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벨로스에서 베가까지, 우박 내리는 5월의 마지막 날
2023년 05월 31일, 26일차
Cacabelos(카카벨로스)→ Vega de valcarce(베가 데 발카르쎄), 알베르게 : Albergue El paso
거리 : 25.2km
날씨 :구름 약간 오후 2시 비 0.5~0.8mm (최저 13, 최고 26)
잘 쉬었다 갑니다. HOSTAL! Albergue Gallega
어젯 저녁에도 어김없이 빨래를 널고 꾸들꾸들 마를 때쯤 비가 내렸다. 얼마나 고마운지.
비 갠 후 동트는 아침이 상쾌하다.
비 예보가 있어서일까 얕은 구름이 깔린 아침나절의 풍경이 몽환적이다.
출발하여 2.2km를 지나 갈림길이다.
도로를 따라 왼쪽으로는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마을로, 오른쪽으로는 포도밭으로 돌아간단다.
포도밭길을 택하였다.
도로 옆길로 야트막한 오르막을 걸어 작은 마을들을 숱하게 지나는데 정말 작아서 그냥 집 한 채, 두 채 정도의 마을도 있다.
도로 옆길은 지루하기도, 햇살이 뜨거워 힘이 들기도 했지만 쨍쨍한 햇살대신 구름가린 날씨로 편안하다.
넓은 포도밭 길이 이어진다.
저 집은 아마도 농사철에만 쓰는 농막일 걸
이제 다시 마을이다.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초에 불을 붙였다.
1유로의 값으로 내 소원이 이루어 지는 느낌이라니.
길 위에서 드리는 그 기도 받아주소서.
꽃들이 여전히 탐스럽다.
숙소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숙소의 담벼락에 올라 누웠다.
햇볕에 달궈진 돌이 등에 닿자 온몸이 녹는다. 오래 걸은 후이고 선선한 날씨에 금상첨화다.
오늘의 여정 중에는 Tvn '스페인 하숙'을 찍었던 비아블랑카 마을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단톡 사진방에 '산 니콜라스 이 리안' 알베르게 내부에 있는 리셉션 장소에서 '유해진이 앉았던 자리'라며 찍은 인증 샷들이 올라온다.
대뜸 대장의 답글이 실린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주인장이 화를 낼 수도 있다, 화를 낼 경우 대처하기 힘들다는 엄중한 경고까지 남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 보라색 테이블을 좋아하는 듯했다.
우린 그도 저도 모르고 지나쳤고, 맛집도 지나친 덕분에 알베르게 입성이 네 번째이다.
1시 30분에 도착.
25km를 6시간 동안 바나나 먹으려 두 번, 커피 마시려 잠깐 쉬고는 휴식없이 걸은 것이다.
이제는 걷는 것에 대한 부담이 그만큼 희석되었다고나 할까, 쉬지 않고 걸을만큼 숙달되었다고 할까.
내리 걸어도 몸이 알아서 앞으로 밀어준다는 등, 가만있어도 발걸음이 떼어진다는 등 너스레를 떨었다.
숙소 가까이에 이르러서야 슈퍼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주문한 스파게티가 한참을 걸려 나왔고, 우리가 그걸 먹는 동안 이상하게도 키 큰 남자들이, 스페인어를 쓰는 남자들이 카운터에 기대거나 서서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처음 만난 사이인데 기다리는 동안 정담을 나누는 듯했다.
스파게티로 점심을 때우고 일어서는데 여자 마에스트로가 그들과 함께 카페 문을 나선다.
아~ 카페와 알베르게까지 혼자서 운영하는 여인은 우리를 위해 요리를 하고 있었고, 먹는 동안 주방을 정리하는 걸 이 남자들이 기다린 것이다. 단순히 커피를 주문하는 카페 손님이 아니라 알베르게 손님인 것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린 그들이 카페를 나가서 알베르게 문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괜히 짠했다.
먼저 온 두 사람의 식사 준비를 하는 마에스트로를 위해 다섯 명의 장정들이 기다리는 문화는 충격이었다.
그런 기다림이 가능하다니 경이롭다.
마당에 빨래집게가 가득하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넉넉히 빨래를 널면, 남은 귀퉁이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빨랫줄과 빨래집게가 널널하다.
우리 집 마당인 양 한 줄에 맘껏 벌려 널었다.
그것도 모자라 더 빨아 널게 없나 찾다가 침낭까지 대동했다.
빨래 널은 곳으로 다시 나가 침낭을 널다가 일명 '알베르게 도난 사건'을 줒어 들었다.
도난 사건은 보통 순례길 초반, 걷기 시작한 3일 이내에 주로 발생한단다.
한 한국인이 첫날, 앞 전대를 차고 자고 일어났더니 전대가 늘어져 있고 그 안에 있던 여비 전부인 유로와 한국 돈 30만 원이 모두 사라졌더란다. 여권은 그대로여서 같이 잔 친구들에게 장난치지 마라 했단다.
또 한 사람은 비싼 바지를 빨아 널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없어진 덕분에 지금 바지 단벌로 다닌다 했단다.
다들 모두들 전대를 차고 다닌다. 여권, 돈, 크레덴샬을 넣어 함께 다니고 함께 잔다.
샤워할 때도 꼭 전대 챙겨 가야 하고, 그래서 전대를 넣는 비닐 주머니가 따로 필요하다고 강조하던 친구가 생각났다.
그런 조언이 있었지만 내게는 전대가 없다.
딸내미가 쓰던 개 발바닥 모양의 동전 주머니에 돈을 넣고 배낭의 등 쪽 주머니에 넣는다.
이 주머니는 배낭 바닥까지 연결되어 동전 주머니를 넣으면, 맨 아래까지 떨어져 손을 깊이 넣지 않는 한 잡히지 않는다.
카페에 가면 손을 깊숙이 넣어 꺼내고, 다시 미끄러지게 던져 넣으면 나만 아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태평 그 자체이다.
모두들 빨랫줄 가득 빨래를 널고 잠시 쉬었다.
빨래를 널고 성당에 들러 크레덴샬을 찍고, 성당 입구에 둘려있는 낮은 담에 앉았다.
옷깃을 여미는 쌀쌀한 기운 탓에 뜨거워진 돌담이 좋았다.
쉬는 동안 두 정여사께서 떡볶이와 밥을 조리했다. 대장이 한인마트에서 구입한 떡볶이, 김치, 쌀, 라면사리로 저녁상을 차렸다. 주인장의 허락으로 뜰에 있는 체리나무에서 바가지 가득 딴 체리도 상에 올랐다.
오늘도 여지없이 빨래가 대충 말라갈 즈음 비가 내린다.
저녁밥을 한 숟가락 뜰 무렵 비가 시작되었고 순식간에 빈 빨랫줄만 남는다.
예사 비가 아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천둥을 동반한 콩만 한 우박이 테이블 위에, 돌바닥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겨울에나 볼 수 있는 어름 덩어리가 5월의 마지막 날에, 축하 세리머니인 양 우리를 놀라게 한다.
들이치는 비를 피해 처마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한참을 앉아 있는데 남자가 물었다.
"왜 거기 있어요?"
"좋아요. 집안에서 바라보는 비와 눈은 안락감을 얹어 주잖아요"
알베르게 옆으로 자전거 순례자 둘이서 그 비를 뚫고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오늘도 비를 피한 영성 가득한 순례자의 길이었다. 아멘.
집에 돌아가면 오일 섞은 빤 꼰 또마떼와, 버섯 리조또, 또르띠아, 빠에야를 차려 언니들과 마주 앉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