 모습을 TV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와인이 발달한 나라의 대량 생산이 빚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순례여행을 하다가 카페를 보면 나도 모르게 들어가서 진한 커피의 향을 맡으며 여독을 풀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러나 카페에 꼭 들어가라는 법은 없다.
카페 옆 돌담에 기대어 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온 과일과 삶은 계란을 먹는다.
길거리의 장점으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을 수 있으니까 더 좋다.
엊그제 터진 새끼발가락이 걸을 때마다 걸린다며 수선을 떨었더니 항상 가지고 다니는 약상자를 꺼내어 테이핑 해 준다.
'대장 고마워요'
짬을 낸 휴식은 이렇게 발가락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게 할 수 있어 더욱 좋다.
같은 듯 다른 풍경!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리고 미루나무가 바람에 휘청이고 있다.
그러다가 맑은 하늘이 그리울 즈음 날이 갠다.
비가 올듯 오지 않는 날씨는 걷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이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찌푸리지 않아도 되고, 덥다며 손 사래를 떨지 않아도 된다. (아참~ 아들이 챙겨준 전동손선풍기는 소용이 없어 꺼내보지도 않았다)
걷다가 거리의 악사를 만났다.
길 위에 여자는 바이올린을 켜고, 남자는 기타를 치고 있었다.
나도 거기서 한 스텝같이 날렸으니 그도 좋다.
길 위에 양말, 수건 등이 떨어뜨리게 되면 다시 내 거로 돌아올 일 없는 것처럼 시간도 그러하다.
길가의 꽃(양귀비, 인동초, 명아주, 찔레꽃, 장미, 칸나)들과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등에 눈길 주며, 파란 하늘과 어울리는 초록 들판 위를 걸으며 기도한다.
언니의 투병이 순조롭기를, 가족의 안위를, 그리고 내가 알고, 알지 못하는 뭍사람들을 위한.
한 시간에 평균 4km를 걸으나 오늘의 20km는 길 위에서 쉬는 시간을 포함하여 7시간 걸렸다.
그만큼 천천히 풍광에 취한 걸음이었으나, 여느날 보다 짧은 거리여서 일찍 도착하였다.
일찍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점저를 먹고 쉬는데 저녁마다 술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어쩐 일인지 같이 온 사람들의 간섭이 버겁다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배낭 가득 식량을 짊어지고 온 사람도 있는데, 오늘 아침에도 알베르게의 주방을 지나며 맡은 누룽지 냄새는 멸치볶음 밑반찬보다 더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좋은 사람들과의 환담 섞인 술과 음식보다 우선하는 것은 길 위에 있다.
길 위에서 죽어도 좋다는 말에 공감을 보탠다.
걸어서 행복하고 좋다.
나는 오늘 행복하다.
바람을 맞으며 좋다.
아름다운 색깔들이 좋다.
맑은 공기에 섞인 흙내음이
걷는 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