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토르가에서 라바날까지, 치유의 길
2023년 05월28일, 23일차
Astorga(아스토르가) → Rabanal del camino(라바날 델 까미노)
거리 : 19.8km
날씨 : 구름 많음 (최저 10, 최고 23)
알베르게 : Albergue Nuestra Señora del Pilar
동생이 챙겨 준 것과 아들이 챙겨 준 보신용 영양제를 먹고 10시간을 잤더니 발걸음 가볍다.
주방이 큰 지하에서 컵라면과 오렌지주스, 요구르트, 사과를 먹고 출발한다.
아침 공기가 좋다.
어제저녁에 일찍 자느라 못 간 주교궁, 오늘 여정의 초입에서 만난 주교궁은 안토니 가우디의 초기 작품이다.
내부는 더 멋있었다는데 아쉽구나.
그 앞의 큰 나무에 핀 꽃으로 달랜다. 멋지고 생경하다.
왼쪽이 아스토르가 대성당, 오른쪽이 주교궁
가다가 배낭 속의 바나나, 자두를 꺼내 먹는다.
길을 걷다가 만난 벤치.
길의 양편으로 벤치가 있길래 나눠 앉았다. 양말을 벗고, 물로 목을 축이고, 길 가다가 만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인데도 고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조금씩 경사져 있다.
급경사의 산들이 첩첩이 쌓인 우리나라의 지형과 다르게 이곳은 완만히, 조금씩 오르고 내리는 것이다.
산길이다 보니 전체적으로 흙길이다. 돌길이다.
작은 마을을 여러 개 지나 도착 마을도 작은 마을이다.
20km를 마치고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12시 10분.
한국인 수사님이 계신 성당이 있는 곳.
이곳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라면 특식이 있다. 한국 라면이다.
주인장이 직접 김치를 담근단다.
스페인어이지만 팔을 돌려 마늘을 가는 모습, 김치를 버무리는 동작과 함께 말해 주니 알아듣겠다.
햇반, 김치와 함께 먹는 라면이 좋구나. 향수를 자아낸다.
48인용 길고 큰 방 하나에 남녀 구분 없이 들었다. 우리 팀과 한국인으로 구성된 가족, 친구들이다. 외국인들은 옆의 건물에 들었단다.
누우니 좋다.
쉬고 있는데 알베르게가 갑자기 분주하다.
지나는 길에 주어서 넣어두었던 돌에 소망을 적어 철의 십자가 밑에 놓을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함께하는 동안 소망을 담고 담은 돌을 철의 십자가 밑에 놓으면 기도가 이루어진단다.
나는 마침 돌길을 걷다가 집의 꽃밭에 놓을 요량으로 배낭 주머니에 넣은 자그마한 것이 있었다.
사전 지식 없이 그저 돌이 예뻐서 주머니에 넣어 왔던 거.
나도 쓴다.
돌 하나에 모든 기운이 도우시사 우리에게 좋고 흡족한 결과 주옵소서.
돌 하나에 병중언니평안기원.
돌 하나에 기원한 모든 소망 이루소서.
세 개의 소망이 적힌 것들을 배낭 옆구리에 찔러 넣고 잠을 청한다.
철의 십자가에 고이 내려놓으리.
안녕!
여기 이곳은 흡사 치유의 길 같아.
걷기 첫날 발목에 겹쳐 신은 양말 때문에 발목이 벌겋게 부어올랐었잖아?
양말목이 길어서 접어 내렸기 때문에 화상을 입은 것이라 여겼지.
근데 평소에도 환절기만 되면 발목이 가려워 많이 긁어대던 곳이었어.
이제 그곳은 말끔해졌고 집에 돌아가서도 가려움증 없이 지낼 것이라 여겨.
걷기 둘째 날에 오른쪽 새끼발가락의 물집이 잡혔었거든.
잘 관리한다고 준비했기에 전혀 예상 못 한 돌발 상황으로 적잖이 놀랐었지.
그걸 나일론 이너 양말을 신은 탓으로 진단하였고 지금은 상처만 남았지.
아마도 이 경험이 발을 더 단련시켰을걸.
새끼발톱의 못남도 곧 사라져라 얍!
자는 도중 어떤 날은 많이, 어떤 날은 조금씩 왼쪽 겨드랑이 쪽 옆구리가 아팠어.
새로운 병증에 놀라 잠이 깨기도 했는데 이젠 안 아프다.
다행이지 뭐.
앞으로도 아플리 없을 걸.
어제 그제 오른쪽 손가락 많이 아프더니 괜찮아.
풀 뽑느라 앓던 중지 관절염뿐 아니라 갑자기 약지까지 아파서 긴장하고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말이야.
한 달여 동안, 총 34일간 걸으며 보낸 시간들은 분명 신체 전체의 순환을 도우리라 믿어.
새로운 피와 새로운 세포로 새 몸을 완성할 거야.
몸 안에 갖고 있던 응혈을 풀고, 나도 모르게 힘을 키우고 있었을 나쁜 세포들을 물리치고, 화해하지 못 한 채 담아 두었던 숱한 응어리들을 퇴색시키고, 희석시키고, 씻어내 주겠지.
그리고 더욱 은혜롭게 승화시킬 일은, 순례 전과 후로 나뉠 나의 마음가짐일 터.
파란 하늘과 갖가지 녹색들과 상큼한 아침 공기와 맑고 시원한 바람.
그래 한껏 들이쉬고 내쉬며, 눈과 마음에 담으며 정비할 터.
그런 나와 만나게 도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