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 전쟁역사 2실 탐방기

정묘호란부터~~ 국군 창군까지~~

역시 전시 탐방용이다. 그러니 너무 깊게 읽지 말자, 30분정도 이정도 내용은 이해할수 있을것이다.

전공자용이 아니라 역사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계기 정도 될 것이다.

입구에는 남한산성의 남문 지하문이 있다. 인조가 이곳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명이 약해지고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고 이들은 새로운 대륙의 강자가 됩니다.

이들은 조선에 형제관계를 요구하며, 남하하였고, 이때 남이홍 등은 후금군과 싸워냈고 일단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1636년 이미 국가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바꾼 청나라는 남하하고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합니다. 조선은 이때 세자를 강화도로 보내고 인조도 그쪽으로 피난가려고 하였으나 청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세자를 생포합니다. 이때 인조는 강화도로 못가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습니다.


여기 보면 화약통이 보이나요. 당시 조선군은 조총을 사용해서 쌍성전투에서 훈련부족으로 패배합니다. 그러나 광교산 등에서는 인조를 구하러 온 근왕군들이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47일인간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버티다가 결국 항복을 하고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3번 큰절 9번 고개를 조아립니다. 또 병자호란 이후 청은 청태종의 공덕을 기르는 삼전도비를 건설합니다.


이후 우리는 새롭게 국방을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새로운 화약무기를 개발합니다.

호준포 호랑이 다리 모양같인 포, 크기도 작고 사정거리도 깁니다.

비몽포, 조선의 생화학 무기입니다. 삼인포, 3개의 포가 동시에 발사합니다.


그리고 나선정벌이 있습니다. 청나라가 러시아가 싸울 때 참전한 신유장군은 북정록에서 우리군의 사격솜씨가 청나라 군대 사격솜씨가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봉수대가 있습니다. 봉수대의 숫자가 많은수록 위급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봉수대를 지키는 병사들의 삶은 매우 힘듭니다. 추운데서 근무하고, 비가 올경우 직접 뛰어 가서 급한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수원화성은 정조가 세운 성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고, 수원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겠

다는 정조의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또 당시 백성들은 품삵을 받고 일하였습니다. 또 여기에 설치된 포대를 보면서 여러 화포들을 여떻게 성의 수비를 위해 사용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제국주의


당시 제국주의가 강해집니다. 서양은 18세기 이후 한중일 은 큰 전쟁이 없습니다. 반면 유럽은 계속 전쟁이 일어났고 세력을 팽창시키면서 무기도 발전하고 식민지를 가지게 됩니다. 이를 제국주의라고 하지요.

1860년대 청은 제국주의 무력앞에 힘없이 무너지고, 내란이 일어나고 국가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양무운동 등 서양의 기술을 받으들이고 동양의 정신을 유지하자는 자세를 보입니다. 반면 일본은 1860년대 메이지유신이 이뤄지면서,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아시아국가가 아닌 서양국가 처럼 될 것을 국가의 목표로 삼습니다.


이때 한국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쇄국정책을 펼칩니다. 이때 가톨릭신자들을 탄압하고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합니다. 이에 프랑스가 항의하고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합니다. 이를 병인양요라고 합니다

이때 양현수 장군과 우리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입니다.

여기 보이면 양현수 장군의 호패와 옷이 있습니다.

프랑스와 사투를 벌이며 그들의 침략을 막아냈고, 이때 의궤등 많은 유물들이 약탈당합니다.


1866년 미국의 상선 저기보이는 셔먼호가 평안도 시민들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에 평안도 사람들이 배를 불태우죠, 그리고 미국의 군함이 강화도를 공격하니 이를 신미양요라고 합니다.

면갑이 보이나요, 면으로 만든 일종의 방탄복인데, 실제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름에 너무 더워서 군인들이 탈수증상에 고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군은 분전을 펼치는데 위에는 당시 군대를 이끈 어재현 장군을 상징하는 수자기가 있습니다. 신미양요에 참전한 원필드 슬레이는 저 깃발아래에서 조선군은 분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 수자기는 미국에 가져갔다고 다시 2007년에 영구대여방식으로 우리가 받았다가 2024년 3월에 다시 미국으로 보내졌습니다. ㅠㅠ

우리는 신미양요에서 미군을 막아내고 이후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웁니다.


1876년 일본은 여기 보이는 운요호를 보내서 강제로 우리에게 개항을 요구합니다. 대원군도 물러났고, 조선은 드디어 국가의 문을 엽니다. 그러나 당시 강화도조약은 과거 일본이 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재현이며. 일본인의 치외법권 보장과 관세 면제등 일본인의 특권을 보장합니다.


이후 우리 조정은 신식군대를 양성하고, 젊은 엘리트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켜 우리도 일본처럼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으나, 청의 간섭과 아직 백성들에게 근대화와 개화는 낯설게만 느껴져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조선 조정은 부패해지는데, 그중 전라도의 고부군의 군수 조병갑이 백성들을 괴롭히자, 이때 신흥종교인 동학에서 농민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를 동학농민운동이라고 하지요.

사발통문은 당시 동학농민운동지도자들이 쓴 비밀문서입니다. 이름을 잘 알아보지 못하게 해놓은거지요.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함락시키자, 이에 조선은 이들과 화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청나라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에 일본군도 허가없이 오고, 이를 청일전쟁의 발발입니다.

전체적으로 근대화를 이룩하고, 국내 정치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일본에 비해, 청나라는 국내외적으로 이미 국운이 크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응며, 특히 군인들의 군기및 사기도 일본에 비해 떨어졌습니다.

따라서 일본에 거의 일방적으로 패합니다.

이후 일본과 청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조약이 맺여지고 일본에게 막대한 양의 배상금을 내고 조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여기 보면 당시 주역인 일본 명치황제 그옆에 이토히로부미 밑에는 청나라의 광서에와 이홍장

우리나라 고종과 대원군이 있습니다. 이미 이런 그림에도 일본의 노골적인 야심이 드러납니다.


이에 동학농민군 일본군을 몰아내려 올라오지만 일본군은 게를링 기관총을 앞세워 농민군을 진압합니다.

전시되어있는 게를링포는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무기로 이 무기를 통해 열강은 냉병기로 무장한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국민들을 학살하고 그 세력을 더 강화하였습니다.


이때 우리나라는 다시 도약을 준비합니다. 그 상징이 바로 이 독립문입니다. 청나라부터 독립을 의미하여

청나라의 사진이 지나가는 영은문을 헐고 이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1897년 대한제국이 건국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낼수 있는 나라가 된것입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당시 국가가 혼란스러웠습니다. 특히 노동자들의 봉기 등으로 국가를 어려웠고, 일본은 첩보활동을 통해 이를 부추키고, 러시아의 주력 발틱함대는 조선까지 오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망합니다. 일본은 이를 통해 조선에서 실력행사를 하고, 더 나아가 과거 서양과 맺은 불평등 조역을 파기합니다. 근데 일본 이때는 배상금 0원 받아서 일본 국민들은 엄청나게 분노합니다. 이제 일본은 전쟁과 침략이 국가의 산업이라는 것이 국민들에게도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무섭네요.


그리고 기세를 몰아 을사늑약을 맺어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합니다. 이에 고종은 헤이그에 3명의 밀사를 보내 당시 서양국가들의 회의 만국평화외에 우리대표를 참석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고종은 일본에 의해 물러나지요.

그래도 이때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우리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합니다. 그리고 그가 저지른 죄악을 낱낱히 밝힙니다. 여기 그게 써있지요. 하나하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과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은 결국 동양 평화를 해치는 활동이라고 합니다. 이는 세계2차대전까지 역사를 보면

안중근의 의사의 의견은 결코 힘없는 약자가 단순한 외침이 아닌 그당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한 이론입니다.

결국 일본에 의하 한중일은 모두 수천만의 인명이 전쟁과 침략 인권유린 속에서 희생됩니다.


이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문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라는 뺏겼지만 우리 국민은 살아있고, 우리의 주권도 살아있습니다. 대한제국은 망하였으나 대하으로 다시 흥하자는 대한을 쓰고, 황제의 나라가 아닌 이제 국미의 나라 대한민국의 국호가 생깁니다.

나라를 뺏긴 국민들은 다시 나라를 찾고자 여러 독립운동을 합니다. 특히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납니다.

독립선언서가 여기 전시되어있고, 3.1만세운동 전국 곳곳 전세계에서 일어납니다.

이후 일본의 무력에 의해 실패하나, 독립운동 지도자다릉ㄴ 1919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합니다. 그리고 9월에 한성과 연해주의 임시정부도 확실히 통합됩니다.

여기 있는 독립공채를 보십시오, 국민들은 자신의 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위해 기꺼이 내주엇습니다.

그래서 윌리어스 한인 비행학교 등 이런 공군학교를 만든것도 당시 미국에서 성공한 김종림 선생들 국민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공군의 시작이지요. 여기 당시 사용했던 스탠다드 J1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 독립군들은 청산리와 봉오동 등지에서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의사는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지고, 윤봉길 의사는 당시 중국 상하이르 점령한 일본군의 수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척살합니다. 당시 두의사의 한인애국단의 입단 선언서가 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받습니다. 이는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의 장제스가 우리 독립을 미국영국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내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합니다. 또 이는 우리가 독립을 한것은 이런 분들의 피와 희생이 있었고 결코, 이런 노력이 없음, 우리 독립은 연합군의 수장들의 회의에서 거론되기 힘들엇을 것입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합작을 이룹니다. 여기 동포에게 고한다는 김구와 김원봉이 쓴 글입니다. 이념보다 국가를 되찾는게 우선이라는 의미가 있지요.


그리고 1940년 9월 17일 우리나라 국군의 시작 광복군이 창설됩니다. 여기 보면 가운데 김구 그 옆에 지청천 장군이 있습니다. 이 지청전 장군의 광복군 총사령관입니다.

그리고 지청천 장군의 딸 지복영 선생님 사진입니다. 여기 그분의 아들 전 독립기념관 관장 이준식 선생님이 기증한 지복영 선생님의 회고록입니다. 이는 민들레 피면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또 이는 남녀노소 모두 독립운동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광복군은 인면전구 공작대는 인도 버마 일대에서 영국군의 정보부대 역할을 했고 oss작전을 통해 미국과 함께 국내진공을 하려고 했으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실행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나라를 지키기위해 애써왔고, 노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들 중 유일하게 선진국으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기억하고, 앞으로도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우리는 고거 역사를 기억하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앞으로 우리의 밝은 내일을 만들기 위한 기반이 되게 공부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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