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에서의 휴식
2023년 05월 25일, 20일차
레온에서의 하루 종일 휴식이다.
일정한 기상시간에 따른 움직임 필요치 않았다.
침구를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매일 행장을 꾸려 다른 곳으로 옮겨야 되는 유목민의 휴식시간인 것이다.
처음 맞이하는 자유여행의 여유이다.
7시 반에 시작된다는 호텔 조식이 조금 일찍 시작되었다.
각자의 접시를 만들어 함께 앉아 식사를 하는 가운데에서도 나만의 여유를 찾는다.
지구 화장실에 대한 부담 없이 즐기는 커피가 두 잔이 되고 있다. 오랜만에 가슴에 충만하게 젖어드는 객지에서의 노스탤지어가 우수를 자아낸다.
종일 자유여행으로 찍힌 일정표에는 오늘의 누적거리는 어제와 같다. 실질적인 거리는 0km이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와, 자연에 대한 기대 또한 숫자 0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의도하지 않았지만 오늘도 걸었고 만족스러운 순례길의 연장이었다.
만보기에 10km가 찍혔다. 더불어 기대 이상의 만족스러운 100점의 하루였다.
첫 번째, 조식을 마치고 대성당 미사 참석이다.
미사 시간보다 미리 도착하여 기도를 올린다.
독실한 믿음을 갖은 언니들의 인도 때문이었을까?
마치 글로 쓰는 듯 기도문이 줄줄이 나오는 경지는 아니었지만, 몸가짐만큼은 경건하였고, 그분께서 아신다 하니 나도 살펴달라 하고 싶었다.
8시에 시작하는 미사였는데 마침 일요일이라서인지 머리 하얀 현지 분들과 순례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어제 못다 한 시내 투어이다.
어제 대성당에서 시작하여 광장, 가우디 저택, 바실리카 교회까지 둘러보고는 마치지 못한 그곳, 산마르코스 수도원(Hostal de San Marcos) 탐방이다.
아들이 경유지를 담아 보낸 구글 지도에서 어제의 경유지를 지우고 목적지는 하나, 수도원으로 향하였다.
으례껏 순례객들로 붐비겠거니 생각하였지만 수도원 광장은 한산했다.
우리 말고는 그 어떤 팀원도 만나지 않았는데, 그 많은 사람들은 레온의 어디로 행선지를 잡았을까 궁금해진다.
대도시 레온에서의 자유 시간이었기에 다들 경로가 다르다.
광장의 벤치에 앉아 느긋한 시간을 즐겼다.
같이 온 여인이 손자와 사진 찍을 때, 아이가 주문했다는 '요렇게, 요렇게, ···'를 즐겁게 바라보았다.
결코, 부러운 눈길이 아니었다고 우기고 싶다.
다만, 60이 넘은 사람들은 으례껏 있을 법한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 사돈, 그런 것들이 탐났을 뿐.
나도 할머니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데 ···
지금은 옛 수도원이 박물관과 5성급 호텔로 바뀌었다.
그 광장에서 덩그러니 혼자 지키고 있는 순례자 동상에서 사진 찍기를 즐겼다.
손녀와 함께 산책을 나와 놀던 현지인이 순례자와 같은 포즈를 취해 보라고 권하였기에 우린 한껏 멋을 부렸다.
아마도 순례자의 시선에 대한 얘기도 한 것 같은데, 알 수 없었다. 스페인어는 내게 외계어와 같으니까.
순례길에 지친 순례자처럼 신발을 벗어 놓고, 순례자에게 기대고 사진을 찍다가, 조언대로 먼 하늘의 별자리를 찾듯이, 그분께 고해하듯이 고개를 치켜들고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저의 여정이 값지게 하소서', '길마다 올리는 기도 함께 하소서'
다음엔 박물관이다. 입장료 없다. 사람들 거의 없다.
건물 곳곳에 베여있는 오랜 시간의 흔적들이 나를 경외감으로 이끌고 있다.
우리들만의 시간 속에서 나만의 여유 공간을 찾아 객창감을 달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있었을 수도자들의 숨결은 어디에 묻어있을까? 찾아보며 각자의 보폭으로 회랑을 천천히 돌았다.
돌바닥
정원
부조의 아름다움
경건한 기도실
작은 미사실
여유
즐거움
자유
박물관에서 나와 바로 옆의 오성급 호텔로 향하였다.
배낭을 짊어진 순례객들과는 다르게, 차려입은 여행자들이 캐리어를 끌고 드나드는 곳이다.
커피 한잔하러 갔다가 화장실 구경(?)만 하고 나온 곳.
사진의 왼쪽이 호텔, 오른쪽이 박물관 입구이다.
호텔까지 되짚어 오다가 11시부터 식당을 찾았으나 타코, 햄버거, 일식, 우동, 스테이크 등 시내에 널려있는 식당들이 모두 2시, 1시 반에 문을 연다는 안내문을 달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하루 다섯 끼를 먹는다.
'8시 가볍게 아침, 10:30~11:30에 브런치, 2시에 든든하게 점심, 5시에 간식, 8~9시부터 저녁식사 시작, 12쯤 취침'
그러니 우리가 순례길을 마치고 마을로 들어선 시간이 대략 1시부터 4시가량이었기에 매번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지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 점심은 이미 놓칠 시간이었고, 저녁식사를 8시에 하고 잠자리에 들기에는 소화에 무리인 시간인 것이다.
한낮에, 쏟아지는 태양 아래에서 고요하게 문을 닫는 상점이라니.
하루 두 끼를 먹는 언니들과 내겐 이 모든 것이 아직도 낯설다. 어렵다. 시간을 맞춰야 하니 괴롭다.
11시가 넘었고, 2시가 되기 전.
블로거들의 성지라는 스시집 앞을 서성거리다가, 문 앞에서 식당에 들어가는 여자가 있어 붙잡고 물었더니 2시에 문을 연다 하였다.
다섯 끼를 먹는 그들처럼 카페에서 음료와 빵으로 한낮의 고요를 즐겼다.
'억지춘향'이라 말하고, 즐겼노라 쓴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여기저기를 배회한 3시간 후, 근처에 있는 우동집으로 향하였다.
딱 2시다. 식당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섰다.
식당을 찾으면서 시간을 보낸 보람이 있었으면 했다.
우동집에 들어간 우리는 스페인 글자를 읊는 대신, 메뉴판 그림을 짚으며 주문한다.
일본식 된장과 두부 밥에 비노(맥주)를 곁들였다.
여행 중에 환갑을 맞은 호텔방 짝이 내는 한 턱이다.
'다시 한번 회갑 축하해요', 허기 반 축하 반이 곁들어진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미리 챙겨 먹은 간식이 있었지만, 허기를 달래는 식사는 향기로웠다.
점심을 먹고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놀라는 나.
"앗, 내 모자"
단톡방에 모자 찾기를 올린 뒤 언니의 조언대로 어제의 그 카페로 되짚어가 보았다.
거기 사장님이 모셔두었다가 꺼내 놓는 내 모자.
남은 일정 내내 모자 없이 걸을 수는 없다며 투덜대던 나는, 안도의 숨소리와 함께 재촉하던 나의 모습을 담아 허공에 날렸다.
호텔 근처에 다다라 레온 대성당을 다시 지난다.
성당의 모습은 크고 웅장하며 아름다웠고, 성당 옆으로 하교하는 아이와 함께 걷는 엄마, 아빠들이 여유로움이 더 아름다웠다.
일상에서 옛 성당을 만나고, 옛 성벽을 돌아 집으로 가다니 멋지지 않은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그곳의 매력에 끌려 성당 앞에 앉았다.
언니는 더 오래 앉았다 가겠노라 하여 먼저 호텔로 돌아오다가 만난 사람에게서 '누가 세 번째 낙오자가 될 것인가'라는 말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장기간에 걸친 여정에 사람들이 지쳐있어서인지 작은 일에도 복잡한 시그널이 오고 가고 있다고도 하였다.
앞으로 14일간의 도보 순례가 남았으나 지금보다는 여정이 더 수월하게 짜여 있고 몸에 익은 길이니 걱정은 없다.
그러나 더 많이 배려하고,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겠다.
호텔에 돌아와 쉬었는데도 날이 환하다. 이곳은 저녁 8시 즈음이 일몰시간인 것이다.
오후 4시경, 언니가 젤라또를 먹자 해서 슬리퍼 끌고 나선다.
젤라또를 찾아 걷다가 뜻밖에도 성벽 안으로 펼쳐져 있는 마을을 만났다.
역시 옛 것과 현재의 것이 공존하는 모습이다.
그 조화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융화된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포근하게 다가온다.
고풍의 멋
현대의 세련됨
그 속의 인간의 자유로운 평화
하늘의 푸르름
이 속에서 "온고지신"의 정신이 경외로 다가온다.
성벽 안에 들어서서 보니, 성벽 끝에 위치한 옛 건물이 관공서로 쓰이는 듯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고, 카고레인이 달고 있는 큰 돌덩이, 꼭대기에서 입으로 거품을 내고 있는 얼굴, 파리, 주먹을 쥐고 있는 손 등의 작품들이 성벽과 옛 담과 바닥에 멋지게 자리 잡고 있었다.
구글 맵을 따라 젤라또 가게(Holy Cow Crepes,café y Gelato)에 도착하였는데, 맛집으로 올라와 있는 이곳이 한산하여 닫혀있는 건 아닌지 긴장하였다.
기분 좋게도 가게 밖에 있던 사장님이 우릴 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한다.
골라 먹는 아이스크림이다. 바닐라와 민트 맛을 골랐다.
젤라또를 먹고 그 성벽을 나와 살펴보니 거기 성벽에 붙여 지은 다세대주택이 보인다.
'이렇게 멋짐 뿜뿜나는 발상이라니!'
그리고 그 성벽은 대성당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다시 보는 옛 것과의 조화를 이룬 마을이, 성벽에 기댄 건물들이 젤라또 맛만큼이나 새롭다.
잠들기 전, 길 위에 있지 않아 소홀했던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사랑
염원
간절함
기적과 치유
그리고
오늘도 행복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